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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변 도운 121(1991).3.7>
*6.25를 맞이하면서 서울서 한강다리 끊은 뒤에 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내 동생이 전농동에 서울 시립대학이 처음 생길 때여. 동생과 처남이 입학을 할때여 입학해서 등록금까지 다 냈을 때여. 그러구 나는 뭐 상제님 사업하러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니께. 그 때 마침 서울에 있었구. 그래서 같이 말여.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 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 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 내가 더불고서.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서 말여. 나는 우리 어머니가 위암 때문에 말여, 참 양방에 무슨 방법이 없나 해서 그렁저렁해서 서울을 갔을 때다 이 말여. 상제님 사업도 사업이고. 그러니께 나는 어디로 갈 수가 없쟎어, 집으로 가야지 말여. 자식 된 도리에 어머니가 말이여 중병에 처했는디.
집에 들어오면서 내 아우, 처남, 장상달이 이정립 처남, 그렇게 떡 더불고 집에를 와서 보니께 그 숱한 얘기 다 못하지만 저 당진에서 이이영이 말여 저 지식 많다는 사람. 아니 이이영이가 무슨 지방에서 무얼 어떻게 잘못했간디 내 집으로 피난오고. 또 인천 경찰서 그 사찰계 말여 형사 하나가 김 상록이라고, 월미도 갔다가 보도연맹 200여명인가 300명 말여 총살시키고서, 가만히 내가 이 평생에 와서 친구 새긴 중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고 덕 있고 피난할 데가 어딘가 생각해 보니 나밖에 없더라네. 내 집에 왔어, 처자를 더불고서. 나밖에 없더라 이 말여. 그래서 피난민이 우글우글해.
그런디 이제 달포 후에 암투병중인 내 선비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초상상제로서 장례모시고. 그런데 장례 모시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병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 사는 동네 이름이 지사여. 지초 지(芝)자 모래 사(沙)자 지산(芝沙)디 그 지사 고개에서 너를 잡는다고.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김 상록이를 잡는다고, 형사를 집에 두었다고 말여. 그랬다고 사람들이 잔뜩 넘어온다 말여. 그런 꿈을 꾸었다고 내 선비께서 그려. 내 선비께서 영이 얼마나 밝았든지 이렇게 천서를 받아쓰고 그랬어, 천서. 공부해서 그렇게 주문 읽어서 그렇게 영이 밝으셨던 양반이고 그랬어.
그러자 조금 있으니께 어떤 기별이 오느냐 하면. 저 안 아무개 집에 경찰가족을 두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 올라고 한다고 말여. 곧 넘어온다 말여. 빨리 조치하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서 사분지 지여차 한디. 여기 있어서 나하고 같이 당하고 싶으면 여기 있고, 한 발짝이라도 가다가 죽구 싶으면 가구. 그건 자의에 맡기니께. 물론 내가 살고 싶으면 김 상록이를 내가 잡아서 주면 내가 산다. 허지만 나 살기 위해 가지구서 살겄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사람잡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후문제고 하니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봐라.
사태가 이러니 허면 내가 떠나면 안 형이 말여 대신 내 죄를 당하는디 그래도 괜챦으냐. 아, 그건 다음 문제 아니냐. 나야, 그건 그시 그시 말여 적절한대로 해야 될 거 아니냐. 허니께 가고 싶으면 가고, 여기 있고 싶으면 있고, 내가 구태여 내쫓든 않겄다. 허니께 자의에 맡기겄다. 그 소리가 떨어지니께, 신발도 안 신고 도망 가.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고 하니께, 신발 신고. 그리고 가다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안 사람 보고서 쌀도 좀 퍼다 주고 말여, 숨도 좀 돌려 가지고 하라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보냈어. 보냈는디. 그 뒤에 그 사람은 잘 살고. 이제 인천 수복 뒤에 경찰노릇도 하고 그랬는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 뭐 세상은 그런 거 아녀. 그런디 이제 그런 때 사람을 봐. 내 선친께서 그러면 네가 당하지 않냐. 당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살기 위해서 말여 그 사람 잡아주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뉴. 그러니께 내 선친께서 참말로, 참 난감하신 표정을 내 머릿속서 눈 속에서 떠오르고 그러는디.
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
6.25 동란 과 더불어 그 와중에도 내가 집에서 의통을 준비했어, 의통을 나름대로. 그래서 그 당진의 이 이영이라고 하는 사람보고 다만 한 장이라도 좀 찍어라. 의통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딴 사람은 경제력이 없어서도 못혀. 하고 싶어도 암만 하고 싶어도. 아니 경면 값이 얼마구 말여 그걸 하는 재주가 있나. 그건 막대한 돈을 가져야 하는디 그걸 뭇하쟎어, 내가 그걸 집에서. 그러니 죽냐 사냐 하구, 쌕쌕이가 비행기가 다니면서 다다다다 하고 말여. 그냥 그 판에 거기앉아서 의통 준비할 사람 있나? 하여튼 상제님 사업에 내가 머리가 간 사람여.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돌았지 말여. 거기 앉아서, 그 판에 앉아서. 그렇게 해가면서 내가 의통준비를 하고 있어.
