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7. 나는 명예나 돈을 위해 미국에 오지 않았다
1976년 초, 미국 정부의 통일교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재정에 관한 조사였으나 궁극적인 목표는 문선명이었다. 한 상원의원은 미 국세청에 공문을 보내 문선명의 재정에 대한 회계감사를 요청했다. 한 달 후, 그는 미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어 국세청 관리들을 불러 통일교의 부정을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국세청은 곧 통일교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1976년 5월까지 뉴욕에 있는 교회본부에 상주하며 조사를 했다. 도청을 하면서 24시간 끊임없이 감시했으며 2년이 넘게 사무실을 점거한 채 모든 회계 기록들을 샅샅이 뒤졌다.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 의장 도날드 프레이저(Donald Fraser)의원은 문선명이 한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불법 로비활동을 벌였다며 조사를 벌였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곧 밝혀졌다.
국세청은 2년의 조가 끝에 어떤 부정행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3년 ~ 75년까지 납세신고를 조사하면서 꼬투리를 찾아냈다. 하나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있는 160만 달러의 예금계좌였고, 다른 하나는 (주)통일의 5만 달러 상당의 주식이었다. 예금에서 발생한 이자는 11만 2천 달러였다. 그 예금은 전부 교회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국세청은 이에 대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 액수는 고작 7,300달러에 불과했으나 언론들은 이 숫자를 보도하지 않았다.
3명의 검사는 고발할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으나 뉴욕 검사실은 문선명을 기소할 수 있는 대배심을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1981년 10월 15일, 교회 재정 업무를 감독한 다케루 가미야마가 세금 탈세와 관련하여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됐다. 기소장이 작성 되었을 때 문선명은 한국에 있었다. 문선명이 한국에 계속 머문다면 미국에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탈세 혐의로 문선명을 기소한 진짜 이유는 미국에 다시 오지 못하게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문선명이 곧 미국으로 건너가자 검사들은 깜짝 놀랐다.
1981년 10월 22일, 제러드 구텔(Gerard Goettel) 판사 앞에 출석해 문선명은 짧은 진술을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 나는 무죄입니다." 진술을 마친 후 법원을 나와 청사 건너편의 폴리스퀘어광장으로 가서 수천 명의 지지자들에게 연설했다.
"나는 내 영예를 위해 미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정부의 핍박을 받는 모든 사람, 인종차별을 받는 모든 사람, 종교적 편견의 재물이 된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 미국에 왔습니다. 이것들이야말로 미국의 무서운 적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번화하고 화려한 뉴욕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 나라의 개국 조상들이 대서양을 건너 이 나라에 상륙해 맨 처음 이 땅을 하나님께 바쳤던 건국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건국정신을 잊어버리고 퇴폐풍조 속에 시들어가는 미국을 보고 눈물지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여 동안 자나깨나 나의 피와 땀, 영혼을 미국의 정신 부활을 위해 쏟아왔습니다. "
변호인들은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재판을 요청했으나 검찰은 이에 반대해 배심원 재판을 요구했다. 재판장 구텔은 판사에 의한 재판이 더 공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찰 편을 들었다. 1982년 4월 1일, 맨해튼의 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저명한 언론인 칼톤 셔우드(Carlton Sherwood)는 「종교재판:문선명 목사에 대한 핍박과 기소」에서 재판 첫날에 구텔 판사는 문선명을 히틀러, 알 카포네 등에 비유해서 변호인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재판은 6주 동안 진행됐다. 검찰은 7,000쪽에 달하는 증언 기록과 2,000쪽의 증거 문서들, 세뇌를 통해 개종하게 했다는 신문기사들을 제출했다. 문선명은 아내 한학자 총재와 함께 매일 아침 법정에 섰고, 아내는 바로 뒤 의자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았다. 문선명은 이 기간에도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워싱턴타임스」 창간을 진행했고, 미국에 사는 약 60만 명에 이르는 한국 교포들 사이에서 승공운동 조직을 만들었으며,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2천 쌍 합동 축복결혼식의 주례를 섰다.
