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0
로마서 9장 17-18절 [3장 7-8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3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 것에 대하여 작정하시되,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하여 예정하셨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에 대해서는 영생으로 예정하셨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에 대해서는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중예정인데, 5항과 6항은 전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먼저 5항은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그들 중 어떤 자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견인의 어떤 미리 봄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를 어디로 움직이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단순한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6항은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면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어 모든 방편들까지 예정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되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게 되는데, 모두가 동일한 때에 구속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적합한 때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때에 역사하시는 그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하게 되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 받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서정, 혹은 칼빈이 표현한 것처럼 긍휼의 순서입니다. 이런 구원의 서정, 긍휼의 순서는 오직 택자 외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7항 유기와 8항 예정교리의 신중한 사용과 유익에 대한 것인데, 우선 7항 유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확장하거나 중단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의논을 따라, [그리고] 그의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해 나머지 인류를 간과하시고, 그들을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의 찬양을 위해 그들의 죄 때문에 불명예와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시기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마11:25,26, 롬9:17,18,21,22, 딤후2:19,20, 유1:4, 벧전2:8).
우리의 고백인 이중예정과 달리 선택만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단일예정이라고 하는데(R. C. 스프로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참고), 이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몇몇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만 믿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몇몇을 구원하기로 정하셨다면 결국 몇몇은 구원 받지 못하도록 정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구원으로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조차 적절하게 반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유기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이중예정을 말합니다. 우선 로마서 9장 13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특히 11절에서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한 때입니다. 선과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택하심을 따라, 다시 말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이 행위가 아닌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중예정이 불의한 것 아니냐란 소리를 하지만, 이어지는 14절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인 로마서 9장 17절과 18절도 보시면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특히 18절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17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완악하게 하신 자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바로 스스로는 완악하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완악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이라는 부분에서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선택된 그들이 아담 안에서 타락한다는 게 있었습니다. 선택된 자들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는가? 우리가 신앙고백서의 이후 내용도 살펴보겠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됩니다. 인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죄를 죄로 벌하시기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런 부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시되, 그들이 하기 싫은데 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원하는 바를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마치 죄의 저자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를 죄로 벌하시는 시간의 역사 안에서만 적극적으로 유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것과 동일하게 유기하십니다. 그것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것이 로마서 9장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귀히 쓸 그릇으로,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의 역사 속에서 천히 쓸 그릇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2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진노를 보이신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함으로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가서야 분명히 보이실 일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도 보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선택과 동일하게 유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것처럼(5항),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확장하거나 중단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의논을 따라, 그리고 그의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해 나머지 인류를 간과하십니다(7항). 선택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유기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택도 하나님의 의지이고, 유기도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가 다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에 따라 그렇게 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선택과 관련해서는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유기와 관련해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의논을 따라, 그리고 그의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이유, 유기의 이유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답을 가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 답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함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정요석 교수는 피조물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초합리적이고 초상식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우리는 예정교리의 이런 부분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는 말씀 외에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를 보면 간과하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런 표현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역사하시고 유기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프로울 교수는 신앙고백서가 이중 예정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분명하게 거부한다고 말합니다. 즉 선택과 유기 둘 다 적극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선택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지만 유기에 있어서는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택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말미암아 택자들을 보존하신다. 그러나 유기자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유기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악을 창조하시거나 그 영혼에 불신앙을 작동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간과하신다는 것이 유기의 적극성이 아닌 소극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택과 마찬가지로 유기 역시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의지를 굳이 적극, 소극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유기자에 대하여 간과하신다, 내버려두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의지가 있다면 그런 의지에 대하여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는 말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과하신다는 표현과 관련해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유기하기로 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런 방식을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항상 간과하시기만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도 하십니다(롬9:18). 분명한 것은 간과하시든, 아니면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든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고백서를 보면 지금 신앙고백서는 유기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확정하거나 중단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의논을 따라, 그리고 그의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하여 나머지 인류를 간과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하신다는 작정의 내용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들 가운데 택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 다시 말해 유기자의 경우는 그런 구속 자체가 없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겁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죄만을 낳게 됩니다. 죄 외에는 결과 되는 게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1장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우선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소위 일반계시의 충분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어지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롬1:23).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4절과 25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자로 있게 하셨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결과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버려두셨다는 말은 단순히 소극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죄를 죄로 벌하십니다. 이런 내용은 로마서 1장 26절, 28절에서도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질서가 파괴되자 하나님은 간과하심으로 인간 사이의 질서 또한 파괴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시는데, 분명 간과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죄를 죄로 벌하십니다.
