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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8일 주일 메시지
누가의 두 번째 하나님 나라 이야기 18
제목: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6:6~10
설교 목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을 생각해 보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고 반성할 점과 선배들의 신앙생활에서 계승 발전할 부분을 생각해 볼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보면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점검하고 더욱 깊이 있는 교제와 동행을 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역할
2.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
3. 성령의 계시와 나의 사명의 관계
4.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5. 성령의 교통
6. 예언의 그릇된 사용을 주의하라
7. 성령이 하는 일의 궁극적 목적
8.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
1.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역할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사역을 다룹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선교하러 가는 여정에서 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6:6~7
성령께서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로 애쓰는데 또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바울 일행이 북쪽 비두니아로 향해 가려고 애를 쓰는데 또한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초기교회에서 성령께서는 선교사역의 열정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안디옥교회가 선교사역을 시작할 때 성령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1~3
성령은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할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을 선정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뜻을 따라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교회는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성령의 개입과 역사를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총회가 그 본보기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28~29
이처럼 처음 교회는 성령과 늘 함께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선교를 시작하게 하셨고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는 꿈으로 알려주시고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에 분명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누가는 바울 사도의 선교 사역이 바로 그처럼 성령의 개입과 인도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과 같은 표현이며, 또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와 같은 말씀으로 나타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역사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을 ‘선교의 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은 신앙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일이 우리의 삶의 성패를 결정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활에도 개입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십니다. 신학자 한스 큉(Hans Kueng)은 성령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좨쳐대는 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79쪽).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 백성을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을 몹시 재촉하거나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것이 좨쳐댄다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어찌나 강하게 시키시는지요! 정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구요!” 그런 고백과 함께 뜨거운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힘에 지나는 헌금을 드리기도 하며, 이런 저런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헌신은 보통의 마음으로는 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년 전에 저도 처음으로 유튜브 설교를 시작할 때 얼마나 주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낯설기도 하지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성도들을 통해서 장비도 주시고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셨지만 제 마음이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금요일 밤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는데 마음 속에 강한 책망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목회가 장난이냐!” 그 한마디 말씀에 그만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심했습니다. 그 때 드린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좋습니다. 주님, 저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전파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오니 제가 어떤 평판을 받든지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제 마음을 좨쳐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용기를 내어 유튜브 영상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 성령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려고 역사하실 때 사람은 큰 감동을 받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런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격려하시고 책망하심으로 우리를 좨쳐대십니다.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계시와 나의 사명의 관계
성령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앞에 있는 일을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다가올 환난이나 어려움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변화산에서 환상 가운데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하시게 될 환난에 대해서 들으셨습니다. 그 환상 가운데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계시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실 수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 대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누가복음 9:30~31
사실 예수께서는 이 환상이 있기 전부터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실 것을 각오하셨습니다(눅 9:22). 그러므로 이 환상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 환상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진짜로 다가올 일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훗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길이 결국 자신들의 길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도 바울의 삶에도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마치려는 시점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성령의 감동 속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성령은 바울의 동역자들에게도 알려주셨습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10~14
이처럼 어떤 경우에 성령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계시하십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함께 그 고난의 짐을 지고 기도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분명히 알고 그 길을 달려가는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그 동역자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교회 안에 누가 위로가 필요한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 때 우리는 뜻밖에 위로를 받고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더욱 실감합니다.
