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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균길 안내매뉴얼
*원균장군은 누구?
무인의 자손으로 태어남
원균(元均)은 1540년(중종 35년) 1월 5일 도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 자는 평중(平仲), 아버지는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이다.
원준량에게는 원균 외에도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뛰어난 무인이었다. 둘째 원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전란 말기 적성 현감에 임명되어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아들 원사립도 진주 목사와 김해 부사를 역임하면서 왜군과 싸웠다. 셋째 원전은 고성 현감으로서 원균의 수하에서 복무하다 전사했다.
1564년(명종 19년) 원균은 무과에 급제했지만 사간원에서는 그가 애당초 응시자격이 없었다면서 아버지 원준량을 탄핵했다. 실록에 이 기사를 올린 사관은 원준량이 근무지에서 재물을 긁어모아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 날마다 그가 파직되기를 학수고대했다고 적었다. 그 때문에 합격이 취소된 원균은 3품 이상의 양반 자제들이 입대하는 충순위에 입대했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문과에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기에 이른다.
무관이 된 원균은 선전관을 거쳐 북방에 있는 조산 만호가 되었고, 1583년(선조 17년) 이일과 함께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함으로써 부령 부사로 특진되었다. 이후 그는 종성 부사를 거쳐 1591년 전라좌수사가 되었지만 특별한 공적이 없는데 요직에 앉혔다는 사간원의 상소로 인해 낙마했다.
그후 원균은 온성 부사 양대수의 휘하에서 여진족의 시전부락(時錢部落) 토벌에 참여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1592년(선조 25년) 1월 경상우수사에 임명된 그는 그해 2월부터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을 지휘했다.
개전 초기, 함선을 자침시키다
개전 당시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 따르면, 원균이 배 한 척을 끌고 사천의 해포에 숨어 있는데 격군 수십 명 외에 군졸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김성일이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점령한 고성의 빈 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원균은 어쩔 수 없이 고성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100여 명의 왜군과 그들에게 귀순한 백성들이 몰려와 성을 점거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했다.
정신을 차린 원균이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불과 세 척의 전선으로는 어떤 작전도 펼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운룡의 충고대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이영남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연합작전에 대한 전라감영의 승인을 기다리며 관내의 함선을 본영에 집결시켰다.
옥포해전, 이순신과의 첫 연합작전
1592년 5월 3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전선 24척, 협선 15척을 이끌고 출동하여 5월 6일 전선 4척 협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난 원균의 부대와 합류했다. 전선 28척, 협선 17척으로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 수군은 5월 7일 새벽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30여 척의 왜선을 발견하고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연합함대는 왜군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도합 26척을 파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함대의 전과는 21척, 원균 함대의 전과는 5척이었다. 그런데 전투 도중 전공에 집착한 원균은 이순신 함대가 공격하고 있던 왜선에 활을 쏘며 달려드는 통에 조선 병사 두 사람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분개한 이순신은 노골적으로 원균의 행태를 비난했다. 전란 내내 불화를 빚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듯 처음부터 삐꺽거렸다.
훗날 송시열이 쓴 〈원균행장〉에 따르면 당시 원균은 적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필 서명이 담긴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자 동생 원전을 시켜 생포한 왜군 몇 명과 함께 선조에게 바치게 했다. 이에 선조가 기뻐하며 원전에게 선전관을 제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가 부채를 얻은 것은 2차 출동인 당포해전이었다. 〈원균행장〉에 담긴 내용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5월 7일 전투를 마치고 영등포로 이동하던 연합함대는 도중에 왜선 5척을 발견하고 합포까지 추격했다. 당황한 왜군이 전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자 화포를 쏘아 빈 배를 불태웠다. 그날 밤 창원의 남포에 휴식을 취한 연합함대는 적진포로 나아가 이동하고 있던 13척의 왜선을 공격하여 대선 9척과 중선 2척을 포함하여 도합 13척을 격파했다.
그처럼 원균과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첫 작전에서 왜군의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7척 등 도합 44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무렵 연이은 육전의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선조는 모처럼의 승전보에 몹시 기뻐하며 이순신에게 자헌대부, 원균과 이억기에게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연이은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승리하다
성공적으로 연합작전을 마무리한 원균과 이순신은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은 이순신에게 왜군 선발대가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와 노량해협까지 후퇴했으니 급히 출동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5월 29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류 공문을 보낸 다음 노량으로 나아가 원균 함대와 조우했다.
그들은 사천 앞바다에서 왜선 1척을 추격하던 도중 사천 선창에 정박해 있는 왜선 12척을 발견하고 유인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조수가 썰물로 바뀌자 연합함대는 거북선을 앞장세워 적의 진용을 흩트린 다음 화포를 퍼부어 왜선을 모두 수장시켰다. 6월 2일에는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파했다.