그럼 택자 외에 나머지 인류를 간과하신다고 할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앙고백서는 그들을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의 찬양을 위해 그들의 죄 때문에 불명예와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시기를 기쁘게 여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궁극적으로는 3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그 영광의 구체성과 관련해 택하신 자에 대해서는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 선택하셨다면, 유기자에 대해서는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의 찬양을 위해’ 간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하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고, 유기하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벌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유기된 자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그들이 유기된 자로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의 승인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실 때 택자와 유기자를 정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사망으로 정하시면서 창조와 타락, 그리고 택자에 대하여 구원으로 정하셨지만, 타락을 작정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저자나 승인자는 아닙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죄의 저자나 승인자가 되지 않는 분으로서 죄를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죄는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전도서 7장 29절을 통해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결국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증거 하는 것처럼 분명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아 불순종한 사람이 원인으로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들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정죄를 받는 것이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지만, 작정하신 하나님은 죄의 저자나 승인자는 아니십니다.
더불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유일한 예외라면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에만 있습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심으로 아담의 죄를 전가 받지 않고, 죄가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모든 인류가 타락했다는 것이 중요한데,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에 어떤 자들에 대하여는 선택하시고 또 어떤 자들에 대하여는 유기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택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고, 유기자에 대하여는 그들을 간과하심으로 그들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구원의 은혜를, 후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참고로 택자에게 구원의 서정이 있듯이 유기자에게도 유기자로서의 서정이 있는데, 윌리엄 퍼킨스라는 사람의 황금사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택자만이 아니라 유기자에 대한 서정이 있는데, 크게는 비유효적 소명과 소명 없는 것으로 나눠집니다. 소명이 없는 자들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것은 무지와 정신의 헛됨, 맹목과 마음의 강퍅함, 상실된 감각, 죄 가운데의 탐심으로 늘 오염된 것만을 내놓게 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비유효적 소명, 다시 말해 소명은 있는데 효력이 없는 자들은 부르심 자체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르심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회개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시적으로 믿음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늘의 은사를 맛보기도 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도 합니다(히6:4-5). 때로는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적 거룩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효력 있는 부르심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타락하게 되는데, 죄의 미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강퍅한 마음은 악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데, 결국 불신앙으로, 배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오염된 것을 내놓게 됨으로 그들 역시 소명 자체가 없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죄를 받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나오는 네 가지 밭에 대한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열매 맺는 자 외에는 다 유기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특별히 말씀이 들렸다는 점에서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부르심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효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로 있습니다(마13:22). 또한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마13:20). 그러나 그 속에 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집니다(마13:21).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마13:22). 물론 교훈적으로는 택자임에도 불구하고 유기자와 같은 모습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기로 정하지 않으셨다면, 다시 말해 택자로 정하셨다면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이 헛되이 나타나지 않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런 점에서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며, 결국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이르도록 보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자에게는 이런 일이 결코 없습니다.
이런 예정교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신비롭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8항에서는 특별히 신중함과 주의로 다뤄져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신비롭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중함과 주의로 다뤄져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8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정의 이 높은 신비의 교리는 특별한 신중함과 주의로 다뤄져야 합니다(롬9:20, 11:33, 신29:29). 그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며 그것에 대해 순종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유효적 소명의 확실성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선택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벧후1:10). 그러므로 이 교리는 복음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찬양과 경외와 존중(엡1:6, 롬11:33) 및 겸손과 성실과 풍성한 위로를 제공할 것입니다(롬11:5,6,20, 벧후1:10, 롬8:33, 눅10:20).
