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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 하늘 나라 청지기 - 4. 40일 수련과 40일 전도 1 1959년 1월, 협회 제1차 40일 수련회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서울 본부로 갔다. 정말 열심히 말씀 듣고 공부했다. 통영 식구들이 매일같이 편지를 통하여 우리 충무와 어린 식구들을 위해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내용은 큰 힘이 되었다. 10일 만에 한 번씩 치르는 네 번의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2 식구들도 나 못지않게 기뻐들 했다. 40일 수련 기간에는 많은 만나와 메추리 은사도 있었다. 말씀은 유 협회장님과 안창성 선생께서 담당해 주셨다. 틈만 있으면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격려해 주셨다. 내일의 소망과 이 민족과 세계가 나아갈 길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꿈과 같은 말씀이었다. 3 정말 뜻이 우리 세대에 이루어질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주신 말씀들이 오늘에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 책임 하지 못할 때 한국에서 수출한 원리 말씀이 역수입되어 외국인이 와서 전도하며 그들을 통하여 말씀 들을 때가 올 것이라 하시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전 세계 학자들이 통일사상을 연구하며 강대한 미국이나 일본도 앞으로 선생님의 신세를 지는 날이 조만간 오리라 하시던 말씀이 엊그제만 같다. 4 20여 년 전 수련회 때 어린 식구들을 앞에 놓으시고 예언적 말씀을 하시던 것이 오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40일 수련이 끝날 무렵 전 수련생 70여 명이 선생님과 서울 남산으로 갔다. 어디를 가시나 먼저 말씀을 내리신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말씀을 끝마치고 친히 노래도 부르셨다. 5 유 협회장님도 부르셨다. 그다음에는 누가 노래 부를 사람 없는가? 하는 선생님 말씀이 떨어지자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어린아이같이 그저 응석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래 제목은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1절을 부르고 앉으려니 2절을 부르라 하셨다. 또다시 부르라 하시어 세 번을 계속 불렀다. 선생님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였다. 이후에는 모임 때마다 선생님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6 선생님께서는 어린 것을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항상 보살펴 주시어 별로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성혼식 다음날에는 어머님께서 식구들이 있는 아랫방에 나오셔서 말씀하시고 “제일 먼 곳서 온 사람 누군가” 하시기에 통영이 제일 먼 것 같아 손을 들었다. 7 어머님께서 노래 부르라 하시기에 “비 내리는 고모령”을 다시 불렀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가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어머님을 뵙게 되니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부르지 않는다. 8 1960년 7월, 전국 일제히 제1차 하계 40일 전도가 시작되었다. 저마다의 불붙는 심정으로 자원했다. 중학생까지 지원한 통영 교회는 인도자를 비롯하여 모두 19명이 동원되었다. 식구들과 상의하여 전 식구 동원은 물론이지만 만물까지 동참한다는 뜻으로 성전 전세금 10만 환까지 몽땅 본부에 헌금하고 일제히 출발했다. 정말 어린 식구들이 자랑스럽고도 대견했다. 9 모두 동원되고 교회도 없으니 그날부터 순회를 시작했다. “가진 대로, 있는 대로, 아는 대로”라는 표어를 정하고 모두들 열심히 했다. 