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십육칙(十六則)
종성칠조(鐘聲七條) 종소리에 칠조 가사를 입는다.
본칙(本則) 역(譯)
운문이 말했다. 세계가 이렇게 드넓은데, 어째서 종소리가 울리면 칠조 가사를 입는가? 雲門曰, 世界恁麼廣闊, 因甚向鐘聲裏披七條.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무릇 참선하여 도를 배움에는 소리를 따르고 색을 쫓는 것을 삼가야 한다. 비록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아 마음을 밝히더라도 그것은 예삿일이니, 납승의 집안에서는 소리를 올라타고 색을 뒤덮어 하나하나에 밝고 하는 일마다 묘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한번 말해 보라. 소리가 귓가에 오는 것인가, 귀가 소리 곁으로 가는 것인가? 설사 소리와 고요함 둘 다 잊을지라도 이에 이르러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만약 귀로 듣는다면 알기 어렵고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가까우리라.
無門曰大凡參禪學道, 切忌隨聲逐色. 縱使聞聲悟道, 見色明心, 也是尋常, 殊不知衲僧家, 騎聲蓋色, 頭頭上明, 著著上妙. 然雖如是, 且道, 聲來耳畔, 耳往聲邊. 直饒響寂雙忘, 到此如何話會. 若將耳聽應難會, 眼處聞聲方始親.
송(頌) 역(譯)
게송으로 읊다. 알면 곧 매사가 한 집안이요, 알지 못하면 천차만별이로다. 알지 못하면 매사가 한 집안이요, 알면 곧 천차만별이로다 . 頌曰會則事同一家, 不會萬別千差. 不會事同一家, 會則萬別千差.
사족(蛇足)
앞장 공안화두(公案話頭)에서도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나왔는데 십육칙(十六則)에서도 나온다. 사찰에서 종소리나 북소리는 법당(法堂)에서 예불(禮佛)을 올릴 때나 법문(法門)을 할 때 종을 쳐서 대중을 운집(雲集)한다. 종성칠조(鐘聲七條)는 종소리가 낫는데 왜? 칠조(七條) 가사(袈裟)냐? 이다. 가사(袈裟)는 삼의(三衣) 세 종류 옷이 있다. 오조(五條), 칠조(七條), 구조가사(九條袈裟)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스님들이 오조와 칠조는 낮에 생활할 때 잠잘 때 입고, 구조(九條)는 탁발걸식(托鉢乞食) 나갈 때나 부처님 법문(法門)을 들을 때 입었다. 가사에 조(條)는 밭두렁을 모방한 것이다. 그래서 가사는 복전의(福田衣)라고 한다. 전지(田地)에서 곡식(穀食)이 열매를 맺고 나듯이 불자(佛子) 승단(僧團)에 시주(施主)하고 복(福)을 짓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스님들은 설법도생(說法度生)이 불자들에게 시은(施恩)에 보답(報答)하는 뜻이 있다. 운문선사가 하루는 대중을 모아 놓고 세계는 이렇게 광활한데 무엇 때문에, 종소리가 나면 칠조가사(七條袈裟)를, 입느냐? 고 묻고 있다. 법당에 모인 대중들에게 뭣 때문에 여기에 모였느냐? 고 심각한 물음을 제기한다. 운문선사는 간단명료(簡單明瞭)한 선문답(禪問答)으로 유명한 선사다. 일자(一字) 선문답(禪問答)이 많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한자(一字)로 답(答)을 한다. 응축농축(凝縮濃縮) 선문답(禪問答)이라 일자관(一字關)이라고도 한다. 종성칠조(鐘聲七條)는 종소리에 왜? 칠조가사(七條袈裟)를 입고 이 법당(法堂)에 모였느냐? 고 대중을 향에 사자후(獅子吼)를 날리고 있다. 선문선가(禪門禪家)에서는 이런 선문답(禪問答)을 향상구(向上句) 법문(法門)이라고 한다. 일상(日常)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하게, 하는 법문(法門)이다. 밥때가 되어서 밥 먹는데 왜? 밥 먹느냐고? 묻는 말과 같다. 뭣 때문에, 밥 먹고 똥 싸느냐? 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다. 간단한 질문이지만 생존의 근본문제를 본질문제(本質問題)를 문제제기(問題提起)하고 있는 서슬이 시퍼런 날카로운 질문이다. 타성(他姓)에 젖어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에 속아 살지 말라는 법문이다. 혜개선사 본칙도 평창도 송구도 다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자기내면(自己內面)을 보라고 꾸짖는 말이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운문선사 종성칠조 공안 화는 타성에 젖은 대중에게 사자후 법문일세! 스스로 마음의 용광로로 반조하라 함은, 운문선사의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심일세! 鐘聲七條雲門話 他姓大衆獅子吼 返照自心鎔鑛爐 慈悲度生雲門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