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옥동(玉洞) 이서(李漵)와 성호(星湖) 이익(李瀷) 두 분 선생께서는 사도(斯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었다. 그래서 당시 그 문하에 모여든 선비들이 빈빈(彬彬)하게 많이 있었는데, 여러 자질(子姪)들 중에서 그 경(經)과 예(禮)를 전수받아서 사과(四科)의 과목(科目)에 넉넉히 들 수 있는 자로 말한다면 곧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선생이 그러한 분이다. 정산 선생에게 또 훌륭한 아들이 있어서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니, 곧 목재 선생(木齋先生)으로서 휘가 삼환(森煥)이고 자가 자목(子木)인 분이 바로 그분이다.
선생은 영조 기유년(1729, 영조5) 6월 29일에 안산(安山)의 첨성리(瞻星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너무 여위고 병이 많았으므로 나이 열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곧 스스로 과정(科程)을 세워서 밤낮으로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성호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재주도 있고 포부도 있으니 아마도 성취할 것이다.” 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자 성망(聲望)이 대단하였고, 여러 번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과거(科擧)는 본래 그의 뜻이 아니었다.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옛날부터 현성(顯姓)이었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경헌공(敬憲公) 계손(繼孫)이 관북 지방에 문교(文敎)를 일으켜서 사람들이 그를 옛날 한(漢)나라 때의 촉(蜀)의 문옹(文翁)에다 비유하였다. 이로부터 5대를 전하여 소릉공(少陵公) 상의(尙毅)에 이르고, 다시 2대를 전하여 매산공(梅山公) 하진(夏鎭)에 이르렀는바, 이처럼 아량(雅量)과 청덕(淸德)을 지닌 자들이 줄줄이 이어 나와서 가문(家門)의 혁혁함이 당세에 비교할 만한 곳이 드물었다.
매산공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섬계(剡溪)는 포의(布衣)의 몸으로 항언(抗言)을 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옥동과 성호 두 분은 도학(道學)으로 존중을 받았으며, 나머지는 각각 문장과 행의(行誼)로써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런데 특히 성호는 학자들의 존중을 받아서 사방의 선비들이 많이 귀부(歸附)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익히고 이것을 갈고 닦았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무릇 은미(隱微)하고 오묘(奧妙)한 경전(經傳)의 뜻이나 번잡하고 간결한 예법의 의문(儀文)에 대하여 그 궁극의 지취(旨趣)를 끝까지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로 인하여 성호가 더욱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왕래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위해 별서(別墅)를 내어주고 거기서 거처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중년(中年)이 되면서부터는 가문이 다시 전처럼 흥성(興盛)하지를 못한데다 초상(初喪)이 또한 거듭하여 닥쳐왔다. 선생의 본생고(本生考)는 죽파(竹坡)로 휘가 광휴(廣休)인데 실은 정산의 본생형(本生兄)이 되며, 그 배위(配位)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진사 정덕녕(鄭德寧)의 딸이다. 그런데 선생이 죽파의 상을 당하여 겨우 상기를 마치자 정산의 원배(元配)인 양천 허씨(陽川許氏)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없었으므로 문중의 의논에 의하여 선생이 정산의 양자로 들어가서 그 상을 복상(服喪)하게 되었다. 그 뒤 또 본생가(本生家)에서 어머니와 형이 세상을 떠났으며 안으로는 아내마저 영결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만 비쩍 말라 시들어서 늙기도 전에 벌써 머리가 허옇게 세고 말았다.
그런데도 선생은 여전히 의연(毅然)하게 가학(家學)을 부지(扶持)하면서 덕산(德山)의 장천(長川)에 은둔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학문을 강론하고 행실을 신칙(申飭)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때로는 여가를 내어 꽃을 심고 대[竹]를 길러서 스스로의 흥취를 부치기도 하였으며, 가끔 뜻 맞는 친구들과 약조(約條)하여 산과 물을 찾아 노닐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이렇게 한 지 40여 년이 지난 여든다섯의 나이에 이르러서 마침내 편안히 세상을 마치니, 이 때가 순조 계유년(1813, 순조13) 12월 12일이었다. 이듬해 윤2월에 장천(長川)의 당산(堂山) 감좌(坎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사림(士林)들이 의논하여 유현장(儒賢葬)으로 치르려고 하였으나 그 집에서 유언(遺言)이라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섬계는 그 휘가 잠(潛)이고 정산은 휘가 병휴(秉休)인데, 곧 선생의 조부와 아버지가 된다. 원비(元妣) 허씨(許氏)는 진사 허규(許逵)의 딸이고, 계비(繼妣)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신경덕(愼敬德)의 딸인데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후손이다.
배위(配位)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필선(弼善) 권영(權穎)의 딸인데, 정미년(1727, 영조3) 10월 7일에 태어나서 갑신년(1764, 영조40)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장천의 선영(先塋) 곁에 장사를 지냈는데 나중에 옮겨서 선생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명환(兪命煥)에게 시집갔다.
