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천추의 한이 된 남북 분단이 현실이 되었다. 우리 교단도 분단의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말엽에 비상시국으로 우리 교단 총회가 모이지 못하다가 6년 만에 불가불 남한만의 총회가 열렸다. 2월에 칠산교회에서 열린 교단재건회의를 기초로 남한 제1회 동아기독교 총회가 1946년 9월 14일 오전 10시부터 20일 오전 10시까지 충남 강경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임시의장 노재천 목사의 사회로 개회가 선언되었다. 이 총회에는 6개 구역(예천, 포항, 울도, 예산, 공주, 강경)이 참석했고, 울진구역은 불참했다. 29명의 회원과 다수의 방청인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총회는 중요한 안건을 많이 다루었다. 그 가운데 7개월 전에 교단재건회의에서 의결되었던 사안도 인준했다. 총회 기간 내내 교단혁신을 주장하는 여론과 보수를 주장하는 세력이 서로 만만치 않았다. 이 회의를 원만히 이끌고 간 사람은 이종덕 목사였다. 이목사는 우리 교단 제2대 감목으로 10년간 교단을 치리한 분이다. 그는 일제 말 일경(日警)에 박해를 받아 오다가 만주로 망명길에 올라 만주기독교 5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동아기독교) 연합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동안 타 교단의 체제와 운영에 대하여 연구한 이목사는 이 총회에 혁신 측 여론을 수용하는 한편, 서울의 교단합동 여론을 잠재우고 교단 자체 내에서 혁신할 것을 종용했다.
특별히 이번 총회에서는 김용해 회원의 제안 동의로 감독체제를 회중체제로 변경하고, 대화회를 총회로 바꾸고, 총회를 대행할 기구로 상의회(相議會)를 두기로 결정했다. 임원에는 총회장 이종덕 목사, 부총회장 노재천 목사, 서기 김용해 목사가 선정되었고, 상의회는 장석천, 박기양, 신성균 제 목사로 구성되었다.
또한 임원 및 평신도 직분자의 명칭도 변경했다. 감로는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 반장은 집사로 변경하고 여신도에게도 직분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밖에 목회자 파송제를 각 교회의 청빙제로 하고 임기는 1년으로 하되 계속 유임할 때는 구역장의 허가를 받기로 했다. 각 구역에서 피택된 15명의 장로와 2명의 교사는 다음과 같다: 장로는 포항의 이종학, 임성용, 예천의 이덕상, 윤종성, 김성기, 박맹춘, 이성암, 이학이, 공주의 조명진, 이현구, 임건수, 유동현, 강경의 유상순, 한찬필, 울도의 김석규 등이, 교사는 강경의 김장배, 장일수가 임명되었다. 각 구역에서 추천한 권사, 집사는 67명이었다. 이번 총회는 본 교단의 운영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꾼 총회였다.
대한기독교회 한국인 최초의 감목이자 해방후 최초의 총회장을 역임했던 이종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