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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2장 눈물로 채운 마음의 강 8. 제발 죽지 말고 버텨다오 1 계속 기도에 정진하던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한 이상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에 의한 것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다리를 놓아달라 하여 정주의 이름 난 기독교 집안의 딸인 최선길(崔先吉)과 선을 보았습니다. 선을 본 처자는 아주 대바른 집안에서 나고 자란 알뜰한 여자였습니다. 2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티끌만큼도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열여섯 살 때 감옥살이를 했을 정도로 주관이 뚜렷하고 신앙이 깊은 처자였습니다. 내가 스물네 번째 신랑감이었다고 하니 신랑감을 고르고 골랐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나는 서울로 돌아가서는 선을 봤던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3 일본유학을 마치면 나는 본래 중국과 러시아, 몽골의 국경도시인 중국의 하이라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만주전업에 취직해 3년쯤 살면서 소련말과 중국말, 몽고말을 배울 생각이었습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말을 가르치는 학교에 찾아갔던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세 나라의 국경 지역에 가서 외국어 몇 개를 배울 작정이었습니다. 4 그런데 당시 정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만주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아 취직하려던 회사에 사표를 내려고 만주전업 안동현 지점에 들렀다가 고향에 돌아와보니 중매를 섰던 이모가 난리를 쳤습니다. 선 본 처자가 나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고 버티고 있으니 큰 일이라며 나를 보자마자 처자의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5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결혼을 하더라도 적어도 7년 정도는 당신 혼자 살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왜 그래야 하는지요?" "나에게는 결혼생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소. 사실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오. 우리의 결혼은 가정을 넘어 민족과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오. 내 뜻이 이러한 데도 진심으로 나와 결혼하고 싶소?" 6 그러자 처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을 보고 난 뒤에 달빛 속에 꽃이 만발한 꿈을 꾸었으니 당신은 하늘이 내게 주신 배필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고 야무지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된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단히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처자는 "당신과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뭣이라도 다할 터이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며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7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기 일주일 전에 장인 될 어른이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그 바람에 잡아놓은 날짜보다 결혼식이 늦어져 1944년 5월 4일에 혼례를 올렸습니다. 5월이면 화창한 봄날이건만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예수교의 이호빈 목사가 주례를 섰습니다. 8 이호빈 목사는 광복 후에 월남하여 초교파적인 중앙신학원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신혼살림은 자취를 하던 흑석동에서 시작했습니다. "하이고,색시가 얼마나 예쁘면 저렇게 계란 다루듯 하누?" 하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말대로 나는 아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9 당시 나는 용산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회사의 경성지점에 취직을 해서 회사일과 교회일을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신혼집으로 느닷없이 일본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와세다대학 경제학부에 다니던 아무개를 아느냐?" 하고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를 경기도 경찰부로 끌고 갔습니다. 공산주의자로 잡혀간 친구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것이 이유였습니다. 10 경찰에 잡혀간 나는 다짜고짜 고문부터 당했습니다. "네 놈도 공산당 맞지? 일본유학 시절에 그 자식하고 같이 일했잖아?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봐도 소용없다. 일본 경시청에 물어보면 다 나오게 돼있어. 공연히 개죽음 당하지 말고 공산당 이름을 줄줄이 대란 말이다!" 일본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 이름을 대라며 책상다리 네 개가 다 부서지도록 맞았지만 나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11 그러자 일본 경찰은 흑석동 신혼집을 뒤져 내 일기장을 찾아왔습니다.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친구들의 이름을 찾아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라고 버텼습니다. 일본 경찰은 징을 박은 군화발로 내 몸을 사정없이 짓이긴 뒤 내가 죽은 듯이 축 늘어지면 천장에 매달고 흔들었습니다. 나는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그들이 막대기로 미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그러면 내 입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시멘트 바닥을 적셨습니다. 12 나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습니다. 찬물을 한 양동이 뒤집어 쓰고 정신이 들면 다시금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를 잡은 뒤 양은 주전자를 입 속에 넣은 채로 무한정 물을 먹인 뒤에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개구리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군화발로 짓이겼습니다. 