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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 사헌부 대사헌 부군 행장〔先考司憲府大司憲府君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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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하진(夏鎭), 자는 하경(夏卿)이고, 그 선조는 여주(驪州) 사람이다. 고(考)는 지평공 휘 지안(志安)이다. 조부는 이상공(貳相公) 휘 상의(尙毅)이고, 증조는 첨정공 휘 우인(友仁)이고, 고조는 응교공 휘 사필(士弼)이다. 외조부는 종반(宗班)인 영제군(寧堤君) 휘 석령(錫齡)이다.
공은 숭정 원년 우리 인조 헌문대왕(憲文大王) 6년 무진년(1628) 봄 2월 10일 오시(午時)에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천부적으로 영특하였고 기국이 트여 어렸을 때 이미 큰 인물이 될 도량이 있었다. 학업이 날로 진보되고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행동거지를 오직 부모의 명에 따랐으며 한 번도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다. 육예(六藝)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정에서 응대하는 여가에는 단지 독서하고 습자(習字)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공의 중부(仲父)인 청선당(聽蟬堂)은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공의 자획을 보고 탄복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붓으로 이름을 낼 것이다.” 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5)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을미년(165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유년(1657)에 지평공이 또 세상을 떴으니, 몇 년 사이에 잇달아 부모를 여의었다. 복상을 마치자 부모를 잃은 슬픈 생각에 영달할 뜻이 없었다. 오직 날마다 경전의 뜻을 강구하였으며 제자백가 서적까지 널리 통달하였다. 공의 종형인 태호공(太湖公)은 명덕(名德)으로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소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유독 공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일이 생기면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찾아와 자문하였다. 한 고관이 공의 이름을 탐내어 그 문하에 두고자 하여 만나 보려고 애썼다. 사람들이 혹 한번 굽혀 추천받을 계제로 삼기를 권하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귀천은 타고난 것이어서 인력으로 도모할 수 없다. 가령 이런 일이 있더라도 한번 다른 사람에게 매이면 사람됨의 어질고 불초하기가 어떻겠는가.” 하였다.
현종 3년 임인년(1662) 겨울에 처음 관직을 맡아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니 훈도를 관장하는 직무였다. 중관(中官)이 문의하는 대로 개도하고 비유하여 깨우쳐 준 것도 지극하였으니, 여러 중관이 서로 말하기를, “어찌하면 이 경계의 말씀을 기록해 두어 종신토록 따라 행할 방도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중양과(重陽科)에 장원하였다. 재신(宰臣) 가운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서 기회를 틈타 저지하여 출신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끝내 어쩔 수 없었다.
3년 뒤인 병오년(1666) 봄에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2갑(二甲)을 차지하였다. 마침내 가주서로 입시하였는데, 진퇴가 절도에 맞았다. 조상 사석(趙相師錫)이 당시 근시(近侍)의 반열에 있었는데, 밖에 나와서 말하기를, “이하진은 궁궐을 출입함에 예전 법도대로 행하고 신진의 티가 없으니, 이러한 사람을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였다.
5월에 규례대로 사옹원 직장에 올랐다. 6월에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정미년(1667, 현종8) 3월에 사헌부 감찰에 옮겨졌다가 이내 다시 전적을 거쳐 예조 좌랑에 옮겨졌다. 4월에 다시 전적에 옮겨졌다. 10월에 병조 좌랑에 옮겨졌다.
무신년(1668) 8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11월에 도로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당시 상이 온천에 행차하고 정상 치화(鄭相致和)가 호위대장으로 도성에 남아 있었는데, 궐 안을 출입할 때 겸종(傔從)을 규례보다 많이 거느려서 공이 법으로 제재하였다. 정치화가 사람을 보내 힐문하자 공이 말하기를, “대가가 멀리 나갔고 도성 안이 비었으니 낭관은 단지 삼가 법을 지킬 줄만 압니다.” 하였다. 이에 정치화가 사과하면서 직분을 안다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평에 옮겨졌다가 대관 김징(金澄)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공은 시속을 안타깝게 여기고 참소를 피하여 광주(廣州)의 매산(梅山)에 물러나 기거하였다. 이때 〈거불이혜사(居不易兮辭)〉를 지어 뜻을 보였다.
얼마 있다가 주사 낭청(籌司郞廳)이 되었다. 신해년(1671) 3월에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다. 4월에 정랑에 오르고 진청(賑廳)을 관장하는 직임을 겸하여 외창(外倉)의 환곡을 감독하였다. 관장이 두곡(斗斛)의 기준량 외에 잉미(賸米)의 명목으로 기일을 따져 납입을 독촉하자, 공이 말하기를, “기준량을 이미 채웠는데 또 여분까지 요구하는 것은 법에도 어긋나고 백성에게 갈취하는 것이니, 결코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관장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하기를, “이 낭청의 말이 옳긴 옳다. 이 낭청이 있을 때는 강요하지 말라.” 하였다. 당시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자들이 길에 즐비하였다. 공이 직접 다니며 보살피매 온전히 살아나게 된 자가 매우 많았다.
다시 지평에 옮겨지자 상소를 올려 김징에게 무고당한 실상을 밝혔다. 이윽고 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었다. 성균관 직강ㆍ사예, 시강원 사서를 역임하였다.
