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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傘壽에 떨구는 ‘참회’ 한 방울
- 만보 박태병의 인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만보 박태병의 네 번째 수필집 <만보의 산책> 권두언에는 그의 인간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어록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필자가 주목한 대목은 “내가 산수의 연수를 헤아리며 새삼 감격하는 것은 시절이 참 빠르고 문화와 문명의 발전이 눈부셔서 거기에 적응하며 얹히어 살기가 벅차다는 느낌이다. 그것으로 시니어가 되었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팔십 시니어의 바른 모습을 잘 갖추며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노추를 버려야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언제나 새롭다. 그만이 남아있는 세월을 싱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라는 부분이다. 특히 ‘바른 모습을 갖추어 살겠다는 다짐’과 ‘노추를 버려야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만보 인생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키워드가 될 것이란 판단이다. 앞으로의 생을 싱그럽게 해줄 미네르바로 설정되고 있는 ‘다짐’과 ‘약속’이 지켜지고 지속될 것으로 믿기 때문에 만보의 인생‘산책’에 거는 기대도 크다고 하겠다. 일상적 삶의 궤도와 의미를 재구성하는 삶의 자기 정체성 세우기 원리가 성찰성이다. 만보 수필의 성격이 반성적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이 지점은 매우 바람직한 인간세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Ⅱ. 만보의 삶과 문학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열망하듯이, 만보 수필가는 좋은 산수 기념 수필집을 내는 게 꿈이다. 그런 까닭으로 만보 박태병은 세 번째 수필집을 내고 다시 산수에 맞추어 네 번째 수필집을 내기 위해 인덕을 쌓으며 오늘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그에게는 인정과 베품이란 후덕한 인간미 말고도 인간의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세계를 더 낫게 바꾸겠다는 저항성도 있다. 노추를 벗고 참회의 길을 찾아나서는 그를 뒤따라 가보자. 문학은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만보의 수필은 삶의 희로애락을 체험에 실어서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인생론을 담고 있어 감동을 준다. <만보의 산책>은 한마디로 어떻게 사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는 자신의 깨달음과 다짐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수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게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써온 네 권의 수필집에 실린 수필은 참회를 지향하는 인간 만보의 절규요, 지혜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에는 다양한 삶의 빛깔이 담겨 있다. 사랑에 대한 애틋함과 종교적 기원이 있는가 하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손주들에게 남기는 뜨거운 애정과 살아온 날에 대한 사무치는 정한과 문명비판적 현실인식, 자연친화적 생태관 그리고 정치적 보수 성향도 노정되어 있고, 때로는 뜨거운 삶이 강물처럼 물결치기도 한다. 지역의 풍경과 인심을 노래하는 수필이 있는가 하면, 우국지심을 나타내는 수필도 있다. 현실에서 못다 푼 한을 절규하는 작품도 있다. 수필은 우주의 섭리나 세상의 모든 것, 산수나 자연 그리고 정서나 사고의 세계까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 속에 다 수용할 수 있는 장르다. 그러기에 만보는 통섭적인 인문학적 지식과 작가정신이 투영된 언어와 그 미적 구조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을 응축해서 형태화할 수 있는 장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만보는 우주와 인생을 수필 속에 응축할 수 있는 사람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제2의 창조자가 된다.
카러시E. Cassirer는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상징체계가 있어 이것이 인간문화의 진원지요, 사람다움의 본질적 체계라 했다. 사람은 물질적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신화, 예술, 종교 등으로 그물을 짠 상징적 우주에 산다. 따라서 사람은 상상적 정서의 한 가운데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상징체계는 수용체계와 운동체계가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물질적 세계에 사는 동시에 비물질적 세계에 산다. 현실과 비현실, 이성과 감성 등 현실의 양극적 모순을 통합하려 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 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물, 사람만의 능력, 그것이야말로 상징적 능력이요, 상징체계의 작용인 것이다. 언어가 있어서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상징의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만의 사람다움이 있고, 사회가 형성되며 언어가 발달되었다. 만보의 인간세계는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보며 ‘참회록’과 ‘인생론’을 쓴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를 다시 기억”하는 데서 상징성을 나타내며 출발선을 갖는 데 의의가 있다.