기쁘고 통쾌한 어린 식구들의 보고도 있었고 안타까운 보고도 들려왔다. 10 거제도에 전도 나간 여중 3학년인 박길자 학생이 반대하는 사람들의 성화에 더 이상 못 있겠다는 보고가 들어와 급히 달려갔다. 저녁에 반대하는 청년과 구경꾼들이 교회 책임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몰려왔다. 11 나는 그들에게 “이 학생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마을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민족을 위한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왔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는 결과가 된다”라고 하여도 듣지 않는다. 기성교회 목사나 교인들의 말만 믿으려 했다. 12 겨우 얻은 방에서 할 수 없이 쫓겨나 마을에서 떠나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떠난 후 마을에서 생기는 불상사에 대하여는 당신들이 책임지라” 하고 말했다. 13 이튿날 동네를 떠나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였다. 이렇게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이 험하고 외로운 길이었을까 생각했다. 가방을 들고 논둑을 걷는데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발을 멈추고 돌아서니 부인이 달려오면서 “학생이 떠나면 우리 마을 아기들은 누가 지켜 주겠는가” 하며 길을 막았다. 그러고는 “무엇 하는 분들이기에 수천 명의 군사들이 당신들의 뒤를 따르고 지켜 주느냐”라고 했다. 학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였다. 14 나중에 그 마을에 이름 모를 병이 만연하여 많은 아기들이 죽고 고생하였다는 박상진 거제 책임자(기성 가정)의 보고를 들었다. 어린 학생이지만 하늘의 사자로서 마을을 구원하기 위하여 간 사실을 미처 모르고 반대한 우매한 무리들이 받은 결과였다. 이 내용을 우리 전도 대원들에게 알렸다. 15 더욱 사기충천하여 활동하며 임지를 사수하려고 노력했다. 또 중학교 1학년 밖에 안된 윤재상군이 나간 고성군 하일면으로 순회 갔다. 동네 어귀에서 계몽 전도 나온 학생을 물어보니 모두 모른다고 했다. 남의 집 소를 몰고 풀을 뜯기는 어린 학생이 전도대원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16 점심시간에 동네 한복판에 있는 정자나무 그늘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왔다. 낯선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어린 학생이 이 마을에 나온 취지를 설명했다. 비록 어리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왔다고 했다. “나이 많은 분, 청년, 모두 이웃을 위하며 아름다운 이 강산을 잘 가꾸어 자손만대에 자랑하자”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큰 복을 주시려고 하니 모두 뜻을 저버리지 말자고 눈물로써 호소했다. 그제야 어린 학생이 집을 떠나 이 동네에 오게 된 뜻을 알고 대하는 자세들이 달라졌다. 17 어리고 못났다고 하늘이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하늘이 믿어 주는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선생님께서는 이 민족이 가야 할 길과 일과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18 새마음으로 새마을 운동이 60년 초에 벌써 시작된 것이다. 더 나아가 새사랑 운동을 실천하며 이 민족과 세계가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40일의 전도 기간도 무사히 마치고 식구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교회 전세금마저 몽땅 헌금했으니 예배드릴 마땅한 곳이 없었다. 산과 들 바닷가에서 예배드리며 재출발을 다짐했다. 19 조수임씨의 한 평 남짓한 방에 짐을 두고 이리저리 다니며 예배드리고 말씀했다. 그러나 식구들 사기는 높았다. 어리고 가난한 식구들이라 교회를 다시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 불평 없이 어서 빨리 성전을 마련하고자 열심히 기도하고 돈을 마련했다. 8만 환 짜리 전셋집을 계약했다. 20 단벌 나들이옷을 팔고, 등록금을 가져오고, 그래도 부족하여 피까지도 담보 삼고 모자라는 돈을 충당했다. 