6월 4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합류하자 연합함대는 총 51척으로 불어났다. 사기가 치솟은 조선 수군은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군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등 26척과 일전을 치른 끝에 적선을 모조리 격파했다. 날씨 때문에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연합함대는 6월 7일 재차 출동하여 율포에서 부산 방향으로 도망치던 왜군의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격파한 다음 작전을 종료하고, 6월 10일 각자의 주둔지로 귀항했다.
7월 4일, 원균은 이순신의 병력 지원 요청을 받고 6일 노량에서 재차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이틀 뒤인 7월 8일 노량에서 왜군의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공격해 오자 이순신 함대는 후퇴하는 척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들였다. 작전대로 왜군이 학익진 안으로 들어서자 조선군은 일제히 방포하여 왜군을 괴멸시켰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한산도대첩이었다.
원균은 그렇듯 이순신과 함께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경상우수영으로 회군했다. 한데 《난중일기》에는 당시 전투 과정에서 전공을 탐한 원균이 조선 백성을 살상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한산도 해전 직후 왜군이 포로를 일부 풀어주었는데, 조선군이 다가가자 배에 타고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자신들은 조선 백성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원균은 못들은 척하고 그들을 모두 죽인 다음 왜군의 목을 베었다고 보고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순신에게 원균은 동료장수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과의 불화, 선조의 비호를 받다
국토가 왜적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 조정은 사색당파로 갈려 이전투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성룡과 권율, 이원익 등 남인과 동인들은 이순신을 옹호했고, 윤두수와 윤근수를 비롯한 서인들은 원균을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추어주며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자 이산해를 비롯한 북인들까지 원균 편을 들었다. 그렇듯 중신들이 역량보다는 자파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사를 요직에 앉히려 하면서 조선 수군에 위기가 닥쳐왔다.
원균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 이순신이 오늘날 해군참모총장 격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크게 반발했고, 조정에 그를 모함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이순신 역시 원균이 측실 소생으로 12세에 불과한 아들 원사웅에게 전공이 있는 것처럼 꾸며 장계를 올린 사실을 폭로했다.
이순신은 당시 원균이 기효례와 더불어 여자를 전선에 태우고 다녔고, 평소 술에 취해 망발을 일삼고 부하들을 구타했으며, 명나라에서 지원한 무기를 독점하는 등 지휘관답지 않은 그의 행실을 조소했다. 《난중일기》 1595년 11월 1일자 기사를 보면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처럼 남해를 지키는 주요 수군 지휘관들의 자중지란이 불거지자 선조는 이를 경계하는 교시까지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왜군의 정보망에도 포착되어 향후 이순신 퇴출의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그 무렵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알고 상대적으로 원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개전 초기 원균의 지원 요청을 이순신이 거절했다는 서인들의 참소와 함께,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이순신에 대한 경계심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균이 상급자인 이순신의 지휘를 거부한다면 작전수행에 차질이 생길 것이었다. 때문에 1595년 12월, 선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원균을 충청 병마절도사로 전임시켜 이순신과 떼어 놓았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회담을 벌이던 그 시기에 충청 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긴 원균은 왜군의 재침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상당산성을 수리했다. 그런데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나마 완성된 성벽이 부실공사로 인해 폭우가 내리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그와 함께 현지에서 원균의 탐학이 도를 넘어서자 1596년 8월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선조가 어려운 시기에 명장을 내칠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자 사헌부에서는 또 다른 죄상을 밝히면서 재차 그를 탄핵했다. 각 도의 병사에게는 규정상 종사관을 둘 수 없는데 원균은 전 가평 군수 최덕순에게 종사관의 직함을 주고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듯 임진왜란 내내 선조는 이순신과 적대하고 있던 원균을 신임하고 옹호했다. 이는 이순신처럼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을 깎아내림으로서 개전 초기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하면서 민심을 잃고 약화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시각도 있다. 선조의 그런 내심을 직시하고 있던 권율은 매일 선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란이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1596년 7월 공주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 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동요하자 선조는 원균을 전라좌병사로 임명하여 난을 평정하게 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원균에게 미리 군사를 주면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니 전투에 임박하여 군사를 주어 돌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선조는 그가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서 그렇다며 원균을 적극 변호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1597년 1월,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대규모의 왜군이 재차 남해안에 상륙했다. 정유재란이었다. 이때 경상우수영에 잠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자 요시라는 김응서의 진영으로 잠입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올 것이니 바다 한가운데서 잠복했다가 기습하면 사로잡을 수 있다고 제보했다.