이 부분은 김병훈 교수님의 글을 참고하면서 말씀을 드리겠는데(http://repress.kr/19690/), 일단 예정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작정을 하시고 작정하신 바를 그대로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수요 절정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분명하고 높고 깊은 수준에서 고백하고 찬미하는 교리가 바로 예정교리입니다.
앞서 로마서 9장에 있는 구절들은 말했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 그리고 예정의 구원에 대한 심오한 신학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는 먼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롬9:8).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롬9:15), 이러한 선택과 관련하여 하나님에게는 어떤 불의도 없음을 선포합니다(롬9:14). 그리고 그 유명한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를 들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 허물하거나 그 뜻을 대적할 수가 없음을 밝힙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한 교훈을 이어가면서 바울은 마침내 절정의 찬미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사람은 부패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도 못하며 인정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이해하려 합니다.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중생의 은혜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사실에 눈을 떠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높고 높으신 영광의 위엄과 사람의 낮고 낮은 비참한 처지를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때에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신분을 누리게 되며 의와 진리로 거룩하고 순결한 상태를 누리게 됨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야 참 신자는 겸손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선하심과 지혜에 대해 점차 깨닫고 알아가며 찬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정교리는 사람이 호기심에서 헛되게 자신의 이성과 경험 안에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바대로 믿어야 할 교훈입니다. 당연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정교리를 어떻게 받으며 가르칠 것인가와 관련하여 신명기의 말씀은 적절한 교훈을 줍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분명 예정의 교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감추어진 일로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일로만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나타난 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정교리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줄 알고 주의함으로 배워가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앙고백서는 예정의 이 높은 신비의 교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특별한 신중함과 주의로 다뤄져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높은 신비의 교리이기 때문에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신중하고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기록된 이 말씀 외에 더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하지만 예언된 말씀을 제하여 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요하고 있습니다(계22:18-19). 그러므로 소위 목회적 입장에서 예정교리는 가르치는 것보다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예정교리는 참된 신자에게만 유익을 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이성의 한계와 그런 한계 속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여 오해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는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며 그것에 대해 순종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유효적 소명의 확실성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선택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정교리의 유익은 반드시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자가 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자가 되기 전 예정교리에 대한 내용을 듣고 “내가 선택을 받았구나!”해서 믿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복음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유효적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으로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며 그것에 대한 순종을 드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정교리가 전해지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선택의 결과로 그리스도가 주어지고, 선택의 결과로 유효적 소명이 있고, 선택의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서정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신자 자신의 의지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간섭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정교리의 유익은 무엇인가? 참된 신자에게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것이요, 그 선택은 불변하기 때문에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지도 않고, 그것에 대한 순종을 드리지도 않는데도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늘 책망 밖에 없습니다. 이런 책망 속에서 어떻게 선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참된 신자라 할지라도 순종보다는 불순종의 모습이 많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그런 불순종과 책망 가운데서도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 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에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에게 선택의 확신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완벽해야지만 선택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구원의 서정의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이 선택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교훈하는 것처럼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벧후1:10). 우리가 실족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흔들림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늘 우리의 점과 흠이 있을 뿐입니다. 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과 흠, 우리의 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자들, 다시 말해 복음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우리를 선택하시되 그 선택이 불변하여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경외하게 되고, 또한 존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되고, 더욱 주의 말씀 앞에서 성실하게 되며, 그 말씀 안에서 풍성한 위로를 제공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위로 가운데 한 부분이 로마서 8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0절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반드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겁니다. 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자리에 앉히십니다. 그래서 33절과 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런 선택의 확신이 참된 신자의 유익이라고 할 때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직무유기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욱 잘 드러내는 이 예정교리를 통해 선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되 신중함과 주의함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배워 하나님만 높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한 자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