정말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모두 얼싸안고 울면서 아버지의 은사에 감사하여 서로서로 충성을 다짐했다. 21 나중에 선생님께서 이 보고를 들으시고 “하늘을 중심하고 일하고 믿고 구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신다”라고 칭찬과 축복을 주셨다. 먼저 교회보다 위치나 장소가 훨씬 좋았다. 모두 열심히 뜻에 충성하며 순종했다. 22 ‘불변의 충성자’ 되겠다고 다짐하며 따르던 식구들 가운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영계에 간 분도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식구의 집이 아무리 멀고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라 하더라도 선생님께서 하사해 주신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했다. 23 됫박쌀장사를 하시는 이강부씨의 모친인 정정애 집사님의 정성 어린 저녁 싸래기 죽과 아침밥은 잊을 수가 없다. 어린 학생들이 밥 먹듯이 굶는 인도자를 보다 못해 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교회다 두고 가면 그것을 눈물로 먹던 일들이 수없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24 인도자를 잘 모셔 보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한 식구가 새벽 기도하러 오는 길에 두 번씩이나 헌금하여 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는 기뻐하던 그 순진한 얼굴도 잊을 수 없다. |
金鳳哲 - 天の国の召使 4 - 四十日修練会と四十日伝道 一九五九年一月、協会第一回四十日修練会に参加せよ、という通報を受け、ソウル本部へ行った。本当に熱心にみ言を聞いて学んだ。統営の食口たちが毎日のように手紙を通して、忠武と幼い食口たちのために、また神のみ旨のために熱心に学んでくることを切に願う内容を見ると大きな力となった。十日に一回ずつ受ける四回の試験にも合格した。 食口たちも私に劣らず喜んだ。四十日修練期間には、多くのマナとうずらの恵みもあった。み言は劉協会長と安昌成先生が担当してくださった。機会さえあれば、文先生が出て来られて激励してくださった。明日の希望とこの民族と世界が進む道に対するみ言をくださった。夢のようなみ言であった。 本当にみ旨が我々の世代に成されるだろうか? 半信半疑ながらも、否定したくなかった。その時下さったみ言が、今日、一つ一つ成されていっている。我々がそのまま責任を果たし得ない時、韓国から輸出した原理のみ言が逆輸入され、外国人が来て伝道し、彼らを通してみ言を聞く時が来るだろうと言われたみ言がそのとおりになった。全世界の学者たちが統一思想を研究し、強大なアメリカや日本も、将来、先生の世話になる日が遅かれ早かれ来るだろうと言われたみ言が数日前のようである。 二十余年前の修練会の時、幼い食口たちを前に、予言的なみ言を語られたことが今日に成されるのである。 四十日修練が終わる頃、全修練生七十余名が、先生とソウルの南山へ行った。どこに行かれても、まずみ言を下さる。暖かい日差しを受けて、み言を終えて親しく歌も歌われた。劉協会長も歌われた。次に誰か歌を歌う者はいないか? と言う先生のみ言が放たれるや、私はパッと手を挙げた。どこから出てきた勇気であったのか分からなかった。 子供のようにただ甘えたい心情であった。歌の題目は、「雨降るコモリョン」であった。一節を歌って座ろうとすると、二節を歌えと言われた。更にまた歌えと言われて三節を続けざまに歌った。先生の前で初めて歌う歌であった。後には、集まりの度に先生の前で歌を歌うことのできる栄光をもつようになった。 先生は幼い者を愛によってかばわれ、いつも見守ってくださり、別に困難なく送ることができた。先生の御聖婚式の次の日には、お母さまが食口たちのいる下の部屋に降りてこられて話され、「一番遠い所から来た人は誰ですか」と言われたので、統営が一番遠いようだったので手を挙げた。お母さまは歌を歌いなさいと言われたので、「雨降るコモリョン」をまた歌った。“母さまの手をおいて振り向くときに”と歌詞を思いながら、今日お母さまにお会いできたのだから、二度とこの歌を歌うまいと言った。その時以後、今まで歌っていない。 一九六〇年七月、全国一斉に、夏季四十日伝道が始まった。各々の燃えつく心情で自ら願った。中学生まで支援した統営教会は、伝道者をはじめとしてすべて十九名が動員された。食口たちと相談して、全食口の動員はいうまでもないが、万物まで同参するという意図で、聖殿の借家金十万ウォンまですっかり本部に献金して一斉に出発した。本当に幼い食口たちが誇らしくも満足であった。 すべて動員され、教会もなかったので、その日から巡回を始めた。