김응서의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위유사 황신을 이순신에게 보내 부산포 방면으로 출동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이순신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선조의 의심을 감안하여 63척의 전선을 이끌고 부산포 방면으로 몇 차례 출전했다가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가 어명에 불복했다 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한 다음 서울로 압송하여 하옥시켰다. 이때 원균은 상소를 올려 자신을 등용하면 부산포를 공격하여 왜군을 물러나게 하겠다고 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백여 명이나 2백 명씩 큰 바다에서 위세를 떨치면, 가토 기요마사는 평소 수전에 겁을 먹고 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원균의 계획은 왜군이 당시 경상도 일대 주요 해안을 점령하고 곳곳에 왜성을 쌓아 해로를 감제하고 있었으므로 실효성이 전무했다. 하지만 그를 병적으로 신뢰하던 선조는 그해 2월 원균에게 전라좌병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얻은 원균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선조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관군이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제거해 주면 수군이 부산포로 갈 수 있다고 우겼다. 당시 남해안에서 명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군의 상황이나 병력규모로 볼 때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이에 체찰사 이원익이 종사관 남이공을 보내 전투를 재촉했다.
그 와중이었던 3월 25일, 원균은 거제도에 나무하러 온 왜군 80여 명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하여 선조를 흐뭇하게 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왜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고성 현령 조응도를 비롯하여 140여 명의 병사가 죽고 판옥선 1척까지 빼앗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승전이 아니라 패전이었던 것이다. 이때 왜군 진영에서 강화회담 중에 교전이 금지되어 있는데 조선군이 자국 병사 47명을 죽였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그 때문에 선조는 원균을 위해 만지작거리고 있던 포상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칠천량에서 패하다
그해 6월, 왜군은 재차 요시라를 경상우수영에 파견하여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왜선이 무방비 상태로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때를 맞추어 공격하면 대승을 거둘 것이라고 꼬드겼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 출전 명령을 내리자 원균은 왜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평소 그를 고깝게 여기던 도원수 권율이 강력하게 출전을 명했다.
어쩔 수 없이 원균은 134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웅천 앞바다로 나아가 왜군과 교전했지만 적선의 규모가 시시각각 불어나자 평산포 만호 김축, 보성 만호 안홍국을 잃은 채 퇴각했다. 이후 원균이 계속 출전을 망설이자 권율은 그를 소환하여 곤장까지 쳤다.
그해 7월, 원균은 전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항진했다. 부산포 근처에서 도주하는 왜선을 급히 뒤쫓았는데 알고 보니 적의 유인작전이었다. 원균이 깜짝 놀라 퇴각령을 내렸지만 12척의 판옥선이 거센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침몰해 버렸다. 다급하게 후퇴하던 도중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왜군의 공격을 당해 400명의 병력을 섬에 남기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진중에 돌아온 원균이 한동안 꼼짝하지 않자 권율이 또 다시 그를 불러 곤장을 치면서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거듭되는 패전과 수모 속에 울화가 치민 원균은 1만여 명의 수군을 실은 160척의 전선을 이끌고 부산포 방면으로 출동했다. 7월 15일 밤 함대가 온라도에 다다랐을 때 왜군이 작은 초탐선을 잠입시킨 다음 대규모 선단으로 멀리서 에워쌌지만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이순신에게 연전연패 당했던 왜장 도도 다카도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회심의 작전이었다.
이튿날인 7월 16일 새벽 조선 함대가 칠천량에 정박했는데 갑자기 전선에 불길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두 척의 왜선이 공격해 왔다. 그것을 보고 당황한 원균이 퇴각령을 내렸고, 병력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포위하고 있던 대규모의 왜선이 몰려들었다.
〈원균행장〉에 의하면 적선이 사방에서 충돌해 오며 탄환을 비처럼 쏘고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 바다를 말아 올리는 것 같아서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이 닻을 올리고 먼저 달아남으로써 훗날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사용한 10척의 전선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대패한 원균은 거제도로 피신했다가 뒤쫓아온 왜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시 그의 나이 58세였다.
훗날 사가들은 원균의 패전 이유 중에 하나로 중과부적을 지적했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었던 조방장 김완의 《해소실기》에 의하면 160척에 달하던 대규모 함대가 단 2척의 왜선에 놀라 후퇴함으로써 전열이 와해되었고, 이어진 왜군의 포위공격에 궤멸당한 것이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판옥선 122~158척에 거북선 3척을 모두 잃고 해상분해되고 말았다.