1982년 5월 18일 배심원들은 거짓된 세금신고와 법 집행 방해 등 모든 기소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렸다. 7월 16일, 구텔 판사는 금고 18개월, 벌금 2만5천 달러를 선고했다. 그러면서도 문선명을 국외로 추방하는 것은 '과도한 처벌 '이라 판결했다. 며칠 후에 사법부 관료가 거래를 제안해 왔다. "우리는 문선명 목사가 감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어떨까요?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정부는 더 이상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 제안을 거절했으며 변호사는 즉각 항소했다. 하버드 법과대학 교수이며 저명한 헌법 전문가인 로렌스 트라이브 ( Laurence Tribe )교수는 문선명에 대한 기소와 유죄선고는 공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미국 정부가 종교자유를 묵살하자 많은 성직자들이 문선명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단체들과 법률협회 등 영향력 있는 단체들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미국 기독교협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아프리칸 감리교회, 기독교도 법률협회,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 종교 공민권을 위한 가톨릭연맹, 미국종교연구소, 사법연구센터, 명예시민훈장 수여자협회, 전미 기독교학교협회, 전국변호사협회, 흑인시장전국회의 그리고 하와이, 오리곤, 롱아일랜드 주정부 등이 문선명을 지지했다.
1983년 9월, 고등법원항소재판소의 3명의 판사들은 2:1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장 제임스 오크스(James Oakles )판사는 12쪽에 걸친 문서를 통해 유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트라이브 교수는 연방대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며 40여 개의 명망 있는 단체들과 1억 2천만 명의 회원들, 저명인사들도 탄원서를 제출했다. 나아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문선명의 유죄평결로 인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폭넓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1984년 5월 연방대법원은 재심리를 거부했다. 그 결정이 내려지자 워싱턴DC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집회'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문선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후 통일교 신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절망에 빠져 뿔뿔이 흩어질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문선명이 투옥되기 이전부터 내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상원의원 오린 해치( Orrin Hatch)는 오랜 시간 종교 자유를 수호하는 일을 해왔으며 상원 헌법소 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문선명의 평결이 있고 두 달 후 그는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미국 정부가 문선명을 감옥에 보내려는 것이 종교의 자유를 얼마나 침해하는 것인지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하여 1984년 6월 워싱턴DC의 더크슨 상원의원 빌딩에서 종교 자유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미국 전역에서 서로 다른 종단을 대표하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참석했다.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청문 회장은 300~400명의 청중들로 가득했으며 수백 명이 복도 밖에서 CCTV로 청문회를 지켜보았다. 해치 의장은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언론, 집회, 종교의 자유에 관한 조항)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성직자가 수감되는 사건은 특히 저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20세기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직자들을 철창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럽습니다.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단지 법정의 결정으로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상황이 극히 염려됩니다. 지금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문선명이 연단에 섰다.
"이 재판은 처음부터 탈세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정부가 종교의 내적인 일에 간섭한 사건이었습니다. 정부가 통일교회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통일교회라면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미국 종교계는 한 사람의 자유가 위협받는 것은 전체의 자유가 위협받는 것이요, 전체가 안전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권리를 남용하면 그 영향은 지극히 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로마제국이요, 미국 역사에도 '마녀'를 태워 죽이고, 가톨릭교도를 박해하고, 유대인을 증오하고, 흑인을 긴 세월 노예제도 속에 묶어둔 것은 미국 정부입니다. 미국은 나 레버런 문을 발견하고 표적으로 삼는 과정에서 국민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련의 권력 남용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오늘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은 누구 차례겠습니까?"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선명은 1984년 7월 20일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복무해야 했으며 2만5천 달러의 벌금을 내야 했다. 수감되기 하루 전날 미국 곳곳에서 신도들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들은 눈물을 흘렀지만 슬픔이나 패배의 눈물이 아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