임자년(1672, 현종13) 1월에 삼도(三道) 해운 판관(海運判官)의 명을 받고 폐단을 자세히 살펴 일체 혁파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뒤에 연해의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7월에 장령에 제수되었다. 9월에 사명을 받들어 재상(災傷)을 입은 황해도 전정(田政)을 안험(按驗)하였는데,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다 보고하여 변통하니, 서쪽 백성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김징이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평산(平山)에 유배되어 있었다. 공이 마침 그 고을을 지나다가 조정에 함께 있었던 옛 동료라고 하여 불러들여 만나 성의 있게 접대하니, 김징이 부끄러워하면서 감격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대부들 또한 공의 덕량(德量)을 대단하게 여겼다.
계축년(1673, 현종14) 4월에 다시 춘방(春坊)에 들어가 필선이 되었다. 금상이 세자로 있을 때에 공은 언제나 경사(經史)를 인용하여 계도한 것이 매우 많았다. 상이 매양 뜻이 의심나면 그때마다 찌를 붙여 내리면서 “이 필선에게 물어보라.”라고 하였으니, 공이 매우 공경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얼마 안 되어 문학, 보덕에 옮겨졌다.
갑인년(1674) 1월에 다시 장령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필선에 옮겨졌다. 2월에 수찬, 장령, 수찬을 역임하였다. 4월에 헌납, 수찬을 역임하였다. 5월에 교리, 헌납을 역임하고, 6월에 교리에 옮겨졌다. 7월에 사간원 집의에 옮겨졌다가 8월에 사성, 수찬을 역임하고, 9월에 집의,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0월에 부응교, 응교를 역임하고, 11월에 수찬에 옮겨졌으니, 한 해에 모두 20번을 옮긴 것이다.
이해 8월에 현종이 승하하였는데,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수렴청정을 발의하여 여러 대신들과 정사당(政事堂)에서 함께 모인 다음 옥당의 관원들을 불러 가부를 물었다. 당시 사왕(嗣王)은 나이가 어리고 외척들은 강대하였다. 권간들은 즐비하게 들어서서 야심을 품고 기세를 대단하게 부리고 있었다. 공은 마침내 항변하여 말하기를,
“사군께서 춘추가 이미 장성하셨고 성명(聖明)이 날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공들께서는 선대왕의 유명(遺命)을 받은 대신으로서 당연히 좌우에서 보필해야 하고 대비께서도 중간에서 주선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수렴하실 것까지 있겠습니까. 누가 이 의론을 고집하는지는 모르지만 수렴을 거두기가 어려운 것을 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오늘날에 누가 한 위공(韓魏公)이 되겠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아 의론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 당시 조정 관원이었는데, 공의 집을 찾아가서 매우 칭찬하기를, “뜻밖에 오늘 다시 옛사람의 정직한 유풍(遺風)을 보았다. 조정에 인물이 있으니, 우리나라가 영원히 복을 누릴 것이다. 이는 필경 공의 덕일 것이다.” 하였다. 미수(眉叟) 허상 목(許相穆)은 그 일을 듣고 탄식하기를, “군자가 수립한 바는 위란할 때에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새로 정사를 시작한 처음에 공이 즉시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하였으니, 그 대강에,
“지금 전하께서는 한창 마음에 지극한 애통함을 지니시고 몸에 상복을 입고 계시니, 비록 경연에 나가실 수는 없더라도 항상 소대(召對)하여 고금의 치란(治亂)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덕을 넓히고 옹폐(壅蔽)를 없앤다면 날마다 편전에서 윤대(輪對)하여, 한갓 ‘예예.’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나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이 일찍이 옥당에 있을 때에 삼가 들은 바가 있는데, 대개 경연을 열지 않는 날에는 고사(古事)를 써서 올리는 규례를 두어, 경서(經書)나 혹은 사서(史書)에서 무릇 치란에 관계되는 가언(嘉言)이나 선행(善行)을 두세 조목 뽑아 베껴서 임금이 보도록 하였으니, 이는 당(唐)나라 신하였던 정담(鄭覃)이 남긴 일입니다. 근년에 와서 폐지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입니다. 또한 다시 유신에게 명하여 옛일을 다시 회복하여 시행함으로써 부족함을 보충하는 데 일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절검은 반드시 우선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공(御供)을 줄이는 것은 밝으신 성상께 기대하지 않을 수 없고, 산릉의 여러 물품은 전례(典禮)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적절히 재감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근래 왕자나 부마의 집에 각각 둔전(屯田)과 세수(稅水)가 있는데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국가가 만일 그들을 부유하게 해 주고 싶다면 자연 내려 주는 은전이 있는데, 어찌 저들 스스로 취하도록 내맡길 수 있습니까. 인심의 단단한 결속은 수령을 신중히 택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천주(薦主)를 연좌(連坐)하는 법은 애당초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간계와 속임수를 쓰는 것이 허다하여 결국 한 사람도 함께 죄받은 자가 없습니다. 조정의 법은 일정불변한데 담당 관원이 곧장 폐기하고 시행하지 않으니, 날로 곤궁해지는 백성들이 굳은 뜻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가납하고 가까이 두도록 명하였다.
