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 슬하의 네 딸은 모두 나이가 어리고 시집도 가지 않았었다. 그들이 성장하여 시집갔는데, 동궁 부솔(東宮副率) 한후기(韓後琦)의 아내는 누님의 셋째 딸이다.
한후기의 집안은 대단히 가난하여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나가는 정도였다. 신부가 집안 살림을 맡게 되자 융통성 있게 절제하고 절약하여 단출하던 살림을 풍성하게 했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는지 알지 못하였다. 집안의 크고 작은 살림살이를 손보고 대청과 방을 말끔하게 수리하였으며 사당을 세워 선조의 제사를 모셨지만, 남편은 비용이 얼마나 지출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노복들은 장부를 받아 전답을 경작하였으며, 여종들은 일을 맡기면 삼가고 조심하며 지시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집안 안팎으로부터 종족들과 이웃들에 이르기까지 시종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집안을 다스리는 모든 절도가 이와 같았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오의(吳𥫃)이고, 아들은 석(
)과 영(濙)과 협(浹)이다. 막내딸이 계례(笄禮)를 올리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통해하다가 슬픔이 지극하여 운명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태어나 신묘년(1651, 효종2)에 운명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권씨는 안동(安東)에서 가문이 시작되었다. 판서 휘(諱) 반(盼)과 정자 휘 경(儆)이 조부(祖父)와 선고(先考)이고, 나의 선친 문간공(文簡公) 휘 수광(睟光)이 외조부(外祖父)이다. 한후기의 조상으로는 고려 시대 태사(太師)였던 난(蘭)이 있고, 선고(先考)는 참봉(參奉) 휘 철(哲)이다.
운명한 해 10월에 한씨의 무덤이 있는 고양(高陽)의 용복 등성이에 장사하였으니, 묘혈(墓穴)은 해좌(亥坐)이다. 어려서는 일찍 부모를 여읜 것을 가련하게 여겼고, 성장했을 때는 시집가서 자녀를 둔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운명하자 주검을 어루만지며 곡을 하고 글을 지어 광에 넣는 사람은 그의 외숙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지아비와 자녀들 / 有夫與子
친척들도 모두 다 있지만 / 親戚咸具
참담하게 생각도 돌아봄도 없으니 / 憯莫念顧
통곡하고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한들 / 哭泣傷心
죽어서 알지 못하니 / 以死不悟
어찌 너에게 보탬이 되겠는가 / 何厚於女
한씨의 묘역에 / 韓氏之域
봉분 단단하게 조성하였으니 / 旣封旣固
그런대로 안심하고 두려워 말지어다 / 尙寧毋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