「持つままに、あるままに、知るままに」という標語を定め、すべてを熱心に行った。嬉しくも痛快な幼い食口たちの報告もあったし、ハラハラする報告もあった。 巨済島へ伝道に行った女子中学三年の朴吉子という学生が、反対する人たちの「成和」にもうこれ以上いられないという報告が入ってきたので、急遽、すっ飛んで行った。夕方、反対する青年と見物人たちが、教会の責任者が来たという言葉を聞いて集って来た。私は、彼らに「この学生は神の名によって、この村と皆さんに神のみ旨を伝え、民族のための救国の理念を持ってきた」と説得した。しかし、どうしようもなかった。「統一教会に反対するのは、すなわち、神の仕事に反対する結果になる」と言っても聞き入れない。既成教会の牧師や信者たちの言葉だけを信じようとした。 辛うじて得た部屋で、仕方なく追い出され、村から去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かし、「我々の去った後、村で生じる不詳事に対しては、あなたがたが責任を負え」と言った。 二日目、村を去る足は重いだけであった。このように先生が歩んで来られた道が厳しく寂しい道であったのかと思った。カバンを抱えて畔道を歩いていると、後ろから、我々を呼ぶ声に足を止めて振り返って見ると、婦人が駆けつけて来ながら、「学生が去れば、村の子供たちは誰が守ってくれるのか」と言って道を遮ぎった。それから、「何をする人だからと、数千名の軍隊が、皆さん方の後について見守ってくれるのか」と言った。学生はどういう訳か分からず面食らった。 その後、村に名前の分からない病気が蔓延して多くの子供たちが死に、苦労したと朴相鎮という巨済の責任者(既成家庭)の報告を聞いた。幼い学生であるが、天の使者として村を救うために行った事実を、そこまでは考えず反対した愚かな群れが受けた結果であった。この内容は我々伝道隊員たちに分かった。更に士気がついて活動し、任地を死守しようと努力した。また、中学一年にしかならなかったは尹在棚君が行った固城郡の下一面を巡回した。村の入口で、啓蒙伝道に来た学生のことを聞いてみると、すべて知らないと言った。他人の家の牛を追いやって、草を食ませる学生が伝道隊員であると誰が分かっただろうか。 昼食の時間に、村の真ん中にある大樹の木陰の下に、人びとが集まって来た。見慣れない人をじろじろ見つめながら、休みをとった。しばらくして、幼い学生がこの村に来た趣旨を説明した。「たとえ幼く不足であっても、神の名によって隣人と国のために、する心から来た」、「年を取った方、青年、すべて隣人のために、美しいこの江山をよく育てて子孫万代に誇ろう」と言った。神はこの民族に大きな福を与えようとされるのだから、背かないようにしようと涙をもって訴えた。それでやっと、幼い学生が家を去ってこの村に来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知って、対する姿勢が異なるようになった。 幼く愚かだからといって、天が用い得ないのではない。その中心がどこにあるのかというのが問題であると考えながら、更に天が信じてくれる自身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誓った。既に先生は、この民族の行くべき道と仕事と手本を見せてくださったのである。 新しい心で新しい運動が、六〇年の初めに、既に始まったのである。更に、新しい愛の運動を実践し、この民族と世界の生きることのできる道を教えてくださったのである。四十日の伝道期間も無事に終え、食口たちが健康な姿で帰って来た。しかし、教会の家賃まですっかり献金したので、礼拝をもつ適当な所がなかった。山と野原、海辺で礼拝をもって再出発を誓った。 趙秀任氏の一坪余りの部屋に荷物を置いて、あちこち通って礼拝をもってはみ言を語った。しかし、食口たちの士気は高かった。 幼く貧しい食口たちで、教会を再び準備する能力はなかった。しかしながら、すべて不平なく、さあ早く聖殿を備えようと熱心に祈ってはお金を作った。家賃八万ウォンの家を契約した。一張羅の外出着を売り、登録金を持ってきたり、それでも不足だといって血まで売って、不足金に充てた。ほんとうに涙の出るほど感激に満ちた日であった。皆が泣きながら抱き合い、父の恵みに感謝し、互いに忠誠を誓い合った。 後に、先生がこの報告を聞かれて、「天を中心として働き、信じ、救う者にもっと大きな福を下さる」と称賛と祝福を下さった。まず、教会よりも位置と場所がはるかによかった。すべて熱心にみ旨に忠誠を尽くし、従順であった。 「不変の忠誠者」になろうと誓い、ついて来た食口たちの中に、み旨が成されるのを見ずに、先きに霊界へ行った方もあって、あまりにも不憫であった。 食口の家があまりにも遠くて訪ねづらい所であるとしても、先生から賜った自転車に乗って訪問した。 米屋を営む李康夫氏の母親の鄭貞愛執事の精誠のこもった夕べの米粥と朝御飯は忘れられない。幼い学生たちが御飯を食べるように、飢えた伝道師を見るに見かねて、家で作ってくれる弁当を教会に置いていけば、それを涙を流しながら食べたことが、数少なく、走馬燈のように過ぎ去る。伝道者を大事にしようとする心はあるが、経済的な余裕をもたない食口が早朝祈祷のために来る途中、二度ばかり献金して、私に食べ物をもてなしてくれて喜んだ、その純真な顔も忘れらない。 「歴史は怠け者のためにとどまってくれない」というみ言のように、我々すべてが後悔のない人生を送りたい。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