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졸하고 효묘(孝廟)가 둘째로서 적통을 이었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종이 승하하자 재신(宰臣) 송시열(宋時烈)이 사종(四種)의 설을 인용하여 “대행 대왕은 왕대비에게 서자가 된다. ‘직접 낳은 자식이지만 적장자가 아닌 경우〔體而不正〕’이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미수 허 상공 등 신하들은 예에 의거하여 쟁집하기를, “대행 대왕은 왕대비에게 서자가 아니라 두 번째 장자이니,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 하였는데, 마침내 신하들 모두 죄를 얻었다. 현종 말년에 예를 그르치고 정통을 어지럽힌 것을 크게 깨달아 항변한 신하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일을 주관한 자는 죄를 받고 축출되었다.
금상 숙종이 선대왕의 유명을 계승하여 나라의 예법을 고쳐 바로잡고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기에 마음을 다하였다. 공 또한 동류들과 나란히 조정에 들어가 정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스스로 상께 깊이 인정을 받는다고 여겨 오직 보답할 길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면 알고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화평한 태도를 힘써 견지하니, 연소배들의 지나치게 과격한 논의가 모두 조정되었다. 송시열을 처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당장 시비 여하를 논하지 말라. 저 또한 예를 말하다가 죄에 걸린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죽음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당시 논의가 대권을 쥔 재상의 뜻에 영합하여 종묘에 고하는 것까지 아울러 저지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종묘의 예는 일이 있으면 고하는 것이니 어찌 국통(國統)을 바로잡은 것을 고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뒤에 그 의론이 행해졌다.
국구(國舅)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상소를 올려,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정(楨) 형제가 현묘(顯廟)의 상중(喪中)에 궁인(宮人)을 가까이하였다고 아뢰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부원군을 함문(緘問)하기를 청하였다. 어느 날 인대(引對)하는 자리에 대비가 내전에서 곡하고 나와 문을 사이에 두고 섰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신 이하가 당황하여 조처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예전에 소군(小君)을 뵙는 예가 있었으니, 자성(慈聖)께서 하문하실 일이 있다면 신하들이 직접 교지를 받드는 것도 의리상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경들은 물러가지 말라.” 하였다. 대비는 직접 옥음을 내어 부원군의 말이 사실임을 밝히면서 함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신하들이 또 대답하지 못하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왕실의 지친(至親)이 이처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삼척(三尺)의 국법이 엄연히 있으니, 유사에게 내려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대비의 노여움이 조금 가셨고, 상 또한 그의 억울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의 말이 아니었다면 화를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루는 허 상공이 주역에 밝은 자로 공 및 한두 명사를 추천하고자 하였다. 공이 듣고 말하기를, “대신의 추천은 참으로 잘 살피고 신중히 해야 합니다. 주역에 밝은 자라는 명목은 더욱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저 또한 감히 자신할 수 없는데 더구나 저 연소한 자가 뒷일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허 상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이 이윽고 끝을 잘 마치지 못하자 공의 밝은 감식력에 더욱 탄복하였다.
일찍이 휴가를 받아 목욕하러 지방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상주하였다. 당시 영상 허적(許積)이 정사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흉년이 든 것을 말하기를 피하고 있었다. 공의 말이 마침 여기에 미치자 허적이 상 앞에서 발끈 성을 내며 꾸짖는 말을 하여 중단시켰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조정의 반열에 끼었으니,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이 바로 신의 직분입니다. 지금 아직 반도 아뢰지 못했는데 대신이 곁에서 교묘하게 공격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대신의 권위가 막중합니다.” 하였다. 이에 허적이 황공해하며 대죄하였고, 상이 위로하며 양쪽을 다 화해시켰다.
공이 물러나 또 상소하여, 포흠 난 세금을 감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 보고되지 않은 각 아문의 둔전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허적이 공에게 유감을 품은 것이 날로 심해졌다. 그러므로 의정부 사인의 자리가 여러 해 비어 있고, 전한(典翰)과 직제학의 결원을 채우라는 명이 있어도 응하지 않았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관원을 선발하려고 하다가 중단하였으니, 이는 당시 여론이 공을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을묘년(1675, 숙종1) 2월에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3월에 부응교에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수찬에 옮겨졌다. 윤5월에 도로 부응교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도시 정에 올랐다. 며칠 뒤에 전조에서 공을 사간원 아장(亞長)에 의망하였다. 당시 승지도 결원이 있었으므로 승지의 망단(望單)도 나란히 올라갔다.
상은 공을 먼저 사간에 제수한 다음 승지의 망단에 첨가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즉시 공의 이름을 써서 들이니,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옛 규례에 삼사(三司)의 아장이 되어 이미 정3품을 지낸 자는 바로 승지에 의망하게 되어 있는데, 공이 이내 정3품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공은 권신(權臣)의 미움을 받아 권신이 일마다 방해를 하였으므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은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이미 오랫동안 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비(中批)로 제수하는 편법을 쓰지 않고자 한 것이다. 여러 번 옮겨지다가 좌부승지에 이르렀으니, 승정원에 있었던 것이 거의 반년이었다.
