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머슴이 뭐에요(연간집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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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오늘은 철민이가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눈 참 기쁜 날입니다. 할아버지 댁에서 열흘 동안을 지내게 된다니 날아갈 듯 기쁩니다.
철민이 아버님, 어머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신데 겨울 방학을 맞아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철민이 나이는 열 살, 초등학교 4학년이고 대구에서 삽니다.
철민이 할아버지 댁은 대구에서 자가용차로 한 시간 쯤 걸리는 시골 마을입니다.
철민이 할아버지께서는 시골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시며 사시는 농사꾼입니다. 큰 과수원 농사를 하고계십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 차로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준비 해 놓으신 아침을 먹고 철민이 부모님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철민이는 할아버지 댁이 참 좋습니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좋고, 예쁜 풀꽃이 좋습니다. 더 좋은 것은 유치원 때부터 다니는 태권도, 피아노, 영어학원을 안 가도 되고 ‘공부공부’하는 부모님 잔소리를 안 듣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철민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너무 좋은 날입니다. 하나뿐인 금쪽같이 귀한 손자와 열흘 동안이나 함께 지낼 수 있으니 정말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무었을 할까? 어떻게 해야 손자 놈이 기뻐할까?’ 새하얀 피부에 가냘픈 몸매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마음은 안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손자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습니다.
“철민아!”
“예, 할아버지!”
“우리 열흘 동안 뭘 하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라면 저는 뭐든 좋아요.”
“그래, 우선 맛있는 것 먹고 마음껏 놀아보자.”
“에엣, 할아버지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 주셔야 해요.”
“그래, 좋아. 할아버지 일도 도와 줘야한다.”
“좋아요.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뭐라도요.”
오늘은 마침 읍내 장날입니다. 할아버지는 철민이에게 시골 장터 구경을 시켜 주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가 함께 손잡고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철민이가 처음 가보는 시골 장터 구경입니다. 왠지 재미있을 것만 같아 신이 납니다. 시장에 도착하자 곧 기름집을 찾아 참깨를 맡기고 참기름을 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시장 구경을 합니다. 떡집 앞을 지납니다. 알록달록 예쁜 떡들이 먹음직스럽습니다. 이것저것 골라 실컷 먹고 푸짐하게 샀습니다. 국밥집에서 소고기 국밥도 사 먹었습니다. 어물전에 들려 멸치, 고등어, 조기, 미역도 샀습니다. 소고기, 돼지고기도 샀습니다. 열흘 동안 철민이를 위한 준비인 것 같습니다.
신발 가게에 들려 할아버지 할머니 겨울용 털신발도 사고, 철민이가 시골 있는 동안 편히 신어야 한다면서 까만 고무신도 샀습니다. 5천 원짜리라고 하는데 신어보니 가볍고 편해서 엄청 좋습니다. 기름집에서 짜 놓은 참기름을 받아 정류장에서 한참동안 기다린 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뜻 깊은 하루였습니다.
할머니가 저녁밥을 지으시는 동안 철민이는 할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수확이 끝난 썰렁한 과수원 한켠으로 늘어선 감나무들 높은 가지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들이 꽤나 많이 달려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졸라 홍시 몇 개를 땄습니다.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세 개를 먹었더니 배가 불렀습니다. 할머니께서 지으신 저녁밥이 푸짐 합니다. 소고기국에 고등어구이까지 배가 불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습니다.
철민이가 기다리던 저녁시간입니다. 따듯한 온돌방에 팔순을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와 마주 앉았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뭘 하는 시간인지 아시죠?”
“글쎄, 뭐 하는 시간인가?”
‘에잇, 할아버지. 아시면서 괜히 그러신다. 옛이야기 하시는 시간이잖아요.“
“응, 그렇든가. 그래,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시면서 지그시 눈을 감으시더니 이야기를 하셨다.
“사실은 내가 철민에게 꼭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한데 별로 재민 없을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할아버지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좋으니 빨리 해 주세요.”
“이 이야기는 내가 살아 온 일들에 관한 이야기라 언젠가는 너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지만 아직 네 나이가…….”
“할아버지께서 겪으신 이야기라니 더 궁금한데요.”
“아따, 뭘 그리 뜸을 들이고 있어요. 빨리 해 주지.”
할머니께서 재촉을 하십니다.
“철민이 너 ‘꼴머슴’이 뭔지 잘 모르제?”
“‘꼴머슴’요? 머슴은 무슨 뜻인지 아는데, ‘꼴머슴’이면 꼴통 머슴이란 뜻 아닌가요?”
“꼴머슴이란 말이다. 소를 먹이는 풀을 소풀 또는 소꼴이라고 하는데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소꼴을 베고, 소를 먹이는 등 잔 심부름을 하는 나이어린 머슴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그런데 꼴머슴이 왜요? 왜 꼴머슴 이야기 인가요?”
“응,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실은 어릴 적에 꼴머슴살이를 했단다.”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할아버지 나이가 열 살 때에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까 너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함께 세상을 떠나셨단다. ‘호열자’라는 몹쓸 전염병에 걸려서 말이다. 그 때 그 병에 걸리면 약도 없고 거의 다 죽었단다. 그래서 갑자기 고아가 되었지.”
“저런,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꼴머슴이 되었군요.”