4.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시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속이 상하셨습니다.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자기의 세상을 다스리라는 임무를 받은 인간이 모든 것을 잊고 자기 뜻대로 살면서 악을 행하고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6:3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살 때 하나님은 그를 떠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육신으로만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바른 길을 떠나 죄의 길과 멸망의 길로 빠져갑니다. 그 미래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받은 대표적인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왕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고 떠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사무엘상 16:1a)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사무엘상 16:14)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세상을 만드시고 신혼집처럼 에덴동산을 별도로 창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려고 그 영을 사람의 콧속에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려고 자기 집을 이스라엘의 진영 한 가운데 지으셨습니다. 그것이 성막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기를 원하심을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시려는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주님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그런 공동통치를 통해 세상은 생명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면 이 세상은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영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감동하시고 그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외면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엡 4:30). 그것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소원의 불을 지피실 때 그것을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교회에 권면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령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더욱 사모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기도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탄식은 사람의 마음이 괴로울 때 내는 신음 소리(헬. stenagmos, groaning)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교회를 향하여 책망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야고보서 4:4~5
성령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부르고 초대하는데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어 세속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성령은 우리 속에서 시기하면서 사모하십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과 눈길을 줄 때 그의 연인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 시기는 질투로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질투하는 것이지요. 계속 돌이키지 않으면 그 연인은 살이 빠지고 뼈가 마르게 됩니다. 그것이 시기(猜忌)하기까지(헬. pros phthonon, jealously<phtheiro, destroy < phthio, wither, shrivel) 사모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5. 성령의 교통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축복의 인사를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
이 세 가지는 성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늘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먼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헬. 카리스 charis)를 기억합시다. 그것은 용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헬. 아가페 agape)은 우리를 품어주시는 포용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교통(헬. 코이노니아 koinonia)은 우리와 사귀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은 성령과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사귐은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하고 대화하며 진심을 나누며 슬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사귀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성령과 더불어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사람들을 보면 성령 안에서 슬퍼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누가복음 10:17, 21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하여 보내는 축복의 인사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 무리와 함께 있기를 빌었는데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과 교제하며 사귀어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욱 민감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2:10).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힘을 느꼈습니다(행 16:6~7).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빌립보교회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도리어 위로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교통이 큰 기쁨을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바울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성령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새 힘을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부부 사이에 온전하고 충만한 교제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들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게 할 것입니다. 성령과의 교제가 회복되면 부부 사이가 회복되며, 부자관계가 회복되며, 나아가 이웃과의 교제도 회복될 것입니다. 이 모든 관계의 회복이 바로 성령과의 교제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참 인간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부부가 화목하고, 부모와 자녀가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관계를 떠난 구원이란 없습니다(Lesslie Newbigin,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6. 예언의 그릇된 사용을 주의하라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빙자하여 성도들을 겁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당신에게 특별히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겁주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영분별이 필요하겠습니다. 거짓 은사자들에게 사람이 속아 넘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올무에 걸린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잠 29:25). 말로 다른 사람을 호리는 사람들은 사람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과 평가에 얽매여 종이 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주님은 결코 우리를 협박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설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천천히 지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신령하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는 일을 잘 분별하여 배척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과 협박을 잘 분별하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벧후 3:18) 하겠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모르기에 앞으로 어떻게 잘못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그 걱정이 사람을 그릇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확신할수록 사람은 거짓 예언으로 호리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성령이 하는 일의 궁극적 목적
성령은 주가가 오를 것이라 거나 내릴 것이라는 식으로 점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복권이나 로또에 당첨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동산 계약이나 기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성령을 자기 편이 되어 달라고 설득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성경공부 시간에 김순금 집사님이 나눈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우리가 어떤 꾀를 써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전에 제가 사업을 할 때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성경공부를 하면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시고 ‘내 일’을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네 시간씩 신천지의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이제 돌이켜 보니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숙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급하고 중요해 보여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잘 모르면 무턱대고 조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할 때는 사기꾼의 말에 더 많이 속았습니다. 혹시 저렇게 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고서야 끝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빌 2:13).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기를 연습합시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내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예배를 드림으로 성령과 교제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8.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
끝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 중에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사도행전 16장을 간략하게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사역을 하면서 아시아 여러 지역을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제1차 선교사역 때 방문한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 일행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계속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 가운데 바울을 마게도니아로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은 바울을 일일이 코치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을 느낀 바울은 점점 북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자기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회당이 없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집인 기도처만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떤 여인들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감동을 받고 바울 일행을 자기의 집에 모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아시아에 있던 바울을 위하여 빌립보의 루디아를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길을 예비하시고 바울을 계속 서쪽으로 몰아 해변마을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바울에게 빌립보에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다고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빌립보에서 옥에 갇힐 것이라는 예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그 길을 계속 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성령이 왜 자신을 그리로 좨쳐대셨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기교회가 성령과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지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성령 과 더불어 교통할 때 우리는 성숙하여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일에 대한 소원을 품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를 기계나 노예처럼 부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친구처럼 이끄심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 부르심에 호응할 차례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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