전에 현묘(顯廟)의 상이 났을 때 대왕대비는 의당 적손(嫡孫)의 복을 입어야 하는데, 이조 판서 윤휴(尹鑴)가 또 천자와 제후의 상에 참최(斬衰)만 있고 자최(齊衰)는 없다는 설을 인용하여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미수 허 상공은 또한 자식이 어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는 의리로 소장을 올려 매우 힘써 밝혔다. 윤휴의 쟁집이 끊이지 않자 상이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공은 당시 승지로서 입시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우상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번 나를 위해 비답을 초(草)해 보라.” 하였다. 공이 즉시 상 앞에서 초하여 올리니, 윤휴가 더는 쟁집하지 않았다.
9월에 동전(東銓 이조)에 들어가 참의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윤휴가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공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이 수렴청정을 논의할 때 항변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탄복하며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이조 참의의 결원을 엄선하라는 명이 있자 윤휴가 마침내 규례에 구애받지 않고 곧장 의망하였으니, 공도(公道)인 것이다.
병진년(1676, 숙종2) 봄에 체직되어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대사간에 옮겨졌다. 다시 우승지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도로 후사(喉司)에 들어가 우승지가 되었다. 다시 대사간을 거쳐 예조 참의가 되었다. 가을에 성균관에 들어가 대사성이 되었다. 다시 우부승지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다. 당시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쌓자는 의논이 나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대로변에 축성하더라도 오히려 성사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벽촌 외진 곳의 쓸모없는 땅이니, 한갓 백성들의 원성만 살 뿐입니다.” 하였다.
정사년(1677, 숙종3) 봄에 부제학이 되었다. 가을에 예조 참의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대사간, 호조 참의, 좌승지에 천전(遷轉)되었다.
겨울에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라는 명을 받고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되었다. 전에 사명을 받든 조신(朝臣)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황조십육조기(皇朝十六朝紀)》를 얻어 왔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계해정사(癸亥靖社) 기사가 실려 있는데, 내용이 잘못되고 욕될 뿐이 아니었다. 이에 능력 있는 사신을 뽑아 보내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청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친왕손인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을 정사(正使)로 삼고, 부사는 의당 아경(亞卿) 가운데 재덕과 문망이 있는 자로 삼아야 하는데, 다만 일이 지극히 어려우므로 자격에 구애받지 말고 오직 사람만 보고 발탁하기로 하였다. 상은 공을 염두에 두고 상신 허적에게 묻기를, “이하진이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싫어하면서 아뢰기를, “이하진은 학문은 넉넉하지만 외교에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이 넉넉하면 된다.” 하고, 마침내 간택하였다.
전에 비의(緋衣)를 하사받은 문관으로 재망(才望)이 있는 자는 으레 주사(籌司 비변사)를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허적이 공이 관리 일에 서툴다고 하며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고 또 병이 들어 일찍 일어나지 못하니, 이분이 나를 알아주신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사간 겸 예문관제학에 제수되고 호조 참판에 옮겨졌다. 다시 대사간, 호조ㆍ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인 무오년(1678, 숙종4) 봄에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다시 부제학을 거쳐 도로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당시 상이 마침 미령하였다가 회복된 뒤에 시약청 제조(侍藥廳提調)를 맡았던 공(功)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승진되었다.
상의 병이 심해졌을 때 아직 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속에 갑옷을 입고 입시하여 세자를 세우려고 기도하다가 허적에게 발각되었다. 김석주가 두려워서 애걸하는 모습을 보이자, 허적은 마음이 약해져 차마 발설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김석주는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적은 만일의 우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체부 금위병(體府禁衛兵)을 설치하고 자신이 도체찰사를 맡아 그들을 통솔함으로써 병권을 나누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무 까닭 없이 군대를 세우는 것은 재난을 부른다.” 하였다.
3월에 비로소 하직 인사를 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나갔다. 평양에 이르렀을 때 연경에 상사(喪事)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정이 왕손인 복평군 이연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고, 공에게 상경(上卿)의 가함을 주어 진향 정사(進香正使)로 삼고, 부사를 별도로 차임하여 뒤따라가서 도중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공은 명을 받고는 무관 중에 명행(名行)이 있는 자를 뽑아 막료로 삼고 다짐을 두기를, “사행은 본래 군문(軍門)의 법도가 있다. 혹 규율을 어기는 경우에는 의당 율문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하니, 여러 막료들이 각자 신칙하여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연경에 도착하자 중국의 서리들이 혹 건방지고 무례하게 굴었다. 공이 역관을 통해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작은 나라의 사신이지만 너희의 직임은 말을 전하는 일개 역관에 불과한데 어찌 이와 같이 무례하게 구는가. 계속 무례하게 굴면 예부(禮部)에 신고하겠다.” 하니, 그 뒤로 두려워하며 감히 다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예부 좌시랑(禮部左侍郞)이 일을 핑계로 들렀는데, 사신으로 하여금 문에 나와 영접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양국이 상견하는 데 있어서는 본래 일정한 예가 있다. 그대가 또한 사적으로 와서 일을 주간하니,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꼭 그렇게 하겠다면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자, 시랑이 화를 내며 돌아갔다. 외국 사신의 일은 예부에 관계되므로 동행인들은 모두 사달이 날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다만 “내가 견지하는 바는 정도(正道)이고, 또한 할 일을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돌아올 때에 으레 선물로 내려 주는 은괴와 비단을 모두 써서 고서(古書) 수천 권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8월에 복명하여 형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당시 옥사를 평의할 때에 쌀을 손실한 죄에 연루되어 하옥된 선인(船人)이 있었다. 사람들이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뒤에 그런 일이 계속되니 마땅히 죽음으로 논해야 한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왕법에 생재(眚災)는 용서해 준다고 하였다. 이미 그의 억울함을 알았는데, 뒷날의 폐단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풀어 주었다. 또 자기 아내를 간통한 자를 추후에 살인한 백성이 있었다.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데, 공이 말하기를, “법에 남의 처를 간통한 자를 현장에서 즉시 살해한 경우는 죄를 묻지 않도록 되어 있다. 지금 이 백성이 간통한 자를 죽인 것이 비록 간통하는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발견하고 쫓아가 죽인 것이 경각간이니, 일반인이 서로 죽인 것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하고 또한 사형을 감해 주었다.
