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는 가시가 많네
이끄미(이끎이)는 가시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세상은 지배자와 지배자의 관계가 깨지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해오던 이스라엘마저도 눈에 보이는 왕(rex)을 원했을까요? 무한자가 인간과 세계를 다스린다는 통념을 깨버리고 자신의 대표자를 내세워서 제발 다스려달라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의탁해야 할 사람들이 내게 힘이 될 것 같고 보호를 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권을 넘겨주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왕을 나타내는 라틴어 rex의 원래 어근은 rego입니다. 이 말은 ‘인도하다’, ‘이끌어주다’라는 뜻 이외에 ‘풀어주다’, ‘바로잡아 주다’와 같은 의미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왕은 이끌기도 하지만 풀어주고 고쳐준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봅니다. 세상은 늘 아름다운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를 잔뜩 바깥으로 세우고 서로 찌르고 찔리는 구조가 존재합니다. 이해인 수녀는〈장미의 기도〉에서 “피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태양과 바람/ 흙과 빗줄기에/ 고마운 새롭히며/ 피어나게 하소서”(이해인, “장미의 기도”, 가톨릭출판사, 1987, 76-77)라고 말합니다.
땅은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사는 공간입니다. 생명들이 존재하는 곳은 늘 평온하지만은 않습니다. 가시를 세우는 일이 참 많습니다. 땅 위에 이끄미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이끄미는 자신의 가시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이끄미는 가시를 없애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이 땅을 가시덤불이 있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단순히 꽃밭길이나 평탄한 대로가 아닌 게 삶입니다. 그 속에서 평화의 맨 몸으로 돋친 가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정한 이끄미입니다. 다스리고 군림하는 사람이 이끄미가 아닙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삶은 장미의 가시미학의 역설입니다. 가시와 함께 붉게 피어나는 장미꽃은 가시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붉은 이파리로 가시를 무화시키는 게 장미의 주어진 본능입니다. 자신이 이끄미라고 하면서 가시 돋친 말과 날카로운 미소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생명과 추한 것들조차도 하나의 하늘 아래에서 빛과 바람과 흙과 물이라는 공통적인 고마움 속에 존재합니다. 삶의 감사는 가시이건 아니건 모든 존재자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가시는 없어야 할 삶의 장애이고 상처입니다. 그것이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래도 가시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하는 가시를 그냥 인정하려면 같이 뒹굴며 가시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시는 이내 타자에 의해서 없어지고 피흘림 속에서 서로 가시 없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스스로 뒹굴어 가시를 다 받아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가시는 이끄미의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이끎(dux: duco)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게 하고 그들의 가시를 빼내줌으로써 비로소 이끌고 뽑아서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그 가시는 모두의 것이 됩니다.
가시를 지닌 채 세상 바깥으로 피어나오는 것은 삶의 부담입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그것이 갖고 있는 그 아름다움에 심취되면서 가시를 미처 보지 못하니 상처나 실망이 생깁니다. 이끄미는 가시와 같은 삶을 중재하고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이끄미가 가시를 자신의 몸에 갖겠다는 자발성은 이끄미의 자질입니다. 하지만 모든 삶의 가시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이끄미의 그것이 숙명입니다. 이끄미는 그래서 고통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 이끄미(이끎이)입니다!
이끄미는 자신과 자신을 믿는 사람들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도 한몸(caro)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몸, 멀리서 오는 지금”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 것도 모든 사람은 몸으로서 만나고 “타자란 하나의 몸”(Jean-Luc Nancy, 김예령 옮김,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문학과지성사, 2012, 33)이기 때문입니다. 이끄미는 단지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과 몸으로 알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이해인 수녀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시〈장미의 기도〉4-7연까지 풀어놓은 문자의 향연은 이렇습니다. “내 뽀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이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한 기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당신 한 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진정/ 살아 있는 동안은/ 피흘리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이해인, “장미의 기도”, 가톨릭출판사, 1987, 77-78) 평범한 사람들과 이끄미 사이에는 수많은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나 고뇌를 달고 사는 게 인간이고 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더 많은 아픔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이끄미가 알아차릴 수 있는 매개는 자신과 타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코르푸스(corpus), 곧 몸입니다.
이끄미의 몸과 타자의 몸은 다르지 않습니다. 부자의 몸과 빈자의 몸이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몸입니다. 이끄미는 가시와 아픔과 고뇌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정치요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표자(representative)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신이 계속 현존하고 있음(re-present)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끄미의 몸은 자신을 위한 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몸이요 빈자의 몸이요 약자의 몸입니다. 그 몸 안팎에 신이 반복적으로 현존하고 있음을 자신의 몸을 통해서 알게 해주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대표성이 신의 현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끄미의 몸이 평범한 사람들과 동일시되려면(caro tua sumus), 평범한 사람들이 처한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끄미와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sumus)하는 곳(혹은 공통의 이유)에는 하나님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erat cum eo).
이끄미가 사람들의 대표자가 되는 이유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끄미를 존재하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있다’(1인칭 복수 sumus; sum의 3인칭 단수 미완료 직설법 erat)는 우선순위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있음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가시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고통스러운 가시에 의미를 부여해준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힘들면 이끄미를 통해서 서로의 가시를 빼주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부둥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도로테 죌레 부부 신학자는 부활이란 엠마오 발현사화를 통해서 익명의 존재들과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협력하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서로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예수가 겪은 고통스러운 가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끄는 사람이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산다, 혹은 내가 있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이끄미의 막중한 책무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끄미 자신에게 현존자로서의 실체(ousia; praesentatio)가 법칙(Gesetz)이 되고 그 존재를 현전시키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끄미는 그 하나님의 법칙 옆에 자신을 두고(setzen) 일하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1사무 5,1-5‧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