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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이야기 스크랩 매양정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52 14.09.07 12: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매양정(梅陽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1동 356번지 한저마을
(원소재지 : 한양 도제동)
건 축 주 :  김난상(金鸞祥, 1507~1571)
건축시기 :  1500년대
중건시기 :  1944년
이건시기 :  11882년(고종 19)
소 유 자 :  청도김씨 문중

건축 이야기
영주의 대수해 이후에 지금 새로이 물길이 난, 산 중간이 잘라진 곳에 청도김씨의 세거지인 한저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약간 비탈진 언덕에는 김난상의 사당과 신도비각·매양정(梅陽亭)이 나란히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전에는 산 밑에 큰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매립하여 택지로 변하여 버렸다.

건축 배경
병산(?山) 김난상(金鸞祥) 선생의 정자로 옛날에는 서울의 도제동(道濟洞 : 지금의 서울역 근처)에 있었다. 김난상이 별세하고 자손들이 영남으로 이거하자 폐허가 되었다가 1882년(고종 19)에 경상북도 영주의 구수동(龜首洞)으로 이건하였다. 이곳은 오산서원(梧山書院)의 옛터이다. 1944년 봄에 선생의 후손인 김조영(金浩榮)이 노력하여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 매양정을 중건하였다.

건축 구성
정면 3칸, 측면 칸 반 규모의 소로수장집이다. 평면은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꾸민 중당협실형이고, 전면에는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둘렀다. 기단은 낮게 구축하였고, 그 위에 콘크리트로 만든 제형 초석을 세웠다.

기둥은 퇴주열만 두리기둥이고, 다른 것은 네모기둥을 세웠다. 주상은 간략한 몰익공이고, 툇칸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소로 3개씩 수장시켰다. 가구는 전퇴 5량가이다.

양 협칸 온돌방 상부에 외기도리를 짜 추녀 및 측면 서까래를 받았고, 그 위에 박공을 꾸몄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매양정은 한저마을에서 조금 골짜기로 들어가 약간 비탈진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3면에 울창한 송림과 각종의 나무들이 둘러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승지(勝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영주의 도심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자동차나 각종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서 하나의 별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판
매양정(梅陽亭)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매양정(梅陽亭)’이란 편액은 약간 해서체의 글씨이다. 가로 130㎝, 세로 50㎝ 크기이다.
매양정기(梅陽亭記)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1813∼1896)의 ‘매양정기(梅陽亭記)’는 가로 90㎝, 세로 35㎝ 크기의 현판이다.
매양정이건지략(梅陽亭移建識略)
김사진(金思鎭)이 지은 ‘매양정이건지략(梅陽亭移建識略)’은 가로 70㎝, 세로 35㎝ 크기의 현판이다.
누정 이야기
- 매양정의 내력

권연하(權璉夏)의 ?매양정기(梅陽亭記)?를 보면 이 매양정에 대한 내력을 알 수가 있다.
병산 김난상의 옛집은 본래 한양성 남쪽 도제동(道濟洞)에 있었고, 그 집에 이름을 지어 ‘매양(梅陽)’이라고 하였다. 매양이라고 이름을 지은 특별한 의미는 옛날 자취를 증거를 댈 수 없어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그 지역의 특이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뜻을 부쳤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마도 매화가 지닌 속성, 이를테면 매화의 덕이 향기롭고 지조가 정결한 까닭에 성인과 군자들이 자신의 지조와 절의를 가다듬어 고고하고 강직함을 기르는데 합치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다.
김난상은 소인들이 모여 많은 어진 선비들을 쫓아내고 죽였던 을사사화를 당하여 중학(中學)의 모임에서 강직한 기질이 우뚝하게 뛰어나 권력과 위협이 그 지조를 빼앗지 못하는 인품을 지녔는데, 멀리 남해로 귀양 가서 19년의 모진 풍상을 겪었다. 그는 만년에 흥주(興州) 병산(甁山)으로 옮겼다가 그 뒤에 후손들이 다시 지금의 영주시 한저(閒渚)로 이거하였고, 한성의 터전은 황폐해져버렸다.
김난상 시대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영주의 사림들이 구수동에 오산서원을 건립하여 선생을 제향하였으나 나라의 금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매양정이란 이름으로 복원하였다.
매양정이 자리 잡고 있는 주변을 살펴보면 산을 등지고 들을 향하여 있는데, 지금은 도시의 현대식 건물과 주택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옛날 위용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한저마을 앞으로 새로 난 물길인 서천(西川)이 흘러가고, 멀고 가깝게 서 있는 연화(蓮花)·영지(靈芝)·학가산(鶴駕山) 같은 봉우리가 정기를 보내주며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 사이에 늘어서 있다.


