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생각
송현 이 내 빈
골방에서 새어나오는 등잔 불빛이 바람에 출렁였다. 바람의 끝자락을 타고 포개지는 흐느낌, 그것은 아버지의 울음소리 였다. 화려한 어느 봄날 초저녁 아버지는 형의 다리 뼛조각을 움켜쥐고 터져 나오는 오열을 삭히고 있었다. 며칠 전 골수염을 앓던 아홉 살 짜리 형의 오른쪽 다리를 수술한 것이다. 개나리도 목련꽃도 참 허망한 봄이었다.
일곱 살이 되든 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나타나기 시작한 오른쪽 다리의 통증은 어린 형을 괴롭혔다. 대대로 자식이 귀한, 그것도 위로 딸 셋을 낳고 애타게 기다렸던 장남이다. 금지옥엽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은 물론 일가친척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형에 대한 부모님의 우려와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다리의 통증은 점차 심해져 갔고 걸음 조차 불편해져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3학년이 되자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 전국의 유명한 한의원과 병원을 전전하였지만 병명 조차 알 길이 없었고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졌다. 8개월 가까운 세월을 농사일도 팽개치고 아버지는 형의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낙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자식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히며 작두날 같은 하루 하루를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중 먼 친척의 소개로 전주의 한 병원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골수염 진단을 받게 되었다. 골수염은 골수에 염증이 생겨 골수조직이 파괴되어 여러 가지 증상이 동반되는 병이다. 그동안 병원을 전전하다 보니 치료 시기를 놓치고 만성에 이르러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던 모양이다.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었다. 아버지의 고민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에 맡기고 수술대에 오를 수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되어 절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지만 향후 보행에 지장을 줄 것 인지의 여부는 상당기간 경과를 지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수술 3일 뒤 아버지는 긁어낸 형의 뼛조각을 싸들고 가족 친지들에게 경과를 알리기 위해 귀가하게 된 것이다. 안도와 자책의 눈물이 강물처럼 가슴을 흐르고 있었다.
형은 나보다 세 살이 더 많다. 위로는 누나 셋과 내 밑에 네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낡은 신문지에 꼬깃꼬깃 접어온 것을 펴보이며 “이것이 너의 형 다리뼈다”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분신과 같은 자식의 뼈 조각은 예리한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고 흐르는 눈물은 강물을 이룰만큼 흐르고 또 흘렀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의 마음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향, 그곳에서 나는 아주 큰 사건이자 강렬하고도 너무나 선명한 슬픈 기억을 갖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그 후 형의 다리는 치료가 잘 되어 정상인으로서의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훗날 가족들과의 많은 추억을 쌓으며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평생동안잊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고 그곳은 나의 고향이 되었으며 나의 인생을 성장시킨 근원으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남향의 초가집은 아담하게 잘 정돈되어 햇볓도 잘 들었고, 대숲에선 세때들이 시도 때도없이 지껄여대는 전형적인 농가였다. 마루에 앉으면 동구밖이 멀리까지 훤히 내다보이는 명당 자리였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마당 끝 돌담을 따라 단감나무 세 그루가 일렬 횡대로 가지런이 서있고 그 옆 화단에는 채송화, 봉숭아며 해바라기도 몇 그루 서 있었다. 대문 왼쪽 옆에 자리한 조그만 사랑채엔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 살고 있었는데 정갈하였다. 그 옆으로 여름이면 하얀 수국꽃 활짝펴 드리워진 장독대가 있었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루고 장독대를 닥아내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집이다.
집 뒤에는 500여평 정도의 왕대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기억이며 댓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새소리가 너무나 생생하여 그곳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의 아스라한 그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흐르는 풀포기 하나 개울속에 빛나는 돌맹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전봉건의 시 ‘뼈저린 꿈에서만’에서 처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리라면 그리고 말하라면 말할 수있는 고향에서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직경이 10∼15cm 정도 되는 우람한 대나무들은 아이들이 타고 노는데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놀이기구가 부족했던 그 당시에는 참으로 대단했다. 대여섯 살에서 부터 열두어 살 정도의 동네 아이들은 특히 여름철이 되면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왔다. 누가 가장 높이까지 올라가며 어느 정도 흔들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마음대로 소리지르며 한 바탕 뛰어놀고 나면 속이 후련하였다.