헌디 그게 다 소문도 다 퍼지고, 신도들끼리도 저기 안 선생님은 집에 읹아서도 말여. 6.25때도 의통을 준비했다고 세상에 다 퍼지고 그럴 거 아녀. 그때 1.4후퇴 때가 언제여, 1.4 후퇴 때 눈 많이 오고 말여. 저 김 윤근 방위군 사령관이라고 해서 대구에서 식량 다 빼먹고 말여 다 굶겨죽이고 할 때 말여. 1.4 후퇴 때 다 나가라 하는디 말여 나혼자 만 있을 수 없쟎어. 그래서 내 막내아우만 더불고서 이렇게 하구서 지금 애들은 다 큰애도 그렇고 작은애도 그렇고 다 쪼끔 쪼끔한 애들여. 허니께 그건 뭐 다 더불고 갈 수도 없고 지 어미하구 그냥 집에다 두는 수밖에 없쟎어. 집도 지켜야 허구. 또 우리아버지도 기시고.
그러구서 세상 사람이 다 이불 봇짐을 걸머졌지. 한데에서 잘못하면 얼어죽지. 하지만 나만은 하두 콩알 틀어박히듯 신도들이 많으니께, 그냥 지금처럼 옷 잘 입고 오바 입고 구두 잘 신고, 상제니께 상제표시만 하고. 가며서 가며서 자. 그러구서 내가 공주에 떨어졌는디. 공주에 떨어져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거기도 젊은이들이 이리저리하구 안되겠어. 대전에 와서 보니께 암만 생각해도 뭐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헌디 아는 사람을 만났는디 나보고서 경찰을 하라고 혀. 그래서 내가 순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웃것다.
그런디 누가 그려 그러면 정훈장교를 한번 해보라고. 그런디 그 정훈 책임자가 대전에 와 앉아있어. 내가 그런대로 아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그 사람과 상대해서 내가 정훈장교가 됐어. 그래 가지구서 대구를 가서 방위군 거기를 가서 밥도 얻어 먹인 사실도 있구 헌디. 시간관계상 그 숱한 얘기를 여기서 다 못혀. 그러구서는 772 부대라고 거기 이제 비상시 춘향전이라고 만들어 가지고서 말여. 대원을 마흔 몇 명 조직해서 말여 그걸 더불고서 나 가고 싶은대로 여기 대전도 와서 공연도 해주고. 나 가고 싶은대로 가서 말여.
내가 춤추는 것도 잘 알고 말여. 내가 책임자니께 말여. 그건 그 단원은 경찰서에 갖다 맡기면 밥값 딱 치러줘. 부대들 데려다 위안도 해주고 말여. 그게 선무반여 선무반. 선무 공작대여 그러니께. 지금도 사진 있어, 내가 군복을 입고 장교가 떡 되가지고 한거 그런거 말여. 그 짓을 하다가 대산 내 고향엘 가서 공연을 해 주고서 그걸 내가 본대(本隊)로 너희들 가거라. 아니 대장님은 왜 안가십니까. 안 가도 괜챦어 가. 그러니께 그놈의 군대 쳐놓고 참 맹랑한 군대노릇을 내가 했지. 우리 집에 가니까 참 잘살고 집도 크고 참 그 좋은 닭 잡아서 실컷 두드려 먹고 말여, 여비 한 주먹씩 줘서 모두 다 본대로 입대시키고 말았거든.
그러구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가지구서 군복을 벗어 내던져 버리고 그럭하구서 공주로 해서 청양으로 해서 부여 가서 떡 누워 가지고서 아니 한강 이남을 범치 못하리니 괴병이 맹습하는 까닭이라. 그런 거 있지? 그때 한참 싸울 때여 그 후로도 2년 후인가 정전 되쟎었어. 그러니께 의통준비를 해야 된다 말여. 그러니께 상제님 진리가 그렇게 되져 있어. 나도 진리에게 그렇게 쏙았다 이 말여 그때. 그래서 부여군 내산면 마전리라고 하는 디가 있어. 안 내(內)자 묏 산(山)자 내산면(內山面) 삼 마(麻)자 밭 전(田)자 마전리(麻田里) 소동명은 삼바실이라고 하는디여. 거기 이 평국(李評國)이라는 신도가 있어. 평할 평(評)자 나라국(國)자.