칠천량전투의 패전으로 7년 내내 굳게 지켜온 조선의 곡창 전라도 지역의 통로가 뚫림으로써 조선은 또 다시 심대한 위기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모선재
원균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당 뒤동네가 운터말인데 이 마을이 원주원씨 입향지일 가능성이 높다.
*원균장군묘
한남지맥에서 쌍령산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안성 천덕산으로 달려와 양성 고성산, 원곡 덕암산 월곡동 백운산등의 산줄기들로 늘어진다. 이 산줄기가 쌍령지맥이다. 덕암산은 아흔 아홉골을 만들고 다시 부락산으로 이어져 길게 늘어진 구릉은 숫고개를 만들고 이윽고 황구지천에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산세의 높이는 채 200m가 되지 못하는데 이곳저곳에 좋은 혈자리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중 한곳이 덕암산 자락의 원균묘소이다. 이곳은 원주원씨 600년 집성마을로 상리와 안골 그리고 하리인데 원균묘소와 모선재가 있는 마을은 안골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커다란 저수지가 묘지아래 자리를 틀고 있어 마치 묘지를 위한 연지(蓮池)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농업용수를 가두는 곳이다. 바로 위로 큰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원균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시신이 들지 않은 허묘이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한 이후 고성 쪽 육지로 나갔다가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그곳 사람들이 수습했다는 설도 있다. 원릉군의 묘소는 덕암산이 주맥을 부락산으로 넘겨주고 작은 맥을 남쪽으로 구부려 떨어뜨린 곳의 끝부분에 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자리를 혈穴자리라고 했다. 묘소를 한 바퀴 돌아보면 명당 자리란게 무엇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평택에 많은 명당이 자리하지만 실제로 원릉군의 묘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가 있다. 물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무의미한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후손들로서는 가문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인물의 묘소가 그런 기가 발산된다고 하면 그만한 영광이 없으리라. 안골을 중심으로 하리, 상리에 원균의 생가터는 물론이고 전통적 무신(武臣)집안의 내력답게 관련지명들이 남아있다. 대마(待馬)거리, 투구봉, 숫돌고개, 갓골과 같은 자연지명이 그러하고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말과 관련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말무덤
초라하지만 무덤 발치께에 봉긋이 솟은 묘가 애마총이다. 주인 잃은 말이 주인의 갑옷을 물고 왔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전란동안 피폐해진 사회를 복구해야만 한다. 이때는 반드시 그만한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요즘 같으면 애국심이라고 하는걸 끄집어 내겠지만 봉건시대 일반 백성에겐 그보다 설득력 있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효과적일 수 있다. 이때 나타나는 이야기가 이런 부류의 이야기다.
*원준랑 신도비
평택시 도일동 (신촌)에 있다.
원준랑(元俊良 ? ~1557)은 원릉군 원균의 부친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57(명종 12년)년에는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으나 사림파에게 화를 당한 후 향리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후 아들 원균이 선무1등공신이 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도비는 1800년(정조 24년)에 건립되었는데, 김재찬이 찬(撰)하고 민병승이 썼다.
*벽화
때를 놓치면 아니되옵니다.
3월 29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원균(元均)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전략...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날마다 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에서 병위를 드날려 보인다면 회복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버티며 날짜만 보낸다면 한 해를 넘어서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더욱 심하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할 것인데 군사가 쇠잔하고 군량이 고갈된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병력을 움직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그리고 행장(行長)·요시라(要時羅) 등이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선조실록 권87 선조30년4월 을묘조
위에 실록은 칠천량해전이 있기 전 4개월 전 원균이 올린 상소문이다. 원균은 장마가 오기 전에 육지와 바다에서 합동작전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정은 간첩 요시라의 말을 믿고 해전만을 고집하며 원균을 몰아 부친다. 이로 인해서 원균은 권율에게 태형을 받는 등 고초를 치룬다. 결국 7월 부산포로 진격했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칠천량으로 후퇴해 해전을 치루게 된다. 해전 최초의 참패.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전함이 무사히 후퇴했을 뿐이다.
벽화는 원균의 상소를 바탕으로 그렸다.
벽화에서 보듯이 그의 병법적 고려가 옳은 것이라는 전란 후 평가가 있다. 아마 그가 선무1등공신이 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정치에서 균형잡기가 주요 원인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뒤 바침 한 것이 을묘년의 상소일 것이다.
*우물
능말의 식수,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묘는 가까운 마을에 역(役)을 면제하고 관리하도록 조처했는데 이 마을이 그 마을이다.
