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그가 17세기말 우리나라의 계몽군주(啓蒙君主)가 되었더라면,
-역사 속에 묻힌 진실을 복원하여, 인간 백정 인조(仁祖)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孝宗) 부자(父子)의 악행(惡行)을 더듬어 본다.
계몽군주(啓蒙君主)가 될 소지(素地)를 가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만일 일찍 죽지 않고 우리나라의 17대 임금이 되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미 17세기 말에, 러시아의 표트르대제(18세기 초)나 일본의 메이지(명치明治, 19세기말)같은 개혁군주(改革君主)가 되어 그들 나라보다 100~200년 앞서서, 대제국 명(明)을 무너뜨린 후금(後金)의 청태종(淸太宗, 홍 타이지)과 같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지배도 받지 않고, 동족상잔의 전쟁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은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는 가정을 해본다.
러시아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1672~1725)>는 <차르>로 43년을 통치하는 동안, 작은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을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러시아 제국(帝國)>으로 발전시킨 개혁군주이다. 10살 어린 나이로 이복형과 공동 <차르>가 되었으나 누나의 섭정으로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역에 살면서 유럽 문명에 익숙해 졌고, 20대에야 <차르>가 되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강한 해군을 양성하고자 25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네델란드로 가서 항해술과 선박제조기술을 직접 배워온 개혁 계몽군주가 되었다. 버려진 불모의 땅 <상태 페테르부르크>를 개발하여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옮겼으며, 흑해로 진출하여 강한 해군을 양성하여 오늘날의 러시아로 발전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또 일본의 메이지(1852~1912)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幕府)>가 일본을 통치하던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天皇)이 군림하는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형성한 <메이지 유신>을 이룬 사람이다. <고메이>천황의 둘째 아들인 메이지가 세자로 봉해졌는데, 1864년 조선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어린 아들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고 부국강병으로 국가가 융성해 진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진 세자 메이지가 자기도 정권을 잡아 일본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싶은 욕심에 불타, - 일설에 의하면, 1865년 아버지를 죽이고 천황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역사에는 1866년 <고메이>천황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 17세의 <메이지>가 천황을 계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침 그때(1866),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라는 사상가가 100여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그 제자들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를 천황으로 받들어, 존황양이(尊皇攘夷, 천황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로 왕정복고(王政復古)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메이지>는 토지를 측량, 토지 개인소유인정, 사회간접자본 육성, 서양으로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청소년 선발 서양 유학 등 개혁 정책으로 <메이지 유신>을 완성하여 근대국가를 형성한 개혁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조선의 소현세자는 병자호란(1636~1637)이 끝나고, <홍 타이지>에 의해 후금(後金)으로 끌려갔다가 심양(瀋陽)에서 8년간(1637~1645)의 볼모사리를 마치고, 한 동안 북경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지 2달 만에 병사하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많은 학자들이 소현세자는 그 아비 인조의 손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비가 자식을 죽인 사례는 영조(英祖)도 있다. 그러나 영조는 인간 백정이 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세손(世孫)으로 삼아 훌륭한 임금(정조正祖)으로 길러내어 조선의 황금시대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비정한 아버지라는 굴레를 벗어난 임금이다.
조선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인조는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인간 백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순간 판단의 실수로 아들을 죽였더라도, 영조처럼 손자를 세손으로 삼고 훌륭하게 키워서,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었더라면 인조도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그렇지 않았다. 며느리를 모함하여 죽이고 손자들도 모두 제주도 등의 벽지로 유배시켜 죽게 한 천하의 살인마가 된 것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 역시 그 아비와 같은 인성을 가진 자이다.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후금의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끌려가서, 형님 내외와 8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세자였던 형님이 부왕과 갈등으로 죽고 형수와 조카들도 아버지 인조(仁祖)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는데, 형님과 조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는가 하면, 형님의 아들인 세손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자신이 물려받았고, 1650년 왕위에 오른 뒤에도 전혀 형님의 가족들의 억울함을 벗겨주거나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던 몰인정한 숙부였다. 또 청(淸)나라에 복수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서 허황된 북벌론(北伐論)만을 주장하여, 전쟁 준비로 국력만 소진하다가 1659년 재위 10년 만에 갑자기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만약 형님인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를 계승하였더라면, 우리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최신무기인 최대 사정거리 9km인 괴력의 홍이포(紅吏砲)를 앞세워 공격해 오는 후금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웅거한지 46일 만에 인조가 후금에 항복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로 조선은 후금이 명(明)나라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병사와 모든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엄청난 국력을 소진하여야만 하였다.
후금의 인질이 되어 잡혀간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소(瀋陽館所)에는 세자를 수행했던 시강원과 익위사 관리들, 일꾼, 노비 등을 합쳐 5백여 명의 대식구가 있었다. 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조선에서 보내 온 물자로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볼모사리를 시작한 소현세자는 현명한 세자빈인 강빈(姜嬪)의 도움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점차 수입이 늘자 먹고 남은 곡식으로 경제활동을 하여 볼모사리를 마치고 돌아 올 때에는 막대한 금은과 물자를 본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 즉 경제적 자립 능력을 체험을 통해 갖추고 온, 국제 무역계의 달인이 되어 돌아 온 것이다.
또 소현세자는 본국을 대신하여 파견 나온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청태종(淸太宗, 홍 타이지)이 명(明)을 멸망시켜 가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영특한 홍 타이지가 국가를 경영하는 방법을 몸소 체험을 통하여 배웠고, 서양문명이 북경으로 들어와 청(淸)나라를 개혁시켜 가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나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도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켜야겠다는 포부를 차근차근 쌓아갔던 것이다. 북경에 들어온 서양의 선진 문물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적용할 개혁프로그램을 완성해 나갔던 것이다. 무모한 소모적인 북벌정책으로 국력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자력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자강(自强) 능력을 길러 강력한 근대국가를 건설할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갔던 것이다. 북경에서 독일출신 천주교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과학(科學)으로 무장한 강력한 군주국(君主國)이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근대국가의 건설 계획을 가슴 속에 품고 귀국하였지만, 소현세자는 그 계몽군주 개혁군주의 프로그램을 써 보지도 못하고, 청(淸)나라 황제가 소현세자와 결탁하여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빠진 무능하고 옹졸한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만일 인조의 옹졸함이나 무능함이 없어 소현세자가 조선의 17대 임금이 되었더라면,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에게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기회가 되어, 우리 조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19세기 말)>보다 200년 앞선, 17세기 말에 소현세자라는 영특한 계몽군주를 탄생시켰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나라는 초기의 청(淸)나라처럼 강력한 근대국가를 건설하여, 20세기 초에 우리 조선이 겪었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1945)의 굴욕을 겪지 않았을 텐데ⵈⵈ. 하는 한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