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의 묘역에서 더 구정승골로 들어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양 옆으로 한음 이덕형의 신도비와 묘역이 나온다
먼저 신도비를 탐방했다 삼거리 길에 두 줄기의 물이 합쳐져 두물머리로 내려가는 곳이기에 신도비와 사당에 접근하려면 이렇게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철로 된 구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 하천물이 꽁꽁 얼어있어 아이들이 썰매타기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러나 주변에 그리 민가가 많지 않아 인적을 보기는 힘들다
이 비는 한음 이덕형이 세상을 떠난 40년 후에 용주 조경이 짓고 우리 동복오씨 휴곡 오시복 선조가 글씨를 쓴 신도비이다
비각으로 비를 온전히 모시고 있으나 이미 비문이 오래되고 조각이 깊지 않아 맨눈으로 판독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신도비의 제도는 중국에서 진송(晉宋, 5세기초) 때 비롯되어 천자 및 제후들이 모두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지리가(地理家)의 말에 따르면 동남쪽을 신도라 하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때에는 묘 앞에 길을 트고 석주(石柱)를 세워 표하였던 것을 신도라 칭하였으나, 진송 이후 비각(碑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신도비는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 군왕보다도 더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음의 신도비각에서 다시 나와 삼거리 왼쪽으로 100여미터 이동하면 600년된 은행나무 밑에 사진과 같은 근세에 만든 행장비가 또 나온다
한음의 공적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반 공신들중에서도 월등하기에 이렇게 일반인이 이해하도록 새로운 석판에 비문과 행장 내용을 따로 기록해 많은 이에게 사표로 보이는 듯 하다
‘오성과 한음’이라는 호로 조선 시대 명콤비로 잘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 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맞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재상들이다. 특히 이덕형은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시의적절한 외교를 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이다.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유씨 부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처는 영의정 아계 이산해의 여식이며 바로 전 탐방하였던 구정승골 동고 이준경과는 이준경이 9촌 아저씨뻘로 모두 이인손의 현손이자 5대손이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영민하고 학문에 통달해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고, 1583년(선조 16) 대제학 이이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사가독서를 했다. 우리가 보통 오성과 한음이라 하여 어릴적 죽마고우와 개구쟁이 대명사로 알려진 이야기는 역사적 거짓이라 한다 오성과 한음은 과거에 급제하여 이 때 처음 만난다
율곡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7인의 당대 인물들을 추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안게 하였으니 7인 모두가 뒷날 고관대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역할을 하는 위인들이 되었다. 뒷날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鄭昌衍), 이항복, 이덕형, 병조참판에 오른 이정립(李廷立), 참찬(參贊)에 이른 오억령(吳億齡)이 그들이다. 이항복·이덕형·이정립은 동방급제로 이른바 경진(庚辰)년의 동방이어서 ‘경진3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말로는 ‘삼총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 동복오씨가와도 인연을 맺어 이후 후손들이 결혼하여 사돈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도 이 자리에 그런 인연으로 이 구정승골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재능을 인정받은 이덕형은 1591년(선조 24) 서른한 살의 나이로 대제학이 되었다. 대제학은 정승 아래의 위치이지만 선비들을 이끌고 학술과 문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자리여서 학문을 하는 관료라면 누구나 선망했다. 또한 학문과 문장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대개 노성(老成)한 이가 발탁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덕형은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제학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서른한 살의 대제학은 이덕형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덕형은 열일곱 살에 혼인을 했는데, 아내는 동인의 거두인 부제학 이산해의 둘째 딸이었다.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가 된 데에는 전하는 일화가 있다.
이덕형이 열여섯 살 되던 해, 우연히 이산해의 숙부인 토정 이지함의 눈에 띄었다. 관상을 잘 보던 이지함은 이덕형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느 집의 자손인가를 알아보고는 그 길로 이산해를 찾아갔다.
이산해는 이덕형의 집안과 인물됨을 듣고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사위로 삼기로 했다. 숙부의 안목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덕형의 집에서도 한산 이씨인 목은 이색의 집안이자 동인의 실세 이산해와 사돈을 맺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당에서 왼쪽편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산봉우리 못미쳐 묘역이 나타난다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가 되고 출사해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후였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 무렵 세자 책봉을 둘러싼 문제로 서인 정철이 실각하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정철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 사건 때 죄없는 동인들 수 백명을 가혹하게 처형한 일이 있어 이 때 정철을 보좌한 송익필과 함께 동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세자 책봉 문제로 파직되어 유배를 갔다.
이때 동인들 사이에서는 정철뿐만 아니라 서인들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이발, 이산해, 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처벌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유성룡, 김성일(金誠一), 우성전(禹性傳)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이후 강경파는 북인으로, 온건파는 남인으로 불렸다. 북인에는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의 문인이 많았으며 남인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 많았다.