<만보의 산책>이란 제목은 톨스토이의 재현과 그가 쓴 참회록에 대한 만보의 통찰이 만들어낸 것이다. 상징의 능력이 만보의 문재요, 그것이 곧 문학적 재능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내적 심리와 본능적 감정, 사상과 경험, 현실적 상황과 미래적 기원, 개체와 공동체간의 공통감, 관습적 믿음과 창의적 비판의식이 함께 어우러진다. 이는 곧 문학이 삶의 표현 양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참회록이나 인생록은 현실 사회의 역사, 즉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만일 문학이 인생의 삶을 수신교과서처럼 가르치는 것이라면, 문학은 그토록 사회와의 관계에 고뇌하고 토니오 그레가와 같은 작중 인물이나 톨스토이와 같은 인물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은 사람도 있었고, 자연주의 문학사조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흐름 속에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도 있었고 필연성도 있었지만, 이런 주의는 한 시기의 목소리로써 아득한 역사의 흐름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좋은 작품만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시련에 견디어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만보 박태병의 제4 수필집 <만보의 산책>의 성격이나 박태병의 인간세계를 논할 가장 좋은 자료는 그의 작품 <톨스토이>를 들 수밖에 없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얼까. 인생에서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사유하게 하는 글이 그의 인생론이라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으며 행복의 달성은 사랑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합리적 인식에 따르는 자아의 활동이며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적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남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때 참된 사랑이 이뤄진다.”고 한 그가 평소 존경한 톨스토이의 인생론은 인간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만보는 <톨스토이> 발단부에서,“세월이 빠르다는 것은 나이 든 이들이 함께 느껴야 하는 과제인 것 같다. 젊던 시절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착각을 깨닫게 하는 세월은 몹시 밉지 않은가. 그것을 알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우리네 삶은 허무하고 모순투성이라는 철 늦은 고백을 하고 싶다. 유월이면 산수傘壽에 들게 되는 시니어의 참회는 이렇게 무량하여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는 모습처럼 처연하기 짝이 없다.”고 적고 있다. 성숙한 인격체를 위한 의지다. 문학의 최종 관심은 인생이고, 만보 박태병의 관심도 인생에 있다. 인생의 국면 국면을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슬퍼하면서 나아갈 것인가? 또는 어떻게 나아가면 좋을 것인가? 이 물음에서 한 걸은 나아가면, 인생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인생의 의미와 이유에 대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어두움은 왜 무엇 때문에 사는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어두움이다. 갑자기 우리의 발뿌리에 커다란 연못이 깊이 파여서, 아무도 이 연못 속에서 왜 사는가고 묻는 우리에게 대답해 주는 자는 없다.
만보는 <톨스토이>에서 “사랑은 참된 생명으로 넘치는 하나의 활동이다. 죽은 사람들의 생명은 결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만년에 깨달은 인생관, 세계관은 비통한 심정의 외침이었다. 참된 인간생활, 이성적인 삶의 방식,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종교란 무엇인가. 하나하나 마음속 깊이 성찰하여 ‘인생이란 무엇인가?’‘왜 인간은 고통스러워하는가?’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접근한, 영혼의 방황을 전하는 글,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인생론’이 늦게 철들어 보고 싶은 산수인傘壽人”인 자신을 울리며 감동을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좀더 생기 있게 산수를 맞아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만보의 심정과 각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실의 수용이 아니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누군가의 대답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혼자 대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 인생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다. 그러나 토스만의 말처럼, 문학은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밝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근대문학으로 넘어오면서 여전히 종교는 중대한 문제로 남아있다. 종교는 문학에서 사상성과 관계되어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가치 탐구, 신의 문제, 존재론의 추구, 선과 악의 대결, 양심과 정직의 문제 등은 종교적 영역에 드는 것으로 문학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러한 종교적 문제가 서구문학에서는 그들의 전통이라고 여겨져 왔다. 만보 수필에서는 기독교적 경향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만보는 종교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종교가 작품 속에 용해되어 형상화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진술이 다행스럽게도 문학성을 깎아 먹지는 않는다. 도스토엡스키나 릴케의 문학이 종교적이면서도 순수문학으로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교리의 옹호나 종교적 교훈을 내세우지 않고 인생의 진실을 그려 독자를 감동시켰다. 만보 문학도 두 거장과 마찬가지다. 이 지점은 만보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세계를 조명하게 된 까닭을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Ⅳ. 만보의 인간세계
1. 순수와 향기를 간직할 산수인
노르웨이 극작가인 입센은 예술가를 자기가 속한 사회나 조국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과의 유대도 단절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으로 정의했다. 은퇴한 장로로서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는 단독자나 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남과 나를 하나로 묶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그것은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박태병의 지향점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자기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낮은 생각으로 순수를 향하고 있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단단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순수하다 못해 인간적이다.
“이제는 백세시대라고 외친 지도 퍽 오래되었다. 그 시대에는 장수하였지만 82세밖에 못 산 톨스토이에 비하면 나는 해야 할 일과 남겨놓아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을 것 같다. 그것들을 잘 이루려면 지나온 여정을 살펴 참회와 나의 생의 올바른 정리가 앞서야 한다고 믿고 싶다. 내가 왜 톨스토이를 성찰하며 그의 흔적을 쫓아 방황하게 되는지 모른다. 이백여 년 전에 탄생하여 백여 년 전에 떠난 대문호의 역사 기록 앞에 더 겸손하여 여생이 즐겁기를 바라고 싶다. 환경과 전통, 역사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남루하여지게 마련이다. 톨스토이를 극복하며 보잘것없는 문필가로서의 소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가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참회의 전제는 통렬한 반성이다. 순수의 향기를 품고 있지 않으면, 결코 참회의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는 것이다.
