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싸움
싸움닭 두 마리가 목깃을 부풀리고 서로를 노려보는 풍경 저쪽
짝다리 짚고 지켜보는 사람들 있다
싸움으로 흥정하고 챙기는 사람들 있다
피 흘리는 한반도가 어른거렸다
/ 복효근
사진 속에서 시를 꺼내다
디지털 카메라가 있기 전부터 사진을 찍어왔다. 기념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풍광이나 야생화 등도 찍었다. 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서 찍었다. 기념이나 기록을 위한 사진 말고도 더러 사진을 찍었는데 가령 내가 본 풍경이나 사물이나 인물이나가 강렬한 울림을 주는 순간에 카메라를 꺼냈던 것 같다. 그 강렬한 울림이란 시를 쓰는 나에게 시적 모티프로 다가오는 순간이라고 해야 옳겠다. 아직 충분히 언어화되지 아니하였으나 대상에서 시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을 붙잡아두려는 노력이 사진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포착한 이미지로부터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시키고 상상력을 붙여나가면서 시를 완성하게 된다. 모든 시 쓰기가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꼭 대상을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뒤에 거기에 담긴 시적요소를 추출하여 시로 썼던 것은 아니다. 사진 없이도 대상에서 시적인 발상을 얻고 시를 쓴다. 그럴 때마저도 마치 사진처럼 어떤 한 장면을 떠올리며 쓴 시가 많다. 굳이 사진을 찍은 것은 그 기억의 보존에 의미가 있었을 터이다. 사진으로 찍힌 대상은 기억 속에서 오랜 시간 언어적인 형상화 과정을 거쳐 사진 없이 언어만으로 된 시로 남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사진 찍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장면에서 시적 발상을 얻을 때마다 메모라는 방법으로 재빨리 생각과 느낌을 붙잡는다. 시적발상은 휘발성이 강하다. 이제 시적인 발상을 자극하는 장면에선 지체 없이 카메라를 꺼내게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이다. 과거 아날로그 카메라로 시적인 대상을 붙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디카시가 나타났다. 시적인 순간이 사진에 담겨 있으면서 사진이 말해주지 않은 부분을 언어가 담당하고 사진과 언어가 하나로 묶여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시적인 어떤 장면을 언어화하자면 묘사와 설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사진과 언어의 병치만으로도 상징과 비유가 성립될 수 있고 사진이 객관적 상관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시가 장황해지지 않아도 된다. 언어표현만으로 이루어진 시 말고, 사진과 시가 하나로 엮인 디카시가 그만의 정체성을 가진 독자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이유다.
본격적 시가 아니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인을 보았다. 시를 쓰기 위한 훈련과정으로 여기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디카시를 과도기적 현상으로 치부하려 하거나 기성 시의 아래에 두려는 층위적 혹은 우열의 사고에 머무는 동안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작품들이 이미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학교 현장에서 새로운 감각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창의력을 끌어내는 데 매우 유효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직접 디카시 작업을 해보니 시각적 이미지도 분명 효율적인 시적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언어표현과 적절하게 융합되었을 때 이들이 서로 만나지 않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아우라를 뿜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나도 아직은 그 개념과 창작법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진 못했다. 이는 내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시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동남아 어느 나라의 전통시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닭싸움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담뱃값 정도 될 만 한 돈을 걸고 닭에게 대리전을 치르게 하는 장면이다. 닭은 오직 싸우도록 길들여졌을 것이다. 문득 외세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내 조국 한반도가 아프게 떠올랐다. 평소 갖고 있는 내 사회 역사인식이 객관적 상관물을 만난 것이다. 언어만으로 시를 쓰자 했으면 설명부분이 길어지거나 묘사가 장황해서 시적 긴장도가 느슨했을 수도 있다. 이미지를 통해 언어표현의 과감한 생략과 함축이 가능해졌다. 언어표현에서 생략되고 압축되고 함축된 부분을 이미지를 통해 읽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복효근 / 남원 출생. 1991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외.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신석정문학상 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