이덕형의 성향은 남인 쪽에 가까웠다. 남인들은 자기들 외의 다른 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간의 시비 분별을 엄격히 하기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인 이산해가 북인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이덕형은 북인 쪽과도 교류를 해 남인과 북인을 오가게 되었는데, 갈수록 강경파인 북인의 세력이 커지자 남인 쪽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북인 영수 장인에 남인 사위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제 한음 이덕형이 왜 우리나라 역사에서 뛰어난 공적의 위인인지 알아보자
1587년(선조 20) 문장이 뛰어난 이덕형은 왜국 사신을 상대로 조선의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선위사(宣慰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래에서 왜의 사신 겐소(玄蘇) 등을 만나 회담을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이덕형은 대사헌이었다. 몇 해 전부터 일본에서 전해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지만 아무 대비 없이 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덕형은 당시 조정 대신이던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도승지 이항복 등과 의논해 어가(御駕)를 평양으로 피란시켰다.
그 후 이덕형은 밀려오는 왜군을 피해 평양성을 떠나는 왕을 정주까지 호종했다. 그리고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러 갔다.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 자국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던 명나라는 이덕형의 충심 어린 호소에 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덕형은 명나라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고, 이어 한성 판윤에 올라 접반사(接伴使)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상대했다.
선조는 이덕형의 이러한 공을 높이 평가해 1593년(선조 26)에 병조 판서, 이듬해에 이조 판서로 훈련도감의 당상에 임명했다.
왜란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로 소강 상태에 들어갔고 선조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덕형은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4도의 체찰부사 등을 맡아 전란의 뒷수습에 전력을 다했다. 그 후 또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조선은 또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왔으나 평양에서 머뭇거리며 전선으로 진격하려 들지 않았다. 명나라는 이미 조선의 반쪽을 일본에 주려는 마음을 굳힌 상태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덕형이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붙들고 호소해 그 충심 어린 설득에 양호는 군사를 움직여 서울을 방어했다. 양호는 나이가 젊고 기가 센 장수였는데, 그는 이덕형을 높이 평가했다.
선조는 이해에 이덕형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때 이덕형의 나이는 서른여덟 살에 불과했다. 서른한 살에 최연소 대제학이 된 이래 다시 최연소 정승이 된 것이었다.
몇 개월 후 좌의정이 된 이덕형은 순천으로 내려가 이순신을 도와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이덕형은 노량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동요하는 수군을 통제하고 수습에 나섰다. 이로써 장장 7년에 걸쳐 조선을 초토화시킨 전쟁이 끝났다. 탁월한 외교력으로 종횡무진 활약한 이덕형의 공이 컸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덕형은 1601년(선조 34)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4도의 체찰사를 겸해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 사건으로 운길산 밑 용진에서 칩거하다 쉰셋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우리는 현재 조선 최고의 위인으로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가 현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이순신 장군만큼 훌륭한 위인들이 몇 더 있었다 그 중 잊지 말아야 할 바로 이 한음 이덕형이 있었기에 전장이 아닌 또 다른 방면에서 조선을 지켜 200년 조선으로 마감하지 않고 500년 조선이 되게 한 것이다
애초에는 한음의 부인 이씨의 묘소만 이곳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9월에 강원도 안협(安峽)에 피란 중이던 이씨는 왜적이 접근하자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절하는 비운을 당한다. 그런 전란 중에도 정신이 똑바르던 한음은 순절한 부인의 시신을 챙겨 바로 지금의 묘소인 경기도 양근군 중은동(中隱洞)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
뒷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한음은 부인의 묘소 위에 모시고, 자신이 죽으면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은 부부가 어버이 묘소 아래에 함께 계신다.
한음의 묘소 밑에는 아들 이여규, 손자 이상건, 증손 이윤원, 그리고 후손으로 흥선대원군을 도왔던 이의익의 묘비가 있으나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장 후 납골 형태인지 가묘 형태인지 상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예전엔 이곳에 중은사라는 이름난 절이 맞은 편에 있었다는데 그 절의 말사인지 새로 조성된 절인지 조그만 절이 하나있다
우리는 석훈이 눈 수술시간에 맞추어 강남 논현역 교보빌딩에 가야 해서 더 이상의 구정승골 탐방을 하지 못하고 이내 서울로 향했다
구정승골은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과 사위인 신효창, 신효창 후손 신승연과 그 외손 이준경, 이준경과 그 일가 이덕형 그런 연고로 구정승골의 역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며 두물머리 양수리로 나왔다
[출처]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下)|작성자 moonkok711
다음백과 이성무의 재상열전-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