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 :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인가? 아르헨티나 몰락의 단초인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이 노래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Evita)"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노래이다.
‘에비타’는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인 에바 페론(Eva Peron,1919 ~ 52)의 애칭이다.
빈민층의 딸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성녀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를 권력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로 아르헨티나 몰락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너무나 극적이게도 1952년 34살에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1. 사생아로 태어나 연예인으로, 영부인까지
1919년 에바 두아르테는 아르헨티나 시골에서 농장주와 그 농장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15살에 첫남자에게 떼를 써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출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쇼걸이며 삼류배우로 시작해 5년 만에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그런 그녀가 군사 쿠데타의 주역인 정치가이며 노동부장관이었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1895~ 1974)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두사람의 첫 만남은 1944년 아르헨티나 예능인의 지진피해자구원대회에서였다. 당시 그녀가 24세, 후안 페론이 48세 였다.
마침 부인을 잃고 독신이었던 그는 에바 페론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다.
에바 역시 그의 능력과 욕망을 알아채고 그를 절대자로 만들기로 결심하여 페론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페론에게 지배계층인 군부를 과감히 버리도록 한다. 그리고 가난하고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도록 부추겼다.
근데 페론에 반대하는 자들이 쿠테타로 정권을 획득한 후 정부전복 혐의로 후안 페론을 구금해버렸다. 그들은 페론의 야심과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때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고 남을 설득할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이 애인 후안 페론의 석방운동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진 것 없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나 같은 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페론”이라며 외쳤다.
급기야 그녀와 페론을 연호하며 민중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1945년 대중들의 압도적인 페론 지지에 정부에서도 두 손 들어 그를 석방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위정자가 되겠노라고 감격에 찬 연설을 하며 에바 두아르테를 힘껏 포옹했다.
그리고 다음날 에바 두아르테와 동거를 끝내고 결혼식을 올린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46년, 페론은 에비타의 호소력 있는 연설에 힘입어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2. 페론정부 개혁정치의 실체
(1) 외국자본 추방, 민중들을 위한 파격 복지정책
대통령이 된 페론은 대중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세우며 정권유지를 도모했다. 그의 뒤에는 에바 페론이 있었다.
눈엣가시였던 영국이나 유럽 등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시켰다.
여성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노동법 개정, 이혼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보장, 무료교육, 의료혜택 등 획기적인 정책을 쏟아냈다.
그 재원은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대지에서 생산한 육류와 곡물 수출로 비축해 둔 국고였다.
(2) 국가는 경제적 위기, 포퓰리즘, 부자의 반발
페론의 정책은 당시 남미의 5대부자였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에 빠뜨렸다.
비록 빈민가를 구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당장 국고를 풀고 외국 기업가와 자본을 몰아내고 무시하다 외려 무역의 역풍을 맞았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곡물과 육류의 수출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막 일어서려던 공업이 외려 수입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기업을 죄어서 에바 페론이 세운 페론복지재단에 헌금하도록 하였고 따르지 않으면 악덕기업으로 도산의 위기까지 몰아갔다.
또한 페론 정부는 그들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무참히 몰아내고 주위에는 믿을 수 있는 인척들로 포진시키기도 했다. 이로서 정치는 경직되었고 독재 속에 부정부폐가 만연했다.
결국 수많은 개혁의 대부분은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나라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또한 겉으로는 노동자와 여성 등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3. 에비타의 죽음, 시신은 정치적 이유로 떠돌다
그녀는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고 1년 후에 부통령 후보로까지 지명되나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1년 11월에 후안 페론이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 페론은 결국 건강 악화로 1952년 7월 26일 겨우 3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많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한 달간의 애도기간을 거쳐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히 치뤄졌다.
부인 사후 그간 이루어진 개혁의 파탄이 가시화되면서 1955년 9월 군부쿠데타로 후안페론은 정권을 잃고 해외로 망명했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에비타 신화의 불을 끄기 위해서 당시 방부 처리되어 있던 에바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몰래 빼돌렸다.
이후 에바의 시신은 1971년에 스페인에 망명중인 후안 페론측에 보냈다가 1975년 이사벨 데 페론(후안 페론의 세 번째 아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하지만 또 다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 에바의 유해는 대통령 궁에서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묘역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