안골마을
이곳 도일리 일원은 석씨가 천년을 살고 소씨가 천년을 살고 원씨가 천년을 살고 있다는 땅이다. 석씨의 흔적은 알 수 없으나 진주소씨는 덕암산 자락을 식읍으로 받아 이곳에 정착 했다고 한다. 원씨는 이곳 입향조인 원몽이 처가인 진주소씨 세거지로 옮겨오면서 누대로 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균장군 생가터
능말 끝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원균장군이 태어난 집터가 있으나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다.
*콩나물샘
차분하고 오래된 집들을 보며 걷다보면 안말 끝부분에 콩나물 샘이 있다. 이 샘은 덕암산 너머 산하리에서 콩나물을 씻다 흘리면 이 샘에서 흘린 콩나물이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석하긴 애매하지만 아마도 산하리에서 도일리로 삶터를 옮겼던 기억의 조각이 아닐까싶다.
*울음밭
바로 앞으로 내려서면 울음밭인데 울음밭 유래비석이 서있다. 원균장군의 애마가 사흘동안 울다가 죽었다는 곳이다. 만들어낸 이야이기 일 것이다. 원균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한 것은 같이 탈출하다가 살아남은 선전관 김식에 의해서였다. 일설에 의하면 지금 거제도에 “웡규니묘”라고하는게 전해진다고 한다.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진 “웡규니묘”를 확인해 봐야 한다. 하지만 “웡규니묘”가 육지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도망치다가 잡혀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중에서 달가와 하지 않을 만한 일이다.
*양세충효정문
참나무 산길을 따라가다가 상리 오르는 길을 만나면 바로 원연의 ‘양대충효정문’이 외롭게 길손을 맞는다.
정려(旌閭)의 주인공은 조선 중기의 무인이었던 원연(1543-1594)과 아들 원사립(1569-1610) 그리고 19세기 인물인 원길상이다. 양세(兩世)라는 이름을 가진 정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삼세(三世)인 셈이다
혹자는 원균보다 원연이 더 부각되어야 할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원연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아들인 원사립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이다. 공식적으로 선무일등공신 책록을 받은 원균의 후손들이 은덕을 크게 입었을 것이며 더 번창했을 것이다. 당연히 입지가 강한 쪽은 원균장군 후손들일 것이다.
원연은 원균의 4촌 동생이다. 원연은 아들 원사립과 더불어 원씨 집안 장수들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곳에 원문에서 임란이후 공신에 오른 자가 원균의 아들 원사웅을 포함해 무려 13인이나 된다. 국난을 맞아 분연히 일어나 싸운 기억들은 후손에게 자랑이며 새로운 힘이 될 수도 있다.
*원사립,원연,원길상 묘
*정골
안골을 지나 덕암산 정상부로 올라가면 풀무골로도 불리는 정골이다.
정골에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원만주의 제철유적이 있다. 원만주는 이인좌의 난을 모의할 때부터 적극 가담했던 인물로, 난(亂)에 호응하기 위하여 제련시설을 마련하여 농기구를 만들어 팔면서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병장기를 제조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하지만 난이 실패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했고 제철유적도 파헤쳐졌다.
지금도 이곳에는 제철흔적이 남아있고 파묘(破墓)된 자리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흩어져 있다.
*원균장군의 평가
원균 길을 돌아보며 원균은 늘 부정적으로 이순신은 긍정적으로 그려진 이유를 생각해봤다. 문제는 기록이었다. 자신을 변호하는 기록을 원균은 남기질 않았다. 행장록은 후세에 의해 만들어 진 기록이다. 반면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겼다. 일기를 남긴 이순신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순신이 지장의 모습이라면 원균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혹자들이 말하는 맹장일까. 용장일까.
선조실록을 보자.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
원균은 현재 들어 평가가 많은 인물이다. 그동안 이순신장군의 성웅화에 대한 피해자라는 입장은 그를 최소한 용장 내지는 맹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가들은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당한 졸장이며 자신의 출세에 매몰된 남루한 인간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순신장군의 성웅화의 피해자라는 입장은 위에 열거한 선조실록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사란 것이 하나를 살리면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하는 인심이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원균은 충신 이순신에 대한 역적 원균으로 묘사된 인심이었다. 객관적으로 당시를 설정하고 거기에 두 사람의 생각과 실천을 가감 없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하고 전달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여튼
리더는 조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토대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원균장군은 리더로서의 자격을 지녔는가 하면 박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리더의 역할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의 이동에 따라 변해야하고 시세에 따라 적응해야 하는 것이 리더처럼 보인다. 충분한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 보다는 곡학아세가 판을 친다. 리더는 조직의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리더가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칠천량해전과 같은 비극의 결과물이 어디서든 나올 수 있다. 원균과 칠천량해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시대가 또 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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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습니다~~~~~~~
다만 생태도 추가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