13 식도를 타고 넘어온 물을 사정없이 토하고 나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날이면 식도가 타들어가듯이 아파 멀건 국물 한 모금도 못 넘기고 기운이 없어 맨바닥에 엎드러져 꼼짝도 못했습니다. 14 일본 유학시절부터 걸핏하면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고문을 견디는 나만의 방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간수가 내 번호를 부르면서 굳게 닫힌 철문을 여는 동안, 나는 미련한 짐승처럼 내 손등이며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냅니다. 15 그냥 슬쩍 무는 것이 아니라 살이 찢기고 피가 나도록 깨뭅니다. 그러면 하루종일 군화에 차이고 거꾸로 매달려도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고통에 못 이겨 온몸을 뻗대며 나뒹굴 때마다 손등에 난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와 내 생명을 지켜주었습니다. 16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초조해진 일본 경찰의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했지만 나는 끝끝내 친구들의 이름을 불지 않은 채 버텼습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그것만큼은 죽기살기로 지켰습니다. 고문을 하다 지친 일본경찰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17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나는 경찰관들에게 양 팔을 끼운 채 면회실까지 겨우 걸어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만나보기도 전에 이미 눈가가 짓물러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어미가 어떻게든 변호사를 댈 테니까. 그때까지만 제발 죽지 말고 버텨다오." 면회를 오신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아들 얼굴을 보며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뜻이 좋아도 네 목숨을 보전하는 게 먼저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하며 우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참으로 애달팠습니다. 18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 하며 같이 끌어안고 펑펑 울고 싶었습니다만 어머니를 면회시켜주는 일본경찰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죽지 말고 살아서 버텨달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찢어져 퉁퉁 부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19 경기도 경찰부에 잡혀있던 넉 달 동안 하숙집의 이기봉 아주머니가 옥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면회할 때마다 울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조금만 견디시면 이 시절이 곧 끝납니다. 얼마 못 가 일본은 곧 망할 테니 울지 마십시오" 하고 위로를 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 경찰서에서 풀려나오자마자 나는 하숙집에 쌓여있는 일기장을 싸들고 한강 모래밭으로 갔습니다. 20 그러곤 더 이상 친구들한테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그 많은 일기장을 다 태웠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내가 감옥에 잡혀갈 때마다 화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혈변을 보며 몸을 추스리지 못해 애를 먹는 나를 하숙집 아주머니 형제들이 정성껏 돌보아주었습니다. 21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기다리던 광복의 날이 왔습니다. 삼천리 반도가 '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힌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머잖아 한반도에 다가올 엄청난 재난을 예감하고는 너무나 심각해져 기쁜 마음으로 만세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불길한 예감대로 조국은 일본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곧 38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났습니다. 북한 땅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당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
平和を愛する世界人として 第二章 涙で満たした心の川 8. どうか死なずに耐え忍んでほしい ひたすら祈りに精進し続けるうちに、結婚する時が来たことを直感しました。神の道を行くと決めた以上、すべての歩みは神の支配下にあります。祈りを通して時を知れば従わ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そこで、仲人の経験豊富なある婦人に依頼して、定州の有名なキリスト教家庭の娘である崔先吉と見合いをしたのち、略式の婚約をしました。 彼女はとても由緒ある家庭で生まれ育った真心を尽くす女性でした。小学校しか出ていませんでしたが、ほんのわずかでも人の世話にはならないという性格で、神社参拝を拒否して十五歳で獄中生活をしたほど、信念のある信仰深い女性でした。私は二十四番目の新郎候補だったそうで、彼女は新郎を選びに選んだのです。しかしながら、ソウルに戻った私は、見合いをしたことさえ忘れてしまうほど切迫した心情にありました。 私はもともと、留学から戻ったら、中国、ソ連、モンゴルの国境都市である中国の海拉爾に行く計画でした。満州電業株式会社に就職して三年ほど生活しながら、中国語とロシア語、モンゴル語を学ぼうと考えていました。日本に打ち勝つために日本語を教える学校に通ったように、来るべき未来に備えようと、三国の国境地域に行って外国語をいくつか学ぶつもりでした。ところが、当時、情勢が尋常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どうしても満州に行ってはならないようで、就職予定を取り消しに満州電業安東支店(安東は鴨緑江の対岸にある現在の中国・丹東)に行きました。そこで手続きを終えた後、故郷の定州に戻ってみると、お見合いを準備してくれた婦人が大騒ぎを起こしていました。婚約した女性が私でなければ嫁に行かないと言い張って大変だと言うのです。私を見るやいなや女性の家に連れて行きました。 私は彼女に、これから私がどう生きていくかをはっきりと話しました。 「いま結婚しても、少なくとも七年ほどは、あなた一人で生きる覚悟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なぜ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か」 「私には結婚生活よりもっと重要なことがある。実際、結婚するのも神様の摂理を遂行するためだ。私たちの結婚は、家庭を超えて、民族と人類を愛することのできる位置ま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私の意志がこうであっても、心から私と結婚したいのか」 すると女性は、「好きなようにしていいです。