겨울에 대사간을 거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사헌부 대사헌에 옮겨졌다. 기미년(1679, 숙종5)에 병조 참판을 거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어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한성부 우윤을 거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대사성에 옮겨졌다. 겨울에 도로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경신년(1680) 봄에 대사헌, 한성부 좌윤을 역임하고 도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당시 영상인 허적이 정권을 주도하니, 그 서자인 허견(許堅)이 형편없는 짓을 많이 하였으나 그를 붙좇는 자들이 많았다. 미수 허상 목은 사림의 추중을 받고 있었고 공은 실로 좌우에서 모셨다. 세상에서는 청론(淸論)이니 탁론(濁論)이니 하는 지목이 있었고, 요직에 있는 자들은 날로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때 미수가 차자를 올려 허적 부자가 불법을 저지른 일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견책을 내려 내치기에 이르렀다. 공이 즉시 상소하여 조정의 잘못된 점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끝에,
“전하께서는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누차 신하들을 내치셨으나 끝내 그 죄명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덕망 높은 원로 신하들조차 조정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니, 후일 국사에 실리기를, ‘오늘 다섯 신하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외직에 보임되었다. 다음 날 네 신하가 누구의 말로 찬축(竄逐)되었다. 신 홍우원(洪宇遠)의 경우는 원로 대신으로서 죄를 얻었고, 신 허목의 경우는 대로(大老)인데도 용납되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왕위에 계신 7년 사이에 현자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한 정성에 대해 모두 진위 여부를 의심하며 혹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 맹호가 산중에 있으면 명아주 잎, 콩 잎을 뜯지 못하며 용이 큰 연못에서 사라지면 미꾸라지, 드렁허리가 춤을 춥니다. 지금 충신, 현신이 모두 떠나가고 나라가 텅 비면 전하는 누구와 함께 다스리시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상이 진노하여 특명으로 외직인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보임시키고 즉시 말을 지급하여 부임하게 하였다. 대신(臺臣)이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하자 재신(宰臣) 아무개가 말하기를, “여러 날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조정에서 장차 청대(請對)하여 명을 반려할 것이니 우선 중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대계(臺啓)가 마침내 중지되었는데 재상은 끝내 함묵하였으니, 잘못된 일이다.
공은 부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월급을 덜어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을 보조함으로써 권면하고 가르치는 방도를 다하였다. 때로 여가가 생기면 시를 읊으며 소일하였다. 이윽고 화가 일어나 공 또한 파직되어 귀향하였다.
당시 김석주가 자리에 올라 정사를 주도하면서 예전의 유감을 가지고 반드시 공을 내쫓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석주가 강화에 돈대(墩臺)를 쌓자는 논의를 냈을 때 공이 말하기를, “돈대 안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수백 인에 불과합니다. 형세가 나누어지면 힘이 약해져서 외적의 침략을 잘 막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역사(役事)를 벌일 때가 아니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많이 초래할 것이니, 참으로 나라의 근심이 해구(海寇) 말고 다른 데에 있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민병(民兵)을 조발하고 역사 또한 규모가 커졌다. 당시에 이유정(李有湞)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축성장(築城將) 이우(李𦸲)에게 모반 내용의 글을 투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기화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이우가 고의로 놓아 보내고서 투서를 김석주에게 보내니 김석주도 비밀에 부치고 발설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영상 허적에게 고하여 마침내 이우를 국문하게 되었다. 이우는 실정을 고하지 않은 채 죽었고 이유정을 찾아서 잡아들였는데, 이유정이 이미 복주(伏誅)된 뒤에도 김석주는 유독 아무 일 없는 듯이 태연하였다.