이평국 신도 집에 가서 좌정을 하고 여기는 안방이고 그 위에 윗방, 그러고 이제 사랑채도 있고 다 있는디 선생님이라구 윗방에서만 있으래. 전 가족이 다 기가 막힌 찰 신도여. 윗방에서 한 달 이상 아마 거반 두어 달 있었는데 거기 있으면서 내가 신도들에게 의통준비금을 모금을 했어. 모금을 해 가지고서 말이 그렇지 말여 같이 일하고 허면서 그 늙은이들이 굶어죽는다든지 굶어죽지야 않지만 그 됐어?. 쌀 댓 가마 값 우선 보내도 주고 그 심부름은 청양군 증산면 해남리 강 태익(姜泰翊)이라는 사람이 꼭 중처럼 생겼어. 누가 봐도 중여. 머리도 빡빡 깎고 말여. 멋거리가 없는 중여. 당신은 누가 봐도 중이니께. 아니 뭐 세상에 심부름을 하기에 적임자여. 허니께 용화동을 다녀와라. 해서 그런 사람 심부름 시키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떡 있어가지구서 전주 이런 디를 사두방이 대전 어디 이런 디를 더듬어 가지구 그때 내가 경면주사를 많이 샀어 많이. 많이 사가지구 용화동을 떡 가가지구서 그걸 갈구 이렇게 가지구서 거기서 본격적으로 내 의통준비를 했거든? 그걸 매련하는디 근 1년을 했어. 1 년을 하는디 능률이 안 올러. 박 기백이 아들 그 박 주호라는 애고, 또 배 동찬 아들 걔 이름이 뭐인가 배 뭐신가 이제 이름 잊어버렸네. 지금이야 뭐 걔들도 50 이상 아마 그렇게 안 되었나 몰라. 지금이야 이제 늙은이 노릇 할 테지. 헌디 그런 애들 불러다가 애들이니까 말여, 우체국 같은데 가면 냅다 일분 찍는디 다다다다 손이 그렇게 빠르거든.
그 대신 사바하 안 찍어진 데 있고, 사바하는 잘 찍어졌는데 훔치훔치 안찍어진 데 있고, 반밖에 안 찍혀 반. 그렇게 해서 전부 지구에 누구 보내 파견할 신도까지를 조직하는디, 신도가 너무 많어서 말여 신도가. 소화할 수가 없어 소화를. 그래서 아! 이게 포교를 무대뽀로 많이 해도 안 되겠구나. 소화를 시킬 수가 없어. 그때 조직을 해 보니께. 그래서 갱신히 말여 뜯어고쳐가면서 당진의 이 이영이하고 고 석봉이라고 하는 신도를 더불고 가서 작성을 하는디 거기가 어떻게 돼가지고 있냐하면 용화동이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여 거기가. 모악산 거기로 전부 빨치산 말여.
그러니께 원평와서 말여 집 한 채를 얻어 가지구서 거기 와서 그런 것을 작성하고 의통준비를 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해 놓고서 집이를 딱 이제 와서 치성을 모시고서 내가 대 휴게기다. 대휴게기 이 게한다는 게자를 쉴 게라고두 혀. 쉴 휴 쉴 게. 포교 더 하지도 말고 현상유지 그냥하구서 내가 때 되면 나오마 때 되면. 그때 내가 최종적으로 가진 게 하나가 있어.. 내가 운영회 회장여. 운영회 회장. 재정관계로 그런 걸 하나 만들자고 해서, 그걸 벗어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구 말여. 까막해 가지고 못하고 들어 앉았는디.
의통준비를 하면서 용화동에 못 있고서 이 상호 씨 가족이 어떻게 돼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원평서 조금 올라가면 금산 중학교인가 있어. 거기가 쌍룡리여. 사과밭 많이 있고 한디 500미터 올라가나 한 1000미터 쯤 올라가나. 금평호 밑에 바로 맞은 짝에 조그만 집하나 얻어놓고서 일부는 거기 있어가면서 이제 의통준비도 한동안 거기서도 했어, 원평 내려오기 전에. 이 상호 씨 부인하고 말여 이 원호 씨하고 그렇게 싸우고 말여. 그러니께 이 원호씨 하두 뭘하니께 내 며느리만도 못한 년이 말여. 그 또 그이도 굉장하거든 어쨌든 이 상호씨가 더불고 사는데 말여 막 년자까지 대가면서...그러니 이상호씨 부인도 저 놈의 영감탱이 개새끼라고 말여. 그 뒤 이 원호씨가 떨어졌나 했더니 떨어지지는 않고 말여.
밀양에 도 순조라는 한의원이 있어 신도중에. 헌디 이 원호가 도 순조마누라를 어디가 수련시킨다고 더불고 가다가 중간에서 비온다고 어디 데려가서 강탈해 버렸어. 그때 늙은 놈여 이원호가 60 넘었어 그때. 도 순조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뜨고 죽었다는겨. 이 원호한테 마누라 강탈당해서 너무 분해서 눈을 뜨고 죽었다. 그건 뭐 내 신도들에게 들어서 하는 소리고. 자 이상호 부인도 그렇게 못돼 먹었고 이원호라는 사람도 중진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돼 먹었고. ~~~~~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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