あなたに会った後、月の光の中で花が満開になっている夢を見たので、あなたは問違いなく天が私に下さった連れ合いです。ですから、どのような困難があっても我慢できます」と、気丈な態度で答えました。それでもまだ不安だった私は、何度か彼女の固い誓いを確認し、そのたびに彼女は「あなたと結婚できさえすれば、どんな事情があっても尽くすので、何の心配もしないでください」と答えて、私を安心させました。 四月に結婚式を挙げる予定が、義父が急に亡くなったので、当初の日取りを延期して一九四四年五月四日に婚礼を行いました。五月は普通ならのどかな春の日ですが、その日は土砂降りの雨でした。イエス教の李浩彬牧師が主礼を務めてくれました。李浩彬牧師は光復(日本の敗戦で植民統治から解放されたこと。一九四五年八月十五日を指す)後、南に下って超教派的な中央神学院を設立した人です。 自炊していたソウルの黒石洞で新婚生活を始めました。「まあ、まるで卵を扱っているみたいで、どれだけ美しいお嫁さんなのかしら」と言った下宿屋のおばさんの言葉どおり、私は妻を心から大事にし、愛しました。 当時の私は、龍山にある土木会社の鹿島組京城営業所に就職して、会社の仕事と教会の仕事を一緒にし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年の十月、新婚の家に突然日本の警察がやって来て、「早稲田大学の経済学部に通っていた誰それを知っているか」と尋ねるなり、答えも待たずに私を京畿道警察部に連行しました。共産主義者として引っ張られていった友人の口から、私の名前が出たことが理由でした。 警察に連行された私は、いきなり拷問を受けました。 「おまえも共産党だろう?内地に留学して、そいつと同じ仕事をしただろう?おまえがいくら違うと意地を張っても無駄だ。警視庁に照会すれば分かるようになっている。こんな所で犬死にしないように、共産党の奴らの名前を全部吐くことだな」 日本で同じ活動をしていた友人の名前を吐けと言って、机の脚に使う角材が四本とも壊れるほど殴られましたが、私は最後まで話しませんでした。 すると、次に警察は、黒石洞の新婚の家を家捜しして日記帳を押収しました。彼らは日記帳を一枚一枚めくっていって、友人の名前を突き止めようとしましたが、私は死を覚悟して知らないと突っぱねました。 戦争は終わりの時が近づき、焦りの色を濃くした日本の警察の拷問は、とても言葉で言い表せないほど残酷でした。彼らは鋲を打った軍靴で私の体を容赦なく踏みつけ、私が死んだようにぐったりすると、天井に吊して揺らしました。精肉店の肉塊と化した私の体は、彼らが押す棒に任せてあちこち揺れ動き、口からは鮮血がほとばしってセメントの床を濡らしました。何度も気を失い、そのたびにバケツ一杯の冷水をかけられ、意識が戻ればまた拷問です。鼻をつまんで、洋銀製のやかんを口の中に突っ込み、大量の水を無理やり飲ませる拷問もありました。床に倒れた後、カエルのように膨れ上がったおなかを軍靴で踏みつけます。食道を通って上がってきた水を吐き出すと、目の前が真っ暗になって何も見えませんでした。そんな拷問を受けた日は、食道が燃えるように痛み、水っぽい汁でさえ一口も喉を通らず、剥き出しの床に力なく俯になって、ぴくりとも動けませんでした。 私はついに友人の名を口にせず、拷問を耐え抜きました。意識が朦朧となる中でも、それだけは死に物狂いで守り通しました。ところが、業を煮やした警察は、故郷の母親を呼ぶ作戦に出たのです。足が伸びきって思うように立つこともできなかった私は、複数の警官に両腕を挟まれて、面会室まで辛うじて歩いて行きました。母は私に会う前から、もう目の周りが涙でただれていました。血まみれになった息子の顔を見て、「少しだけ我慢しなさい。自分が何としてでも弁護士をつけてあげるから。その時までどうか死なずに耐え忍んでほしい」 と必死に訴える母でした。しかし、「いくら志が良くても、おまえの命を守るほうが先だ。絶対に死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て泣いている母を眺める私の心は、つらく切ないものでした。心の中では、「お母さん1」と言って共に抱き合い、こんこんと泣きたい気持ちでした。けれども、母親に面会させる警察の意図をよく知る私としては、そうはできなかったのです。母の言葉に私ができる返事と言えば、裂けてぶくぶくと膨れた目をしきりに瞬きさせることだけでした。 京畿道警察部に拘束された四カ月間、下宿屋の李奇鳳おばさんとその姉妹たちが交代で差し入れをしてくれました。おばさんは面会するたびに泣くので、私は「少しだけ我慢すれば、この時代は間もなく終わります。遠からず日本は滅びますから、泣かないでください」とおばさんを慰めました。それは自分の言葉ではなく、神様が私に下さった信仰でした。 翌一九四五年二月、警察から解放されて出て来るとすぐ、私は下宿の日記帳をひとまとめにして、漢江の川辺に行きました。そして、もうこれ以上友人に被害が及ばないように、そのたくさんの日記帳をことごとく焼き捨てました。そのまま残しておけば、私が監獄に入るたびに禍根になるかもしれないものでした。 拷問でぼろぼろになった体はなかなか回復しませんでした。長い間血便が出て、体を動かせずに難儀する私を、下宿屋のおばさんの姉妹たちが真心を込めて世話してくれました。 ついに一九四五年八月十五日、待ちに待った光復の日が来ました。三千里半島 (朝鮮半島の南北の長さを三千朝鮮里とした伝統的表現) が「万歳!」の声と太極旗の渦に覆われた感激の日でした。しかし私は、遠からず朝鮮半島に訪れるであろう驚くべき災難を予感して、とても深刻になり、喜んで万歳を叫ぶ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独り小さな部屋に閉じこもって、祈りに熱中しました。不吉な予感どおり、祖国は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ましたが、すぐに三八度線で国が二つに分かれました。北朝鮮の地に、神の存在を否定する共産党が足を踏み入れたのです。 |
As a peace-loving global citizen CHAPTER TWO - A River of Heart Flows with Tears 8. Please Don’t Die I continued to devote myself to prayer, and I came to feel intuitively that the time had come for me to marry. Because I had decided to follow God’s path, everything about my life had to be done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Once I came to know something through prayer, I had no choice but to follow. So I went to one of my aunts who had much experience in arranging marriages and asked her to introduce me to a suitable wife. This is how I met Seon Gil Choi, the daughter of a prominent Christian family in Jung-ju. She was a well-raised woman from an upright family. She had attended only elementary school, but she had a character that disliked having to cause even the slightest trouble to others. Her character was so strong and her Christian faith so deep that she had been imprisoned at age sixteen for refusing to comply with a Japanese colonial requirement that all Koreans worship at Shinto shrines. I was told that I was the twenty-fourth man to be considered as her groom, so it seems she was very selective about whom she would marry. Once I returned to Seoul, however, I completely forgot I had even met the woman. My plan after completing my studies in Japan had been to travel to Hailar, China, a city on the border between China, Russia, and Mongolia. My school in Tokyo had arranged a job for me with the Manchuria Electric Company, and my plan was to