“그래, 부모님도 가난하고 가까운 친척도 없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단다. 오갈데가 없이 혼자 남게 된 나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가 머슴살이 하던 집에서 나를 꼴머슴으로 삼아 키워 주었단다.”
“할아버지 힘 많이 드셨겠어요. 열 살이면 나와 같은 나이인데 그 나이에 머슴살이를 하시다니요.”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힘들었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옛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는 것과 할아버지 세대들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오늘 날 나약한 어린이들에게 알려서 힘든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어 씩씩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꼴머슴들 어려웠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까? 내가 겪은 꼴머슴이 하는 일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일들을 했단다.”
아침 일찍 어둠이 가시기 전에 일어나 *우물물을 길러다가 물동이에 채우는 일 *꾸정물을 모아 가마솥에 붓고 쇠죽을 끓이는 일 *마당을 쓸고 마루, 방, 뜰 청소를 하는 일 *주인아저씨 세숫물(겨울철은 쇠죽솥에 따뜻하게 데운)을 준비 해 준 후 내가 세수하고 *쇠죽을 퍼서 소에게 먹이는 일 등이고
아침을 먹고 나면 *오전에 주로 하는 일은 소꼴을 베어 소먹이 풀을 준비하고, 겨울철 소먹이 풀을 만들기 위해 풀을 말리는 일 *오후에는 소를 산이나 들로 몰고나가 풀을 먹게 하고, 소가 풀을 먹는 동안 소꼴을 배는 일을 하는데 이는 여름철에 주로 하는 일이고, 겨울에는 오전 오후 모두 땔감 나무를 하는 일과 아침저녁 쇠죽을 끓이는 일이 주된 일이고 집안의 크고 작은 심부름은 모두 꼴머슴 몫이란다.
“와아, 할아버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노는 시간은 없었겠네요?”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노는 시간? 머슴이란 노는 시간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해, 일 하면서 틈틈이 쉬는 정도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 따위는 아예 생각도 못하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학원가기 힘든 다고 때 쓴 것이 부끄럽네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 품삯은 얼마나 받나요?”
“품삯이라고? 그런 것 없어. 꼴머슴은 밥 먹여주고, 잠 재워 주고, 옷 입혀 주면 그게 끝이야.”
“에잇,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땐 다 그랬어. 열다섯 살이 넘어 중머슴이 되면 일 년에 쌀 한 가마니 정도 주지. 열다섯 살 까지는 꼴머슴, 스무 살 까지는 중머슴, 스무 살이 넘으면 상머슴이 되는데 나는 이 세 가지 머슴노릇 하며 한 집에서 15년 간 살았단다. 스물다섯 살에 할머니와 결혼 했지. 머슴살이해서 모은 돈으로 초가삼간 집 한 채와 산골 논 세마지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조그만 비탈 밭 하나로 살림을 시작 해 오늘 날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 되었단다.”
“와아, 우리 할아버지 대단 하시다. 할머니도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럼, 할머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안 되었지. 할머니는 솜씨가 좋아 못 하는 일이 없단다. 동네 힘든 일은 다 해주고 품삯을 받았고, 이것이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단다.”
“이 큰 과수원은 어떻게 만들었어요?”
“과수원 터는 원래 얕은 산 이였는데, 싼 값으로 사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골라내는 등 일로 밭을 일구었단다. 5000평 과수원을 일구는데 10년이 넘게 걸렸어.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 했지. 어린 과일 나무를 심어 오늘 날의 과수원을 만들기까지 한 평생 피땀으로 일군 것이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요즈음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단다. 나이가 들어 일도 잘 할 수 없는데다가 5년 동안이나 과수원 일을 도와주던 베트남 아저씨가 고향으로 돌아갔어. 니 아버지가 농사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정년까지 채워야한다고만 하니 요즘 잠이 안 온단다.“
“할아버지, 제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만 참고 견뎌주세요. 제가 할아버지 뒤를 이을 께요.”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니가 농사를 짓겠다고?”
“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님이 반대하시겠지만 저는 공부하기가 싫고, 시골 생활이 너무 좋아요. 어떻게 하던지 부모님을 설득해서 할아버지께서 이뤄놓은 가업을 꼭 이어가겠습니다.”
“그래, 철민이 말만 믿고 견디어 보까. 8년이면 내 나이 아흔셋 그 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백세까지 사실 터이니 걱정 마세요.”
“철민이 말 믿고 내년 농사 준비나 해야겠구나. 일꾼도 구하고.”
“이제 그만 잡시다.”
“예. 할머니. 오늘은 장에 다녀오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일찍 주무시고 남은 예기는 내일 또 해요.”
철민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서 두 팔을 베고 누웠습니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행복한 잠을 잤습니다.
행복한 열흘이 후딱 지났습니다. 철민이 부모님이 오후 늦게 돌아왔습니다. 하룻밤 쉬어가라는 할머니 청을 마다하고 곧장 집으로 가자고 재촉을 합니다. 할머니께서 미리 준비 해 둔 각종 과일과 고구마 등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실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빨리 가서 쉬어야 하겠어요. ”
“오냐, 늦기 전에 어서 가거라.”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약속 꼭 지킬 께요. 봄 방학 때 또 놀려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