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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0
사도행전 7장 55-56절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으로 사도신경은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가 사흘 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고, 세 번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 그리고 네 번째가 장차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금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든 내용들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떤 유익들을 주는데, 첫 번째 그의 부활로 말미암은 유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으신 의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 그의 승천으로 말미암은 유익은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는 사실과 장차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심으로 인해 그의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것을 구하며 살 수 있게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부분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 세 번째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내용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0문과 51문입니다. 우선 50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설명합니다.
50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말은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이 그의 교회의 머리로서 거기 나타나시기 위함이며(엡1:20-23, 골1:18), 성부께서는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마28:18, 요5:22-23).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다시 말해 하늘에 오르신 부분을 살폈지만 하늘에 오르신 부분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이 내용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신 이유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 우편이란 무엇인가?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 왼쪽을 가리킬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엄밀하게는 오른쪽, 왼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귀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지만 인간처럼 표현함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하는데, 한 예로 하나님의 얼굴은 많은 부분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럼 오른손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과 31절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부활시키시고 또한 누가 높이셨는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오른손으로 높이셨다고 표현하는데, 실제 오른손으로 높인 것이 아니라 이때는 그의 권능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18편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그의 오른손의 의미가 권능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 혹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오른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영광의 자리라는 의미에서도 사용되는데, 마태복음 20장 21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왕의 오른쪽은 영광과 영예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2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의 오른쪽에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앉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왕의 오른쪽은 영광의 자리요 영예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편이란 실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우편이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의 권능과 그의 영광 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난 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과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한복음 17장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권능과 영광을 받으신 모든 것은 우선적으로 인성과 관련해서 말하고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로부터 받아야 할 만큼의 어떤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살피면서 말씀드렸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계신데, 세 위격은 본질상 동일하십니다. 따라서 속성에 있어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성부가 무한 영원 불변하시다면 성자 역시 무한 영원 불변하시고 성령 역시 무한 영원 불변하십니다.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도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위격 가운데 유일하게 성자 하나님만이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습니다(갈4:4). 높아지신 신분에 앞서 낮아지신 신분을 살폈지만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낮아지셨습니다. 물론 사람이 되심으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셨지만 참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 참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항상 나타내셨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지만(골2:9) 신성의 모든 충만을 항상 나타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육체를 취하심으로 신성이 가지고 있던 그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도 마치 숨기시듯 하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 그가 지상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낮아지셨던 그가 높아지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권능을 그의 인성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기간 내내 그의 신성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의미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으로 그의 인성이 승천 이전에는 지니지 못하셨던 영광과 권능을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인해 받으셨다는 것이고, 나아가 신성은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그가 낮아지심으로 감추어두셨던 그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그가 다스리던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권세까지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조금 전에 마태복음 28장 20절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권세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과 10절도 보시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신분을 말씀하는데, 하나님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다는 것,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높아지신 신분을 말씀하는데, 9절과 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제 그분이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5절과 56절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스데반이라는 복음 전도자가 실제로 목격한, 그것도 순교에 앞서 목격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것은 그의 복음 전함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한 것이요, 나아가 그것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통과 시련에 대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데, 거기서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증거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영이신 하나님의 영광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계시의 완성 이전 하나님은 때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스데반이 본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순교하는 스데반에게 큰 위로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스데반이 증거 하는 복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지만 그런 스데반과 함께 하시는 이가 누군가?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위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회를 위하기 위하여 그 권세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표현하지 않고 서 계시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가 얼마든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면서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다시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하늘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그 목적은 교회를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우편에 서 있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스데반을 하늘로 영접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거스틴의 설명처럼 그리스도는 재판관으로 앉아 계시지만 우리의 변호인으로 서 계시기도 하십니다. 즉 왜 서 계시는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 이하 23절도 보겠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6절 이하가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내용인데, 19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믿는 자들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요, 살리신 후 하늘에 올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자기 오른편에 앉히심으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당연히 만물은 그의 발아래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늘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데, 어떻게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의 몸이란 것입니다. 이때 머리가 만물 위에 있다면 머리와 분리할 수 없는 몸 역시 만물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머리를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머리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 몸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 된 교회는 만물 위에 있습니다. 만물 아래 있어서 만물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가운데 23절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이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는 이가 누구냐? 교회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리만으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머리는 몸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있을 때 온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몸이 없는 머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몸인 교회가 있어야지만 그리스도가 충만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충만해져야지만 만물 또한 충만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지만, 이런 점에서 누구에게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그의 몸 된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과 관련된 우리의 유익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1문입니다.
51문.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로, 그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은사들을 부어 주신다는 것이요(행2:23, 엡4:7-12), 둘째로, 그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시2:9, 110:2, 요10:27-30, 계19:11-16).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은사들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4장 7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속한 은사들을 부어 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이런 자들을 세우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에서 10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그가 위로 올라가셨다고 표현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을 말합니다.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시고, 사단과 죽음을 정복하신 후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통치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서 선물을 주시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11절과 12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즉 말씀 사역자를 세워 주의 몸 된 교회를 가르침으로 자신의 몸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도로 세워지느냐, 선지자로 세워지느냐, 복음 전하는 자로 세워지느냐, 목사와 교사로 세워지느냐에 있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것을 내놓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유익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참된 말씀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을 가지고 건물을 세우느냐가 중요하다고 알립니다. 10절부터 보시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너희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할 때 그들을 통해 증거 된 그리스도만이 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덧붙입니다. 어쨌든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는데, 무엇을 재료로 하는가? 금, 은, 보석이라는 재료가 있고, 나무, 풀, 짚이라는 재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불로 시험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어떤 재료로 가르치는가에 대한 것으로 불에 타는 가르침이 있다면 불에 타지 않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에 타는 것은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 여전히 남아 있는 그런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터 되신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라져 없어질 말씀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는 말씀의 가르침, 그것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반면 사라지는 가르침,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우지만 결국 불에 타 없어질 가르침이 나무와 풀과 짚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유익과 상관없습니다. 터 되신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가르침, 그와 일치되는 가르침, 그것이 교회의 참된 유익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모으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10편 1절과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다윗의 시편이지만 시편 110편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저들의 답을 수정하십니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22:43-45)
그러므로 ‘내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가? 2절에서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오른쪽은 그의 영광과 권능을 의미합니다.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것은 그런 영광과 권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권능의 규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권능의 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기시는 것입니다. 왜 넘기시는가? 원수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요 교회의 대적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나님의 원수와 교회의 대적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그런 그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요 교회의 대적자들을 다스리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결국 주의 몸 된 교회를 원수와 대적자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특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해하려고 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베드로전서 5장 8절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 우리의 대적이고, 그런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 권세를 잡았다고 해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해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인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 아래 들어가는 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마귀에게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내놓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의 충만이 파괴됩니다. 그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충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 마귀로부터 그의 몸 된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 되는데, 요한복음 10장 27절 이하 29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약 아버지보다 큰 자가 있다면 우리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보다 크신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원수인 마귀조차 빼앗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한번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멈추는 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처음 정한 그 뜻 그대로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이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의하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러면서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아들과 함께 다른 것을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주셨다면 주신 아들이 이룬 모든 것이 헛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받은 자로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사실과, 특별히 주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시되 그의 원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하심으로 결국 그들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며 결국 영생을 소유할 자로 있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