work in Hailar for about three years while learning Russian, Chinese, and Mongolian. Just as I had earlier sought out a school that would teach me Japanese so that I could win over the Japanese, I wanted to go to this border city and learn a number of foreign languages as a way of preparing myself for the future. It was becoming increasingly clear, however, that Japan was heading for defeat in the war. I decided that it would be better for me not to go to Manchuria. So I stopped by a branch o-ce of the Manchuria Electric Company in Andung (present-day Dandong) and submitted paperwork to cancel my job placement. I then headed for my hometown. When I arrived, I found that the aunt whom I had asked to arrange my marriage was in great distress. Apparently, the woman I had met was refusing to consider anyone other than me as her partner and was causing great trouble for her family. My aunt took me by the arm and led me to the Choi family home. I explained to Seon Gil Choi clearly about the kind of life I intended to lead. “Even if we marry now, you should be prepared to live without me for at least seven years,” I told her. “Why should I do that?” she responded. I told her, “I have a task that is more important than family life. In fact, my reason for getting married has to do with my ability to carry out God’s providence. Our marriage needs to develop beyond the family to the point where we can love the nation and all humanity. Now that you know that this is my intention, do you truly want to marry me?” She responded with a firm voice: “It doesn’t matter to me. After I met you, I dreamed of a field of flowers in the moonlight. I am certain that you are my spouse sent from Heaven. I can endure any diffculty.” I was still concerned, and I pressed her several times. Each time she sought to set my mind at ease, saying, “I am willing to do anything, as long as I am able to marry you. Don’t worry about anything.” My future father-in-law passed away a week before our scheduled wedding date, so our wedding was delayed. We were finally able to hold our ceremony on May 4, 1944. Normally May is a time for beautiful spring days, but on our wedding day it rained heavily. Rev. Ho Bin Lee of the Jesus Church offciated. Later,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Reverend Lee would go to South Korea and establish an ecumenical seminary called the Jung-ang Seminary. My wife and I began our married life in my boarding room in Heuksok Dong. I truly loved her and took such good care of her that the mistress of the boarding house would say, “Oh my, you must really love her, since you treat her as if you were handling an egg.” I got a job at the Kyongsong branch of the Kashima Gumi Construction Company in Yongsan in order to support our family while I also carried out church work. Then, one day in October, the Japanese police suddenly stormed into our home. “Do you know so-and-so of Waseda University?” they demanded. Without even giving me a chance to reply, they pulled me out of the house and took me to the Kyounggi Province Police Station. I was being detained because one of my friends had been arrested for being a communist and had mentioned my name to his interrogators. Once inside the police station, I was immediately subjected to torture. “You’re a member of the Communist Party, aren’t you? Weren’t you working with that rascal while you were studying in Japan? Don’t even bother trying to deny it. All we have to do is put in a call to Tokyo Police Headquarters and they will tell us everything. You can give us the list of party members or die like a dog.” They beat me with a table and broke all four of its legs against my body, but I refused to give them the names of the people who had worked with me in Japan. The Japanese police then went to where I was living with my wife, turned it upside down, and discovered my diaries. They brought the diaries to me and went through them page by page, demanding I tell them about the names they found. I denied everything, even though I knew they might kill me for my silence. The police stomped on me