김석주는 또 고묘문(告廟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유정의 모반 서찰의 내용이 예를 그르치고 정통을 어지럽히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이 품주하여 김석주 및 공 등 두세 조신(朝臣)을 불러 그 빠진 부분을 보충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신하들이 서로 가부를 의논하여 몇 구절을 첨입하였는데, 김석주는 달리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김석주는 먼저 허적에게 부탁해 놓고 사고(史庫)의 일로 강도로 간다고 핑계 대고는 의논이 끝나기 전에 지레 나갔다. 여러 사람의 의론이 고친 문자가 오히려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반드시 더 첨삭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글을 주관하는 자가 이미 밖에 나가 있고, 문자가 타당치 않은 것이 일에 해롭지는 않습니다. 금방 바꾸어서 나간 자의 의도에 적중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남겨 두어 김석주를 기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따르지 않았다. 공은 허적이 매수되었고 또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때에 이르러 김석주 일당이 고유문을 마음대로 고쳤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아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다. 상은 평소 공의 진실함을 환히 알고 있었기에 오래도록 따르지 않았다. 김석주는 마침내 다른 일로 죄를 씌운 다음 대계(臺啓)를 따르기를 청하였다. 상은 그때 김석주에게 의지하여 일을 맡기고 있었으므로 결국 윤허하여, 공을 운산군(雲山郡)에 유배 보냈다. 대개 김석주는 매양 공과 함께 고시(考試)하였는데, 김석주가 그 문객인 이사명(李師命)을 위해 남몰래 사정(私情)을 두어 누차 장원으로 발탁하고자 하였는데 번번이 공에게 발각되었다. 김석주는 안색을 붉히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고 공을 모함하는 것이 날로 심해졌다. 조정에서 만나면 반드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니, 석영(射影)의 독기를 하루도 마음에 잊은 적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회를 틈타 분노를 풀었으니 또한 너무 심하였다.
다음 해 임술년(1682, 숙종8) 여름에 마침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요약하여 아들들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가정에서 배운 것이니 너희도 삼가 지키라.” 하였다. 병이 심해져서도 오히려 군신 간의 일에 연연해하고 집안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거하던 집에서 임종하였으니 이해 6월 14일이었다. 향년은 55세였다. 가을에 고양군(高陽郡) 혜음령(惠陰嶺) 아래에 귀장(歸葬)되었고, 기사년(1689)에 양주(楊州)에 이장되었다. 임신년(1692)에 또 원주(原州) 백운산(白雲山) 분지동(分池洞) 오좌(午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앞서 판사 심재(沈梓)가 공의 억울함을 아뢰었고 또 대신 아무개도 공이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허적이 못하도록 막았다. 마침내 직첩을 환급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에게 저지당하였다. 후일에 김수항 등이 죄받아 죽자 심재가 또 상께 진달하니, 상이 처음대로 복관(復官)하도록 명하고, 유사를 보내 제문을 가져가서 사제(賜祭)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은총을 보였다. 아, 사생 간의 군신의 의리가 여기에 이르러 더 이상 유감이 없게 되었다.
공은 태어났을 때 이상한 표시가 있었으니, 이마 위에 ‘문(文)’이란 글자가 있었다. 눈은 매우 밝아 밤에도 가는 글자를 변별할 수 있었다. 기백(氣魄)이 충실하여, 일찍이 친족 가운데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응시하자 귀신이 바로 피하였다. 기억력도 출중하였다. 그러나 재주를 믿고 스스로 태만하지 않았다. 책을 보면 반드시 충분히 익혀서 뜻을 화통하게 깨우칠 정도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노쇠한 만년에 이르도록 여전히 외우는 것이 매우 많았다.
시를 지을 때 공교하게 짜 맞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붓을 들면 시상이 샘솟듯 끊이지 않아 잠깐 사이에 몇 편이 이루어졌다. 혹 시에 대해 물으면 대답하기를, “시는 알 듯하면서 알 수 없는 것을 높게 친다.” 하였으니, 대개 언어로는 엮을 수 있지만 진짜 모습을 표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필법 또한 뛰어나서 사람들이 비로소 청선당(聽蟬堂 이지정(李志定))이 안목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성품은 강직하여 악행을 미워하기를 자신을 더럽히는 듯이 하였다. 또 남을 포용하는 도량이 모자라서 선대의 충후한 덕망을 실추시킬까 염려하여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관용과 위엄을 병용하였다. 따라서 농담하면서 화락하게 지냈다. 그러나 시비를 분변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격하여 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과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평소 검약을 숭상하였으므로 신분이 귀하고 현달하였는데도 집에 좋은 물건이 없었다. 녹봉으로 받은 곡식은 반드시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눠 주었다. 평소 항상 마음을 편안히 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며 매양 “만사가 각자 정해져 있으니 나는 미간에 수심의 기색을 띠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라고 하였다. 또 매양 가득 차는 것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았다. 공의 아들 잠(潛)이 약관에 명성이 드러나고 과거에 합격하자 공이 말하기를, “소년 때의 등과는 한 가지 불행이다.” 하고, 회시(會試)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상을 섬기되 속이지 않고 옳은 일은 반드시 헌의하였다. 후배를 이끌어 맞아들이고 공도를 넓히기에 힘써서 사론(士論)을 세우고 사기(士氣)를 지키는 것을 첫 번째 의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뚝이 유림의 영수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문형(文衡), 태정(台鼎)으로 기대하였는데 끝내는 뜻밖의 죄망에 걸려 궁벽한 곳에서 한을 품은 채 생을 마쳤으니, 시운(時運)인가. 명이로다.
