통일당의 강령은 “첫째, 국민의 마음과 힘을 통일시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신시대 신이상에 기초한 신국가를 건설한다. 둘째, 인본주의를 창명하여 구천지 구사회를 신천지 신사회로 개조하고 조선적 신문화를 세계에 건설한다. 셋째, 전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강권을 배제하고 세계의 대동을 실현한다. 넷째, 산업 및 교육의 새로운 설비를 도모하고 인류공동생활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내용이다. 통일당은 총리에 신숙, 정치부장에 최동오,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민창을 각각 선임하였다. 이즈음 만주 각처에 무수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서로 알력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선생은 이들 독립단체와 독립군을 일원화하여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토록 하기 위해 1920년 9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선생은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더불어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하였다. 그 결과 1921년 4월 노령․북만주․하와이 및 국내 등지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북경에 모여 서직문(西直門) 밖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통일당 대표로 참석한 선생은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박용만․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 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통일당의 대표자격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그 동안 추진해오던 국민대표회의가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선생은 국민대표회의 주최 순국선현추모행사 준비위원과 회규기초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리고 1월 31일 오후 상해 삼일당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서 선생은 안창호․김마리아 등과 함께 연설하였으며, 의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3월 1일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서는 여운형과 함께 기념사를 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기간 동안 선생은 창조파의 중심인물로서 임정을 대신할 새로운 독립운동의 영도기관 건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의장단이 사퇴하는 등 5개월 여에 걸쳐 갑론을박하다가 와해의 위기에 빠졌다. 그리하여 다시 의장단을 선출한 결과 의장에 윤해, 부의장에 선생이 선임되었으나 임시정부 문제를 타결 짓지 못한 채 국민대표회의는 6월 2일 파국을 맞이하였다. 다음날 6월 3일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발족시켰다. 선생은 외무위원장 김규식, 군무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윤덕보, 경제위원장 김응섭과 더불어 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1923년 8월 20일 김규식․이청천․윤해․원세훈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코민테른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블크를 비롯 한명세 등과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원조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독일혁명의 실패와 1924년 레닌의 사망 등 정치적 변동으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25년 3월초 아무 성과 없이 만주 길림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만주의 상황은 정의부․신민부․참의부로 정립되어 있었고 국제공산당과 교섭도 원활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일차적으로 천도교의 포교사업에 전념하였다. 이때 이름을 숙(肅)에서 태치(泰癡)로 고친 선생은 액목현 교하(蛟河)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새로운 운동방략을 모색하였다. 한국독립당에게 민본정치, 노본경제, 인본문화의 3대 강령 제시.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활약. 이듬해 선생은 부친을 비롯한 가족들과 고국을 떠난 지 6년 만에 하얼빈에서 재회하였다. 이후 가족들과 하얼빈, 이도하자 등의 중국인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927년 2월 이도하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현지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당시 석두하자에 본거지를 둔 신민부의 민정위원장 최호(崔顥)가 찾아와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신민부의 전권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선생은 이를 수락하고 신민부 민정위원 자격으로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중동선 위하현에서 신민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에 입각한 독립운동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선생은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
첫댓글 천도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기여를 한 민족종교이지요.
이러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