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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문제는 해결 말고 이별하라>의 줄거리:
세상 문제란 무엇입니까? 내 마음속 목마름이 향하고 있는 과녁을 빗나가는 겁니다. 즉 갈망하는 일이 속 시원히 이뤄지지 않는 상태지요. 이때 정답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문제의 해결은 또 다른 문제를 맞닥뜨릴 준비를 마친 것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문제 많은 세상을 예수님 따라 생이별하는 겁니다.
세상 문제는 해결 말고 이별하라
(요한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문제는 해결 말고 이별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문제는 해결 말고 이별하라”
세상 문제가 무엇인지를 요한복음의 용어대로 정의 내려 보자면 이 세상 안에서 마음속 목마름이 과녁을 적중시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일이 속 시원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가 이 세상 안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입니다. 다만 어떤 세상 문제를 맞닥뜨렸든지 그 정답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를 만났을 때 천신만고 끝에 해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은 곧 또 다른 문제를 맞닥뜨릴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삶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한 끝없이 문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와 이별함을 통하여 세상을 이별하면 더는 문제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삶의 문제가 생길 때에는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와 이별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를 이별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 이별을 생소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 해결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삶의 방식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하든지 문제와 생이별 해야 합니다. 몸이 살아있으면서 이별을 하는 것이기에 생이별입니다. 오직 문제는 생이별을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왕의 신하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왕은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던 헤롯 안디바입니다. 이 왕의 신하는 집이 갈릴리 시골이었던지 예수님이 갈릴리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간구에 대해 아들이 죽지 않고 사는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주의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44절을 보면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44절은 48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44절과 48절에서 드러나는 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본문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는 예수님께서 못마땅해하시고 언짢아하심이 분명하고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 분위기를 놓치면 본문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죽을병에서 고치신 사건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하는 것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건과 본문의 상황을 비교하여 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땅인 사마리아의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한 번도 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였습니다. 그 결과 목마름이 발생하고 있던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추수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도 표적과 기사를 한 번도 본 적 없이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믿고 영접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과 비교됩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 생긴 믿음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나타났던 믿음에 비해서는 절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건을 예로 삼아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낮추는 믿음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을 믿음이기에 가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두 사건에 집중하게 된 이유에는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90년대 초는 이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생긴지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60년 세월이 지나면서 예수 이름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너무나도 잘못된 믿음의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수가성 여인과 그 마을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던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되심은 곧 목마름이 발생하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께 닿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그리스도 되심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자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번 언급되는 믿음은 앞뒤 말씀과의 연관성을 놓고 볼 때 아름답고 깔끔하게 의미가 정리됩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죽을병에 걸린 아들을 오셔서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왕의 신하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은 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시 아들을 죽기 전에 내려오셔서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보이는 태도는 참 좋게 보입니다. 저 같았으면 “예수님! 좀 같이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입니다. 급한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지도 않은데 같이 가주시지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깨끗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갑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종들을 만나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전갈을 받게 됩니다. 이로부터 나타난 태도가 특이합니다. 왕의 신하는 종들에게 아들이 언제쯤 살아났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와 아들이 나은 때를 맞춰보고자 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공감이 가는 태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없이 병이 나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시간이 맞아떨어졌고 왕의 신하는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온 집안사람들에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 집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기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용만 보자면 이 믿음의 모습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의 직전과 도중인 44절과 48절에서 예수님의 언짢으심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을 통해서 깔끔하고도 명쾌할 수 있는 믿음의 사건을 어두움과 우울함의 분위기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번 언급된 믿음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5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드러난 믿음은 예수님이 원하신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앞선 2장에서 이미 이러한 믿음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22~23절을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몸을 의탁하실 수 없는 믿음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몸을 의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로서 인정받지 못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믿음의 경우가 수가성 여인입니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몸이 의탁된 상태였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50절에서 언급된 믿음은 바로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게 된 사람들과 같은 부류였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전문성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가지시는 전문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이 컴퓨터 전문가를 채용하였습니다. 컴퓨터와 연관된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을 인정하였기에 채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컴퓨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여주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 믿은 사람들이나 왕의 신하도 바로 회사의 사장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이 세상 문제에 관해서는 예수님의 전문가다운 실력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이러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세상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전문가로서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문가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시니 이 또한 그대로 믿었습니다. 