공은 자호가 매산(梅山)이다. 또 육우당(六寓堂)이라 호를 짓고 이어 풀이하기를, “천지에 형체를 맡기고, 경사(經史)에 마음을 맡기고, 술잔에 취미를 맡기고, 훼목(卉木)에 눈을 맡기고, 시구(詩句)에 흥을 맡기고, 서법(書法)에 정신을 맡긴다.” 하였다. 《육우당집(六寓堂集)》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전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된 이씨(李氏)로 본관이 용인(龍仁)이다. 고려조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 휘 중인(中仁)의 10세손이다. 조부 휘 사경(士慶)은 대사간을 지냈고, 고 휘 후산(後山)은 개성 유수를 지냈다. 외조부는 풍산 김씨(豐山金氏) 휘 수현(壽賢)으로 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무진년(1628, 인조6) 10월 26일에 태어나 정미년(1667, 현종8)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0세이다. 처음에는 혜음령 아래에 안장되었다가 임신년(1692, 숙종18)에 옮겨 공의 묘에 부장되었다. 후 부인은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고려조 태사(太師) 휘 행(幸)의 후손이다. 증조 휘 희(憘)는 도승지를 지냈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의중(義中)은 목사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고 휘 대후(大後)는 통덕랑이다. 외조부는 순흥 안씨(順興安氏) 휘 세로(世老)로 성균 진사이다. 부인은 병술년(1646) 8월 18일에 태어나 을미년(1715) 6월 2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70세이다. 또한 공의 묘에 부장되었다.
전 부인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장녀는 판서 목창명(睦昌明)에게 시집갔다. 다음 아들은 해(瀣)이다. 차녀는 처사 조하주(曺夏疇)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잠(潛)이다. 삼남은 서(漵)인데, 조정에서 불러 찰방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 부인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침(沉)이고, 다음 딸은 사인 정득주(鄭得柱)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익(瀷)이다. 측실에게서 1녀를 두었으니, 권홍(權䪦)에게 시집갔다. 목창명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목중광(睦重光)은 진사이고, 딸은 유채(柳采)에게 시집갔다. 해는 일찍 죽어 자식이 없으므로 종자(從子) 광휴(廣休)를 후사로 삼았다. 잠은 나라를 위해 곧은 말을 하다가 죽었다. 단지 측실에게서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갑휴(甲休), 을휴(乙休), 함휴(咸休), 우휴(羽休)이다. 딸은 곽종성(郭宗城)에게 시집갔다. 서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원휴(元休)는 진사이고, 딸은 목건중(睦建中)에게 시집갔다. 침은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 광휴는 출계하였고, 용휴(用休)는 진사이고, 삼남은 병휴(秉休)이다. 딸은 홍일휴(洪日休)에게 시집갔다. 정득주는 일찍 죽었으므로 진사인 정순희(鄭舜煕)를 후사로 삼았다. 익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맹휴(孟休)는 진사이고, 딸은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다. 권홍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주-D001] 조부는 …… 상의(尙毅)이고 : 이상(貳相)은 의정부 찬성의 이칭이다.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주-D002] 청선당(聽蟬堂) : 이지정(李志定, 1588~1650)으로, 호는 청선이다. 이하진(李夏鎭)의 백부이며 성호의 종조(從祖)이다. 글씨로 명성을 날렸고 특히 초서에 능했다.[주-D003] 태호공(太湖公) : 성호의 종조숙부인 이원진(李元鎭)의 별호이다. 《성호전집》 권67 〈종조숙부태호공행록(從祖叔父太湖公行錄)〉에 나온다.[주-D004] 조상 사석(趙相師錫)이 …… 있었는데 :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은 자가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또는 만휴(晩休)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좌의정에 이르렀다. 1666년(현종7) 당시에 예문관 검열이었다.[주-D005] 정상 치화(鄭相致和) : 정치화(鄭致和, 1609~1677)로,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내외 청요직을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1668년 좌의정을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있었다.[주-D006] 대관 …… 체직되었다 : 집의 김징(金澄, 1623~1676)이, 이하진이 헌부의 동료 관원과 상의하지 않고 앞질러 계사를 올려 물의를 빚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헌부가 이하진을 체차시켰다. 《국역 현종실록 9년 11월 15일》[주-D007] 거불이혜사(居不易兮辭) : 《육우당유고(六寓堂遺稿)》 4책에 실려 있다.[주-D008] 주사 낭청(籌司郞廳) : 비변사 낭청을 말한다. 주사는 비변사의 이칭이다.[주-D009] 김징이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 김징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모친의 수연을 빙자하여 선물 명목의 뇌물을 많이 받은 것으로 탄핵을 받았다. 김징은 황해도 배천(白川) 금곡역(金谷驛)에 도배되었다. 《국역 현종실록 11년 7월 16일》[주-D010] 사왕(嗣王) : 숙종을 말한다. 14세에 즉위하였다.[주-D011] 한 위공(韓魏公) : 송(宋)나라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영종(英宗) 때 우복야(右僕射)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영종이 즉위하고 조 태후(曹太后)가 수렴청정하고 있을 때, 정무를 의논하다가 태후가, 황제가 장성하였으니 수렴청정을 그만두었으면 한다고 하자, 한기가 급히 발〔簾〕을 떼어 버렸다. 《宋史 卷312 韓琦列傳》[주-D012] 완릉군(完陵君) …… 관원이었는데 :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은 자가 한경(漢卿), 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양자이다. 