관련인물
- 인?과 학식이 뛰어난 김난상

병산(?山) 김난상(金鸞祥, 1507~1571)은 청도김씨(淸道金氏)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金之岱)의 12대손이다. 자는 계응(桂應), 호는 매양(梅陽) 혹은 병산(?山)이다.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도제동(道濟洞)에서 아버지 김현(金俔)과 어머니 안동전씨(安東全氏)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했다. 그 해 부친이 별세하는 비운을 맞았다.
백씨(伯氏)인 김봉상(金鳳祥)에게 글을 배웠는데, 효행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3형제가 같은 방에서 함께 공부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는 “김난상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도타왔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성력으로 다했으며, 두 형과 한집에 살면서 물건 하나라도 따로 가지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1526년(중종 21) 봉화금씨(奉化琴氏)와 결혼하였고,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1등 했는데, 퇴계 이황과 동방(同榜)이다. 1537년(중종 32)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으로 계공랑에 선임되었고, 다음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으로 윤원형의 심복인 이기를 탄핵하였으며, 기묘사화에 희생된 이들의 신원을 청하였다. 사초에는 사관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아 사관이 직필하는데 어려움을 없애고자 하였다.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 등과 함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흥의 병산에 장인인 진사 금원정의 별서(別墅)에 은거하며 퇴계 이황과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귀양갔다. 귀양지에서도 인품과 학식이 알려져 그 고장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황 또한 편지와 시와 함께 물건을 보냈으며, 진도에 귀양 가 있던 노수신에게 남해에서 나는 귤을 보내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영의정 이준경이 왕에게 성균관 직강에 소명, 1568년(선조 원년)에 직제학·성균관 대사성·공조 참의·이조 참의, 1570년(선조 3)에 절충장군을 지냈다. 1571년(선조 4)에 사간원 대사간 때 김개와 사류망담의 비를 논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교동으로 낙향하였다. 그해 12월 25일에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1828년(순조 28)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직받았다.
1834년(순조 34) 오산서원에 김난상을 봉안하여 춘추로 향사를 받들다가 1871년(고종 8) 서원이 철폐되었다. 1891년(고종 28)에 강화도 교동에 있던 묘소를 영주의 동구산으로 이장하고, 다시 1914년 현재의 구수동으로 안장하였다. 1944년에 사당과 매양정을 이건하였고, 1973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 병산선생문집(?山先生文集)

마을이야기

영주 > 시내권 > 가흥동
-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져진 가흥동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은 동쪽으로 상망·영주·휴천동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북부로는 안정면과 봉현면, 서남부는 장수면과 문수면을 접하고 있다.
가흥동은 조선시대 영천군 가흥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줄동·대사동을 병합하였고, 가흥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가흥리라 하고 영주군 영주읍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80년 영주시 승격에 따라 일부지역을 편입시켜 가흥 1·2동으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흥동은 동으로 낙동강 지류인 서천이 흐르고, 북은 서천 지류인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서남쪽은 구릉형 산지로 서천연안에 경지와 가옥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사동(한절마, 한저)은 7세기경 김억산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두지 못해 그 소원을 이루려고 삼존불상을 건립하고 큰 절을 지어 한절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삼존불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옛날 마애 삼존불상 남쪽에는 덕산 숲이 있었는데, 조선 초 영천군수 하륜이 이곳에 수재가 심한 것을 보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그 피해를 막게 했다.
또한 배고개는 조선 중종 때 구암 황효공이 서울 배고개에서 살다가 이곳에 이주하면서 전에 살던 서울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대로 배고개라 불렀다 한다.
또한 대부촌은 한절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광복 후에 집단촌으로 개척된 마을로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부촌이라 했다 한다.
나무고개 밑 도화동은 광복 후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안에 복숭아나무가 많다 하여 도화동이라 불렸다. 지난날 가흥동에는 이조판서 백암 김륵의 구학정이 있었다.
현재 가흥동에는 가흥리 암각화, 매양정, 제민루, 가흥동 5층석탑, 괴정, 소고 박승임 사당, 육우당, 산천서원, 한정의 삼락당, 성잠의 심원정, 서릿골의 인동장씨 재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가흥동은 영주시의 서쪽 관문으로, 중앙고속도로와 강변로가 뚫린 교통의 요지이다. 시민운동장, 영주직업전문학교, 가흥농공단지, 영주시의 식수인 상수도 수원지, 초중고 3개 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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