세상 문제 해결이라는 예수님의 전문성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도 믿음인 것은 맞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믿음의 형태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시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문제를 이별하게 하시는 전문가이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되심이란 세상 안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전문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이 세상을 이별하게 하시는 전문가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시는 일이란 우리 마음이 이런 저런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음을 갖고자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당시의 사람들이든 이후의 사람들이든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문제 해결에 예수님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마음은 점점 더 깊이 세상 안으로 개입해 들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완전히 상반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전문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폐기시켜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류 상경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역회사나 종합상사에 취직한다면 그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납치해서 산골로 데려가 평생 농사나 짓게 한다면 이 사람이 가진 전문성은 한 번도 발휘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대통령 업무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면 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재봉틀을 주면서 임기 내내 옷감 깁는 일을 하라고 한다면 전문성은 전혀 발휘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류 상경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산골에서 농사를 못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한심한 일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도 재봉틀로 옷감 깁는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대통령을 이러한 일에 묶어 놓으면 이처럼 멍청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이 예수님에 대해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길을 내시는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께 세상 안에서 일어난 이런 저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묶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야 있겠지만 그리스도 사역과는 무관하기에 이처럼 한심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낮추고 땅에 버리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물론 건강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전문성이라고 믿는다면 그리스도이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돈 문제를 비롯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세상 탈출구를 만드신 그리스도 되심의 사역을 땅에 내팽개치는 일입니다. 컴퓨터 전문가를 잡아가다가 장작 패는 일을 시킨다면 컴퓨터에 대한 전문성은 내팽개쳐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문제는 해결하려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생기는 문제는 세상을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이지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신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공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백으로부터 채움을 향한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이 목마름이 세상을 향할 때 문제가 발생해서 괴로움이 주어집니다. 그 괴로움을 통해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목말라 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마음이 향해있는 세상일들에 문제를 주십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더 이상 세상 것들에 대한 목마름의 흐름은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돈 문제가 일어나게 하신 이유는 그동안 마음의 목마름이 돈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로 인해 괴로움이 생겼다면 마음의 목마름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흐름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다만 목마름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채워지고자 하는 목마름 자체는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그 목마름이 어떤 과녁을 향하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나는 이 세상에서 목마름의 과녁으로 삼을 대상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하늘에 도달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신 것은 해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기는 세상과 생이별을 하고 세상 밖에 있는 하늘로 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세상 밖으로 목마름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에 의미가 생깁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과정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하는 마음의 목마름의 방향전환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너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목말라하고 있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있던 마음이 실제로 하늘을 향하게 되는 방향전환이 일어나게끔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가 올바른 믿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밀착하고 싶다.”라는 바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왕의 신하 또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목마름의 과녁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에 대한 반응 또한 달랐을 것입니다. 주권적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왜 이런 병을 허락하셨을지 생각합니다. 아들의 병이라는 문제를 대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의 병이라는 문제에 마음이 달라붙었다는 것은 목마름이 아들을 향해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들의 죽을병을 계기로 삼아 목마름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기에 세상을 향해 마음의 목마름을 향하게 하는 방향성에 문제의식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세상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가로 초청받으시게 됩니다. 55절을 보면 아들이 살아난 뒤에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개인의 인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전문가로 초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세상과의 이별을 통해 빛이 나고 찬란하게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될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들에게서는 땅바닥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 문제를 만났을 때 해야 할 일은 해결이 아닌 이별입니다. 이별할 때에 세상 문제는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머물러 있게 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린 것은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밖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또한 세상 문제를 이별해야 되겠다고 깨달았더라도 여전히 아들의 병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안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목말라 하며 의식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하나님 계심은 잊히고 목마름의 과녁이 되실 수도 없으며 주권도 망각됩니다. 세상 문제를 먼저 마음으로 붙잡기에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전문성은 폐기처분되고 세상 탈출을 위한 그리스도 사역의 내용 전부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세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문성의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한탄하고 계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기 전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안에 있었고, 문제가 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할 일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을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이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처럼 그리스도 되심을 높임으로써 마음의 목마름이 그리스도 안으로 추수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목마름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 닿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하는 세상과 생이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죽을병에 걸린 아들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이 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안에서 죽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아버지의 간청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변경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우리의 간청을 통하여 하나님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변경되는 법은 없습니다. 본래 왕의 신하의 아들은 병 때문에 죽을 계획이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죽을병처럼 보이는 이 상황을 이용하셔서 왕의 신하에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이별하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릴 것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권적으로 알고 계셨고 계획하셨습니다. 이제 계획대로 병이 난 상태를 교훈삼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문제와 이별하여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탈출과 문제 이별의 그리스도 되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 안에 마음을 묶어두면서 예수님을 세상 문제 해결의 전문성을 믿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문제의식을 느낄 때마다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고집쟁이는 십자가에서 죽고 문제와 이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문제없는 때가 있겠습니까? 삶에서 문제가 생기는 모든 때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신호로 알게 하여 주심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의 전문성을 믿는 대신에 문제 이별을 위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