2.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은 사람
수필은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일상에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발생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박태병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수필을 읽어나가면,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과거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가 달려온 역사 중에서도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은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에 묻어나는 저항적 삶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그는 격변하는 현대를 곰곰이 반추하고 미래를 응시하고 분석하려는 문명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 ‘종교가 고백하지 못하는 위선, 정치가 베풀지 못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지식과 학문이 풀지 못하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여유와 극복의 도전정신을 백지 위에 그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살던 집이 인민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사라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가슴 아팠던 유년 시절을 향수처럼 동경하고 있다는 것은 커피숍이나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이야기를 통해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간직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곱고 순결한 마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전후를 극복하며 살벌한 경쟁의 시대를 겪은 그에게는 몹쓸 전쟁이 지우지 못하는 상처로 남아있지만, 그는 면소재지 작은 학교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예쁜 소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며 살고 있다. 이런 낭만적 성향은 그를 작가로 성장하게 했다. 어른이 되어서 갖게 된 고매한 인품과 작가로서의 탁월한 글솜씨는 여러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박태병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라면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지성적인 마음과 저항적 자세라 하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수필화한 데에서는 인간의 향기와 그 촉촉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인간화 작업은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3.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 문학인
암울한 시대에서 영웅은 탄생하는 법이다. 그는 애국심이 충천한 열혈 청년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데모대와 합류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 주일간 구류를 살다 나온 전력이 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다. 박태병은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수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광장’이란 은유로 저항하려 했던 작가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그는 애국심이 불타는 젊은이였다.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는 청년이었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 수 있어도 사실상 훌륭한 수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박태병은 시공을 초월해 수필로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줄 사람이다. 수필가 박태병은 일찍이 들뢰즈의 문학론, ‘문학은 차이를 가치화하는 주변부 타자의 담론’적 의미를 추구하는 수필가로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용기와 슬기를 존경하며 살고 싶어했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열린 귀를 갖는 사람이 되어 편협하고 옹색한 삶을 풀어가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한다. 부지런한 작가로서 저력을 발휘하여 젊은 작가를 게을러 보이게 한, 그는 청년작가다.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는 아부꾼을 멀리하고 쓴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가난하게 사는 선비정신을 가지고, 의젓하게, 작가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4. 올곧은 길을 걸어온 지성인
박태병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개혁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작가의 인생관이 담겨 있는 글이 많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살아온 그는 신앙인으로서 구도자적 삶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박태병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며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각자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똘레랑스’를 통해 자기 성찰과 만족할 수 없는 종교의 어두운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지성이 번득이는 수필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극한 배려가 있는 수필도 많이 썼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길은 올곧은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 있어 반듯함을 외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생을 본질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삶은 허욕으로 가득 차서 언젠가는 전진할 기력마저 빠지고 말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자아를 버리는 일이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보는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바른 세계를 추구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천박해지는 세속에서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반듯함’이라는 작가의 주장이 서늘한 죽비로 다가선다. 고지식함에 애정을 주고자 하는 작가의 모습에 경건함이 묻어난다. 신앙인은 ‘비겁’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이런 올곧은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비겁’이란 말은 종교가 본연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만보를 깨어있게 만들었다. 그의 지성적 정서는 종교 또는 작가정신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순수와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이다.
Ⅲ. 로그아웃
본고에서 필자는 <톨스토이> 라는 수필을 바탕으로 또 수년 동안 문학적 동지로서 그를 지켜본 바 의미있는 관찰과 친밀한 접근을 통해 만보의 인간세계를 풀어내었다. 작가에게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삶터에서 인정을 베풀고 나눔의 실천을 통해 인간성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진실을 삶에 반영하여 스스로의 정화 수단으로 삼으며, 창출된 미적 가치로 승화시켜낸 것이 박태병 인간세계의 존재 가치를 증대하는 길이라 하겠다. 작가의 이러한 면모는 반듯한 그의 삶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참회에 대한 결의와 톨스토이를 극복하겠다는 다짐을 바탕으로, 그의 인간됨을 논하는 작업이 팔십여 년을 살아온 만보의 인간세계를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의 ‘참회하는 인생’이 담긴 <만보의 산책>이란 네 번째 수필집을 읽어나가는 데 그리고 수필의 밑바탕이 되었을 그의 인간세계를 이해하는 데 크게 일조하리라 믿는다. 한마디로 그의 인간세계는 건강하다. 이어령은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가’를 묻고, ‘눈물이다’고 답하였다. 팔십 줄에 선 사람이 흘리는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청량한 심전을 이루리라 본다. 후덕한 산수인이 되어 산책길에 나서는 만보 수필가의 전도에 건승만이 충만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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