음보(蔭補)로 종부시 주부와 공조 좌랑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이르러 완릉군에 습봉(襲封)되었다. 저서로 《정수재집(靜修齋集)》이 있다.[주-D013] 정담(鄭覃) :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의 문신이다.[주-D014] 천주(薦主)를 연좌(連坐)하는 법 : 천주는 제수할 관원을 천거하는 사람을 말한다. 고신(告身)에 천거된 사유와 천거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일에 천거된 관원의 행적이 천거한 내용과 같지 않을 경우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본인은 물론 천거한 사람도 죄를 받도록 하였다.[주-D015] 사종(四種)의 설 : 《의례(儀禮)》 상복조(喪服條)의,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나오는 말로, 사종은 아무리 승중(承重)이라 할지라도 승중한 아들을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수 없는 네 가지 경우를 말한다. 첫째는 적자(適子)이기는 하나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宗廟)를 받들지 못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서손(庶孫)이 후사(後嗣)가 된 경우이며, 셋째는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이고, 넷째는 적손(適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이다.[주-D016] 복창군(福昌君) 정(楨) 형제 : 복창군 이정(李楨),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형제를 말한다.[주-D017] 대비 : 명성대비(明聖大妃, 1642~1683)를 말한다. 현종의 비로,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주-D018] 예전에 …… 있었으니 :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가 위령공(衛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만나 본 대목의 집주에 “예전에는 그 나라에 벼슬하면 그 소군을 뵙는 예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소군은 임금의 부인을 말하며 여기서는 대비를 지칭한다.[주-D019] 사간원 아장(亞長) : 사간원 사간을 말한다.[주-D020] 중비(中批) : 관직을 제수하는 데 있어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주-D021] 미수 …… 밝혔다 : 윤휴(尹鑴)가 참최복(斬衰服)을 주장한 데 대해 허목은 자최복(齊衰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記言 眉叟許先生年譜》[주-D022] 대흥산성(大興山城) : 개성부(開城府)의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중간에 있는 석축(石築) 산성으로 1676년(숙종2)에 축조되었다.[주-D023] 계해정사(癸亥靖社) : 1623년에 있었던 인조반정을 말한다.[주-D024] 비의(緋衣)를 하사받은 문관 : 비의는 붉은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든 조복(朝服)을 말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79 〈예고(禮考) 신복(臣服)〉에 “영조 20년(1744)에 전교하기를,……2품 이상은 비의, 당상관 정3품은 홍포(紅袍), 종3품 이하는 청포(靑袍), 7품 이하는 녹포(綠袍)로 하는 옛 제도를 회복하기가 어려우니, 지금의 제도로 당상관 이상은 비의, 당하관 이하는 홍포로 하여 기록하라.”라고 한 것으로 보면 당상관의 품계에 오른 문관을 지칭하는 듯하다.[주-D025] 상사(喪事)가 …… 삼고 : 1678년(숙종4) 2월에 생긴 청나라 효소황후(孝昭皇后)의 상사를 말한다. 부음을 전하기 위해 청나라 사신이 나온다는 평안도 관찰사의 계문이 그해 3월 18일에 올라왔으므로 진향사(進香使)로 바꾸어 보냈다. 《淸史稿 本紀6 聖祖》 《국역 숙종실록 4년 3월 18일》[주-D026] 왕법에 …… 준다 : 《서경》 〈순전(舜典)〉에 나온다. 생재(眚災)는 과실이나 재앙으로 인해 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주-D027] 청론(淸論)이니 …… 있었고 : 1680년(숙종6) 당시 남인(南人)도 두 파로 갈라졌는데, 세상에서 허목(許穆) 중심의 사람들은 분명한 주장을 편다고 해서 청남(淸南)이라고 불렀고, 허적(許積) 중심의 사람들은 흐릿한 주장을 편다고 해서 탁남(濁南)이라고 불렀다.[주-D028] 상소하여 : 이 상소는 《숙종실록》 6년 2월 25일 기사에 보인다.[주-D029] 누차 : 대본에는 ‘類’로 되어 있는데, 《송파집(松坡集)》 권15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이공묘갈명(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李公墓碣銘)〉에 근거하여 ‘屢’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30] 화 : 1680년(숙종6)에 남인이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인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말한다.[주-D031] 당시에 …… 투서하여 : 1679년(숙종5) 3월에 각 도(道)의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때 축성장(築城將)인 이우(李𦸲)에게 이유정(李有湞)이 투서하였다. 그 내용은 종통의 차서가 잘못되었으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손자인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을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이유정의 투서는 스승인 송시열의 예론(禮論)이 빌미가 되었다 하여 송시열은 탄핵을 받아 거제로 유배되었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33권 숙종조 고사본말》 《국역 숙종실록 5년 4월 26일》[주-D032] 이사명(李師命) : 김석주(金錫胄)의 처형의 아들이자, 누이의 사위이다.[주-D033] 석영(射影)의 독기 : 석영은 물여우〔蜮〕라는 곤충의 별칭인데,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저 사람은 도깨비도 되었다가 또 물여우도 되었구나.” 하고, 그 주에 “이 물여우가 입에 모래를 머금고 사람의 그림자에 뿜으면 그 사람에게 바로 종기(腫氣)가 생긴다.” 하였다. 전하여 사람이 흉독을 품고 남을 음해(陰害)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주-D034] 주 문공(朱文公) : 주희(朱熹)로, 문공은 주희의 시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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