집 뒤켠의 넓은 왕대밭은 나는 물론 동네 아이들의 천혜의 놀이터였다. 대나무 숲엔 다양한 조류들이 들끓었다. 참새는 물론 뻐꾸기, 소쩍새, 까치, 제비, 굴뚝새, 황조롱이 등 많은 새들이 그들만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천국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참새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새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아침이면 잠이 덜깬 참새를 잡으려고 동네 아저씨들 서너 명이 그물을 가지고 우리집 대밭을 뒤지기 일쑤였는데 살그머니 그물을 들이대면 놀란 참새들이 푸드득 날아갈 때 몇 마리가 그물에 걸린다. 여러 번 하다 보면 수십 마리를 잡게 되는데 식량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참새구이는 고소한 단백질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들창문을 열고 신기한 듯 내다보던 나에게 항상 참새 두 마리를 주고 갔다. 한쪽 발에 실을 묶어 먹이도 주고 손가락에 얹혀 놓고 놀다가 날려보냈던 유년의 행복한 추억은 백발이 된 지금까지 생생하고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 나를 지탱해 주고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온 나라는 전쟁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흉흉한 소식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우리는 대밭 옆 한쪽 귀퉁이에 방공호를 팠고 가족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북한군의 비행기가 하늘을 날면서 여러곳에 폭격을 하게 되었고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방공호에는 할머니와 더불어 온 가족이 함께 은둔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는 다 살았다.” “괜찮타” 하시면서 담장밖에 있는 밭에서 단수수며 옥수수를 갖다주셨다.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을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주렁주렁 매달린 단감나무를 장대로 후려쳐 치마에 담아 나르셨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 “나는 괜 찮혀”하시면서 단감을 따내던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가히 필사적이었다.
먹을것이 절대 부족했던 그 시기에 단감은 끼니를 대신할 정도로 유용했다. 유난히도 살결이 하얗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은빛 머리칼이 너무도 선명하여 진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일곱 살 때다. 하루는 설을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을 따라 동네 아이들과 자치기를 하다 보니 출출해진 나머지 고방을 뒤진 일이다. 그때는 설을 쇠고 남은 명절 음식을 고방 시렁에 올려놓아 보관하고 있었는데 떡이며 전이며 한과 등 먹을 것이 많았다. 우리는 출입문을 따고 고방 안으로 들어갔고 지게를 갖다 놓고 그것을 타고 시렁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소쿠리 채 내리는건 어려워 음식들을 가지고 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다. 바가지가 거의 채워갈 무렵 지게를 잡고있던 아이들이 잠시 헛눈을 파는 사이 지게가 미끄러졌고 위에 올라가 음식을 담던 형은 소쿠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아뿔싸 여러 가지 전을 올려놓았던 소쿠리와 바가지에 담은 음식들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다행이 다친 곳은 없었지만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겁이 났지만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그 자리에 앉아 아이들과 함께 전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발견되었고 크게 혼줄이 날줄 알고 겁을 먹고 있던 우리에게 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면서푸짐한 음식 한 상을 차려주셨다. 그립고 아련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초가집 뒤켠을 드리웠던 무성한 왕대밭 숲 속에서 아람드리 큰 대나무를 타고 맨 꼭대기에 올라 기고만장해 하던 기억이며, 논두렁 밭두렁을 누비면서 메뚜기를 쫓던 일, 황소를 타다 모내기 논바닥에 내팽개쳐 허우적 거렸던 웃지못할 일들이며, 참게를 잡으려다 손가락을 물려 혼비백산 달아나던 천진난만 했던 그 시절의 그리움은 고향과 함께 아직까지 진한 향수로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인생의 마디마디 마다 고비를 넘길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나를 밀어 올렸다. 번쇄한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어느날 불현듯 코흘리게 시절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끼는 것은 고향의 아련한 추억들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
고향생각이 새록새록 나게합니다
개구리잡고 찔록꺽어먹던유년 시절이그리워집니다
감사 합니다
어릴적 추억은 섬광등 같습니다
아픔도
즐거움도......
당선을 축하드리며
님의 시심이 솟아난 고향풍경을
눈을 감고 그려봅니다.
이 밤
저도 고향의 산천이 그립습니다.
특히 맑은 또랑물이~~~
수정님, 비타민님!
축하 감사드리고요
쭈욱 행복하시길 바랄께요.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무엇보다 형님께서 정상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었음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어릴적 향수가 진하시기에 많을 글들을 쏟아 놓으신가 봅니다 거듭 축하드립니다
참 아려한 고향 추억에
머무러 쉬었다 갑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골수염에
수술이 성공한것은 집터가 명당이었나 봅니다
얼마나 부모님이 노심초사 하셨을까 짐작이 갑니다
추억이 한장의 그림같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