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문화사(21)-단양(丹陽)
한강 상류 지역이면서 백두대간의 소백산 구간을 품고 있는 충북 단양군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했던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땅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처음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가 남진하면서는 그 땅이 되었다가 신라가 북진할 때는 다시 신라의 땅이 되었다. 특히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출전했던 온달(溫達) 장군이 단양에서 전사한 일은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온달의 죽음으로 단양 지역을 한층 굳건하게 장악한 신라는 거침없이 북으로 올라가면서 한강 하류 지역까지 단숨에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지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든 신라는 이를 통해 한반도의 주인이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으니 단양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단양’의 땅이름은 고구려의 것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이두로 된 우리말 지명이 없고 한자로 된 것만 존재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초기부터 고구려가 차지했던 지역은 이두로 표기된 땅이름이 상당수 남아 있는데, 단양 지역은 고구려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된 이두 지명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 시대의 땅이름은 남아 있지 않고 고구려 때의 한자 지명만 있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가 남진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 백제의 연합, 신라의 북진이 맞물리면서 세 나라의 중간에 있는 곳임과 동시에 서해로 직접 연결되는 한강을 안고 있는 단양 지역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라는 두 영웅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다. 백제를 남쪽으로 패퇴시키고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점차 백두대간을 넘어 낙동강 유역인 경상북도 선산, 구미 부근까지 진출했다. 6세기 무렵에 이르면 신라의 북진에 밀린 고구려가 소백산을 넘겨주고 단양의 한강 이북으로 후퇴하여 남한강을 경계로 대치한다. 이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고 출전했던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한 사건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지명이면서도 이두로 표기된 땅이름이 없는 점으로 보아 4, 5세기 무렵에 지명을 붙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단양의 고구려 지명은 적산(赤山), 혹은 적성(赤城)이라고 했다. ‘山(뫼 산)’과 ‘城(재 성)’은 ‘州(고을 주)’, ‘川(내 천)’ 등과 같은 용도로 쓰여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글자만 다를 뿐 뜻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赤(붉을 적)’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면 단양이라는 지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赤’의 초기 글자는 ‘大’가 위에 있고 ‘火’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大’는 ‘크다’를 기본 뜻으로 하는 글자로 사람의 모양을 본뜬 것인데, 비교가 되는 대상보다 뛰어남, 정도가 매우 심함, 맹렬함 등의 상태나 상황을 나타낸다. 이 글자는 사람의 모양이라는 점에서는 상형자(象形字)로 보지만 실제 쓰임에서는 추상적인 것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지사자(指事字)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火’는 불꽃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로 ‘불’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면서 열, 밝음, 빛 등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大’와 ‘火’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회의자(會意字)인 ‘赤’은 불이 맹렬하게 타오른다는 것으로 되면서 ‘붉은색’이라는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되었다. 한(漢) 나라 시대에 해서(楷書)가 표준체로 정착되면서 글자의 형태가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한나라 시대에는 음양오행설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문화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赤’을 불에 해당한다고 보아 남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기도 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고구려 초기에는 색(色), 방위, 하늘, 땅 등 세상을 보고 분석하는 우주관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를 거쳐 5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음양오행설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이런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데다가 지명에도 그런 현상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단양의 지명에 ‘赤’이 쓰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보았을 때 단양 지역은 한강 유역에 있으면서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면서 나라의 가장 남쪽에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여기에 적합한 글자로는 ‘赤’이라고 보아 그것을 넣은 땅이름을 정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시기가 6세기 중반(545~550년) 무렵이었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진흥왕이 세운 적성비(赤城碑)가 지금도 단양에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지명이었던 ‘적성’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신라 쪽에서 보면 영토의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도 그 땅이름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정신은 신라 시대 내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덕왕 시대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꿀 때도 적성이라는 지명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도 지명의 뜻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앞의 글자만 바꾸어서 지금의 땅이름인 ‘단양’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단산(丹山)’으로 바꾸었는데, 후기에 이르면 충숙왕(忠肅王) 5년(1318년)에 단양으로 변경한 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丹(붉은 단)’이므로 ‘단산’, 혹은 ‘단양’이란 지명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글자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함을 짐작할 수 있다.
추상적인 것으로 물리적인 형체는 없으나 사람의 삶 속에서 말이나 글자 등의 표현 수단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인 지사자(指事字)에 속하는 ‘丹’은 ‘붉은색을 가진 점토 광물질인 주사(朱砂)’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 ‘주사’는 그림물감, 안료, 의약품 등의 재료로 쓰였고, 도교(道敎)에서는 연금술의 약재로도 사용되었다. ‘주사’는 붉은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붉다’라는 의미가 파생되기도 했는데, 오행(五行) 사상이 성행하면서 남쪽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임이 더욱 넓어졌다. 남쪽이라는 방위를 지칭하게 되면서 지명으로도 쓰일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남쪽 변경을 나타내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단요(丹徼), 남요(南徼) 등의 표현이 남쪽의 국경이나 변방을 지칭하는 이유가 바로 ‘丹’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만들어낸 ‘남방’이라는 뜻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에 단양의 지명에 사용된 ‘赤’과 고려 이후에 쓰인 ‘丹’은 같은 용도로 쓰인 것이 되어 ‘남쪽의 변방, 혹은 경계’라는 뜻이 된다.
‘陽(볕 양)’은 남쪽을 향한 높은 언덕에 태양이 잘 비추어서 밝고 따뜻하다는 뜻을 기본으로 하는 글자이다. 지구의 북반부에 자리하고 있는 동아시아에는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물이 있는 지형이 많은데, 이런 공간에 해가 잘 비취므로 이 글자는 강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는 높고 평평한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한양(漢陽)이라고 했는데, 이때의 ‘陽’은 한강의 북쪽이며 삼각산, 혹은 북한산의 남쪽에 있는 공간이면서 높고 평평하며 해가 잘 드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 글자가 들어가는 다른 곳의 지명도 대개 이와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된다.
‘단양’의 ‘陽’ 역시 마찬가지인데, 남한강의 북쪽 지역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에는 국가의 사무를 보는 관청은 남한강의 북쪽 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까지는 남한강의 남쪽 면에 관아가 있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행정 관청이 다시 남한강의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어쩌면 돌고 도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댓글
내륙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들이 많이 있는데
제주를 찾아주시는 여행객들이 고맙습니다.
저는 군 생활 3년을 제외하고 나들이를 못하여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