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메디 음악 작곡가 : Peter Schickele(1935~ 미국) 피터 쉭켈 교수는 미국의 작곡가·음악교육자·방송인이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독일)의 21째 자녀로 가공된 인물인 P.D.Q 바흐로 널리 알려졌으며, 1992~2007년에 미국의 ‘클래식음악교육 라디오방송’ < Schickele Mix>의 사회를 맡아왔고, 1991~1993년·1999년에 P.D.Q. 음악의 패러디 음반으르 그래미상(Grammyy Award)의 <Best Comedy Album>을 4차레나 수상했다. ▣ P. D. Q. Bach의 탄생 ▲ 자서전에서 1954년 어느 날 쉭켈 교수는 희귀한 보석 같은 음악을 찾으려고 바바리아인의 성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관리인의 퍼콜레이터 여과기에서 한 곡의 필사본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것이 P.D.Q. 바흐의 <커피(Sanka) 칸타타>임이 밝혀진다. 즉시 악보를 대략 검사해 봤더니 지독한 커피 냄새 때문에 버려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곡을 후플(Hoople)에 있는 사우던 노스 다코다대학(U. of Southern North Dakota)에서 공연하게 됬을 때, 그는 이 괴물을 너무 늦게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음반사나 출판사를 찾아보지 않고 지원이 시원찮은 사우던 노스 다코다대학을 택한 것이 후회되고 조바심이 나서 다시 뒤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언젠가 벽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를 이 음악 문화유산을 4 개를 얻게 되었다. 벽돌 한 장을 치우면 그 안에서 P.D.Q. 바흐의 악보 하나가 나오는데, 그 때마다 조금 전 것보다 더 깜짝 놀랄만한 악보였다.
쉭켈에 의하면.... P.D.Q. Bach (1807-1742)? 를 둘러 싼 200년 동안의 묻혀있던 침묵의 음모는 순전히 자기 부모(J.S.바흐 와 안나막달레나 빌케)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위대한 J. S. 바흐 가문의 20명+1명의 아이 중에서 막내로 그리고 덤으로 태어났고, 그래서 항상 외톨이였다. 웬 자녀가 20명씩이나? 그야, 바흐 둘째 부인의 이름이 막달레나 빌케니까 그렇지! (막 달라고 비니깨 ... 많이 낳을 수 밖에!) -- 쉭켈
아버지는 그를 철저히 무시했을 뿐 아니라 가족들과 후대에까지도 자기와 같이 처신할 것을 명했고, 그 결과로 그의 생전에는 그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곡을 많이 쓰면 쓸수록 더욱 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은둔하기로 작심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쉭켈 교수의 열정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그의 음악 작품들도 아마 자기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 Wikipedia 에서 P. D. Q. Bach는 음악 풍자가인 피터 쉭켈(Peter Schickele,1935~ )가 고안해낸 가상적인 작곡가이다. 시켈레는 40년간의 끊임없는 개그를 통해 바흐(Bach) 가문의 잊혀졌던 한 구성원(쉭켈 자신)의 작품을 공연한다. 그는 자기 음악을 뱅가드와 텔락(Telarc)의 상표로 녹음해 왔다. 그의 음악은 유명 음악가들의 작품을 풍자적으로 개작한 것인데,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와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름의 "P. D. Q."는 바흐 가문의 구성원들이 이름의 첫 자만을 따서 줄여서 표현한 것을패러디한 것으로, 바흐(J. S. Bach)의 둘째 아들은 C. P. E. Bach(Carl Philipp Emanuel Bach,1714~88)와 같은 맥락이다. ▣ P. D. Q. Bach의 생애 쉭켈가 만든 가상 작곡가의 전기에 있는 많은 “사실("facts")은 다음과 같다. P. D. Q. Bach는 1807년 5월 5일에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세마스찬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의 20명의 자녀들 중 21번 째로 태어났다.
아 버지 J. S. Bach(1685~1750년), 첫째 아들 빌헤름 프리데만(1710~84),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1714~88) 그리고 막내인 20번째 아들인 ‘런던 바흐(또는 영국 바흐)’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82년)인 점을 고려하고, 시켈레는 자기가 만들어낸 P. D, Q, 바흐(1807~1742)? 는 세상을 거꾸로 살았음을 고려하면 1742년에 태어났고, 20번째인 막내 런던 바흐보다 7년 후에 2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정은 그럴듯한 설정이라 하겠다. <kdc6419 삽입>
쉭켈에 의하면 그의 부모는 어린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지 않아서, 제발 이름 좀 빨리 지어 달라고 P. D. Q 로 정해 졌단다. 원래 아버지 J. S. 바흐가 아들에게 붙여주려 했던 세속적 이름은 카주(kazoo)였다. PDQ 는 영어의 은어인 “제기랄 빨리(Pretty Damn Quick)”의 두문자어(頭文字語)다. 카주(kazoo): 연주시에 "윙윙거리는 음색"을 가미하기 위한 도구로 막을 진동시켜 사람의 소리를 못 알아보게 하거나 동물의 소리를 흉내내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이 사용한다. 연주하기가 가장 어려운 악기로 알려져 있다.
쉭켈은 연주에 이것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
1755년에 그가 13살이 되자 그의 부모는 음악 연주용 톱을 고안해낸 루드비히 잔스토허(잔스토허:이쑤시개)의 도제로 들여보냈다. 1756년에 모차르트가 태어나자 P. D. Q. 바흐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를 만나 그의 아들에게 당구를 가르치라고 권했다. 그 후 그는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는 먼 친척인 L. S. D. 바흐를 방문하고, 그의 딸인 베티 슈에는 그의 아이를 낳는다.
그는 28살이 되어서야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부분이 다른 작곡가의 멜로디를 훔친 것들 이였다.
P. D. Q. 가 죽기 전에 베티슈에 에게 한 말은 “잠깐, 신사분들(Time, gentlemen)”이였다. 시간은 정확히 1742년 4월 1일(만우절날) 저녁 11시였고, 장소는 독일의 바덴-바덴-바덴(Baden-Baden-Baden)이었다.
(注 : 이 단어에 바덴 또는 바든이 1개 더 들어 있는데 ? 그 이유가 뭘지 생각해 보시라. 바든 바든 바든.. 뻐둥 뻐둥 뻐둥 ? !)
P. D. Q.. 바흐의 무덤에는 "1807–1742" 라 씌어있다. 그의 비석에는 조카 베티 슈에의 요청으로 서투른 캐처catcher)가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독일어> In the "original" German: Hier liegt ein Mann ganz ohnegleich; Im Leibe dick, an Sünden reich. Wir haben ihn in das Grab gesteckt, Weil es uns dünkt er sei verreckt.
<영어> Here lies a man with sundry flaws 잡다한 결점과 수없이 많은 죄를 And numerous Sins upon his head; 머리위에 인 채 여기 한 사나이가 누웠네. We buried him today because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As far as we can tell, he's dead. 그가 죽었기 때문에 묻었다는 것뿐.
● 베토벤이 귀가 먹은 이유 미리 협정해둔 한 강연에서 쉬켈은 베토벤이 귀가 멀게 된 데에는 P. D. Q. 바흐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폭로했다. 그 이유는 P. D. Q.가 오는 것을 볼 때마다 커피 찌꺼기를 자기 귀에 쑤셔 넣어 귀를 막아버리는 베토벤의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죽이나 시끄러웠으면 ?????)
▣ P.D.Q. 바흐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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