mercilessly with their spiked military boots until my body was as limp as if I were dead. Then they hung me from the ceiling and swung me back and forth. Like a slab of meat hanging in a butcher shop, I swung this way and that as they pushed me with a stick. Soon, blood filled my mouth and began dripping onto the cement floor below me. Each time I lost consciousness they would pour a bucket of water over me. When I regained consciousness the torture would begin again. They held my nose and stuck the spout of a teakettle into my mouth, forcing me to swallow water. When my stomach became bloated with water they laid me face up on the floor, looking like a frog, and began stomping on my abdomen with their military boots. The water would be forced up my esophagus and I would vomit until everything turned black. On the days after I had been tortured this way my esophagus felt as though it was on fire. The pain was so great I could not bear to swallow a single mouthful of soup. I had no energy and would just lie face down on the floor, completely unable to move. The war was coming to an end, and the Japanese police were desperate. They tortured me in ways words cannot describe. I endured, though, and never gave them the names of any of my friends. Even as I was going in and out of consciousness, I made sure not to give them what they wanted. Finally tiring of torturing me, the Japanese police sent for my mother. When she arrived my legs were so swollen that I couldn’t stand on my own. Two policemen had to put my arms over their shoulders and help me walk to the visiting room. My mother had tears in her eyes even before she set eyes on me. “Endure just a little longer,” she said. “Mother will somehow get you a lawyer. Please endure, and don’t die before then.” My mother saw how my face was covered with blood, and she pleaded with me. “It doesn’t matter how much good you are trying to do,” she said. “It’s more important that you keep yourself alive. No matter what happens, don’t die.” I felt sorry for her. I would have liked to call out, “Mother,” embrace her, and cry out loud with her. I couldn’t do that, though, because I knew perfectly well why the Japanese police had brought her there. My mother kept pleading with me not to die, but all I could do in return was blink my badly swollen and bloodied eyes. During the time I was held in the Kyounggi Province Police Station, it was Mrs. Gi Bong Lee, the mistress of the boarding house, who kept me supplied with food and clothing. She wept every time she visited me. I would comfort her, saying, “Endure a little longer. This era is coming to an end. Japan will be defeated soon. You don’t need to cry.” These were not empty words. God had given me this belief. As soon as the police released me in February of the following year, I took all my diaries that had been stacked in the boarding house to the bank of the Han River. There I burned them so they would not cause any further trouble to my friends. If I had not done this, I knew the diaries could eventually be used by the police to harm others. My body did not recover easily from the torture. I had blood in my feces for quite a while. Mrs. Lee, the boarding house mistress, and her sister helped me to nurse my body back to health with great sincerity and dedication. Finally, on August 15, 1945,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is was the day every Korean had been waiting for. It was a day of tremendous emotion. Shouts of “Mansei!” and people waving the Taeguk flag covered the entire peninsula. I could not join in the festivities, however. My heart was deadly serious because I could foresee the terrible calamity that was about to befall the Korean peninsula. I went alone into a small anteroom and immersed myself in prayer. Soon after that, my fears were realized. Although liberated from Japanese rule, our homeland was cut in two at the 38th parallel. In the North, a communist regime that denied the existence of God came to pow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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