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송언수
#발굴
얼마 전 가야시대 고분을 발굴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 걸쳐있는 가야는 그동안 고성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통영에도? 싶었으나,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통영과 고성, 딱 그 경계선상에 있었다. 고분군을 이루는 가장자리 한 기가 통영 행정구역 안으로 들어와 있었던 거다.
예전 도굴꾼이 물건을 꺼내 팔러 다녔기에, 아는 사람은 거기 어디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둥근 고분 동서남북을 파고 들어가서 그나마 남아 있던 토기나 유물을 파내고 조사를 마친 시기에 거길 찾아갔었다. 발굴이 끝나 보존을 위해 다시 흙으로 덮을 거라고 했다.
#영화 ‘더 디그’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고고학 하는 집안이었던 이디스는 유적이 있을 것 같은 지역을 샀다. 삽을 들 수 있는 나이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땅을 팠던 브라운을 고용해 발굴을 시작한다. 처음엔 박물관에서조차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학력은 없고 현장에서 뼈가 굵은 그를 소개해 줬을 것이다.
정작 그가 6세기 앵글로색슨 족의 배를 발굴하자, 대영박물관에서 고고학자를 보내 그동안 발굴 작업을 한 그를 배제하고 현장을 장악한다. 여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냅네’하는 고고학자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흔하다. 브라운은 마음이 상해 현장을 떠나지만, 그를 고용한 이디스와 그 아들 로버트의 권유로 다시 현장에 합류한다.
발굴현장에서 당시의 화려한 유물이 나오자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영국 전체가 떠들썩해진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공유할 수 있도록 대영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
책상에 앉아 이론만 공부하며 박사가 된 필립스 같은 사람은 늘 앞에 서 있다. 현장에서 발로 뛰며 누구보다 뛰어난 기술을 체득한 브라운 같은 사람은 그들 뒤에 서 있다. 역사의 현장에는 브라운 같은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필립스가 손 떼라고 하자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와 서운함을 토로하던 표정은 이미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다. 이디스는 끝까지 브라운의 공로를 사람들에게 알린다. 브라운을 챙겨주는 이디스 같은 주변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현재 유물엔 브라운과 이디스의 이름이 같이 쓰여있다 한다. 그건 그녀가 끝까지 브라운을 챙겼던 덕이다.
명량해전, 그 치열한 전투가 가능했던 것은 배 밑창에서 손이 터지도록 노를 저었던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영화 말미에, 우리를 기억해줄란가? 란 대사에 가슴이 먹먹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읊조리던 때도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올라온다. 그들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나는 그걸 기억하고자 한다.
#번외, 위로
아픈 엄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그녀의 아들이 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를 내가 돌봐야 하는데 나는 실패했다고 우는 로버트에게 브라운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실패한단다, 매일.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 있거든.” 그 말에 로버트는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해요"라고 대답한다. 절망하는 아이를 위한 어른의 위로다.
로버트는 발굴현장인 6세기 유적인 배위에 이불을 깔고 엄마와 둘이 눕는다.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왕비는 왕을 만나기 위해 이 배를 타고 우주로 항해를 떠나요. 우주의 시간은 이곳보다 빨라요. 왕과 왕비의 아들은 우주비행사가 되어 왕비를 만나러 가지요." 뭐 이런 말을 속삭인다.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엄마를 위한 아들의 위로다. 위로는 이렇게 하는 거다.
무조건 네가 옳다가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고 공감해주는 것,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위로이다. 비록 당신이 떠나더라도 나는 무너지지 않고 잘 살겠다는 것, 그게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는 엄마를 위한 위로이다. 그 또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