선생은 본생 중형(本生仲兄)의 아들 재상(載常)을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았다. 재상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시광(是鑛)은 양자로 나가고 다음은 시홍(是鉷)ㆍ시흠(是欽)ㆍ시린(是鏻)이다. 시홍의 아들은 찬영(贊永)과 교영(敎永)인데, 교영은 시흠의 후사로 나갔다. 딸은 이유상(李儒翔)과 이재화(李在和)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시흠의 딸은 한석동(韓晳東)에게 출가했으며, 시린은 재종제 시경(是鏡)의 아들 치영(治永)을 들여서 양자로 삼았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처음에 선생의 어린 동생 명환(鳴煥)이 겨우 네 살일 때에 정산이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에 즈음하여 정산이 그 동생을 가리키면서 선생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 가르쳐서 성립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울면서 이 가르침을 받았으며, 동생을 어루만져서 이끌어 가르친 결과 마침내 진사가 되어서 이름이 났다. 그 뒤 10리 밖으로 분가를 한 뒤에는 신 부인(愼夫人)이 가끔 그를 찾아가서 묵곤 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는데 갈 때는 반드시 음식물을 갖고 갔으며, 춥거나 덥거나 그치는 일이 없었는데 혹시 병이 심할 경우에는 아이를 대신 보내었다. 동생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선생이 널리 의서(醫書)를 탐구하여 손수 약을 지어 써서 조금 그 수명을 연명토록 하였다. 병이 더욱 심해져 신 부인이 걱정을 하면서 음식을 들지 않자 선생은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식사를 들고 들어가서 간절히 잡수기를 권하였다. 이 때 선생의 나이가 81세였으며 어머니의 나이는 66세였다. 그러자 어머니 또한 울면서 억지로 밥을 들었다. 선생은 효성이 독실하여 봉양과 거상(居喪)에 한결같이 정성과 예의를 바쳤다. 그리고 언제나 제사 때가 되면 3일 간 소식(素食)하고 재계하였으며, 친히 제기(祭器)와 제수(祭需)를 살폈다. 늙어 병이 들어서 배궤(拜跪)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여전히 관대(冠帶)를 갖추고 엎드린 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때 서양의 천주학(天主學)이란 것이 중국을 거쳐서 점차 우리 동토(東土)로 퍼져 들어왔다. 그러자 선생은 이를 걱정하면서 양학변(洋學辨)을 지어서 원근에 이를 전시(傳示)하였다. 언젠가 정조 임금이 채 문숙공(蔡文肅公 문숙은 채제공(蔡齊恭)의 시호임)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이(李) 아무개가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데 매우 진력(盡力)한다고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겠다. 호우(湖右)의 일도(一道)를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문숙공이 대답하기를,
“아무개가 사학을 물리치려 한 것은 진정 사실입니다만,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한 도를 전적으로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사옥(邪獄)이 일어났을 때 연좌되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나, 선생이 살던 주위에서는 한 사람도 이를 범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생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도제(徒弟)가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평소에 늘 이들을 효도와 공경, 예의와 염치로 순순히 타이르고 달래어 이끌어 주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물러가기를 명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의 문하에 있는 자들은 모두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볼 만하였다. 그리고 글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글의 이치를 열어 보여서 스스로 이를 터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를 깨치지 못하면 하루 종일 마주 앉아 있었으며, 마침내 깨치고 나면 다시 그 앞뒤의 말뜻을 따라서 거듭 이를 이끌어서 차근히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들 가운데 배움이 정숙(精熟)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으며, 한번 터득을 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지금도 마을 서당(書堂)에서는 이른바 ‘장천(長川)의 구두(句讀)’라는 말이 전해 온다.
선생은 성품이 준정(峻整)하였다. 집안은 원래 가난하였으나 그럼에도 남의 어려움을 구제하기에 바빴으니, 혹시 가난하여 혼사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힘을 다해 건사하여 주었으며, 흉년이라도 들면 지성으로 백성들의 목숨을 걱정하였다. 밖에 출타할 일이 있을 때엔 늘 종이에 돈을 싸서 낭탁(囊槖)에 저축해 두었다가 각기 그 경우에 따라서 이를 구제하여 주었다. 일찍이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는 어떤 족인(族人)이 돌림병에 걸린 자가 있었는데, 양식을 싸 들고 찾아가서 그를 도와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기혈(氣血)이 바삭바삭한 자라서 돌림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였다.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분이 있으면 반드시 예의를 차려서 우대하였으며, 해마다 묘제(墓祭)가 끝나면 조육(俎肉)을 나누어서 가까운 노인들에게 골고루 보내 주었다. 혹시 잔치 모임이 있을 때 손님 중에 늙은 어버이를 모시는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직접 음식들을 싸 주면서 가져다 드리게 하였다. 공은 재물에 대하여 구차하지 않았다. 일찍이 밭을 팔게 되었는데, 이미 계약을 한 뒤에 다른 사람이 두 배의 값으로 사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아, 슬프다. 선생은 남달리 뛰어난 자질과 성실하고 도타운 포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다 정산(貞山)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치고 성호(星湖) 또한 바른 법도로 교수하였으며, 그리하여 70년 동안을 끊임없이 글을 읽으면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단 하루도 그친 적이 없었으니, 그 조예(造詣)한 바가 어떠하였을지를 가히 알 만하다 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이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선생이 그만 가난과 근심 걱정으로 인해 곤액(困厄)을 면하지 못하여 끝내 이처럼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군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배움이란 참으로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저들 공직에 올라서 화려한 벼슬을 하면서 세상에 높이 쓰이는 자로 말하면, 그들은 정작 이 배움의 길에 전념할 수가 없음을 늘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학문을 높이 쌓고 깊이 길러서 그 힘을 다하여 연찬(硏鑽)하고 궁구(窮究)하였으며, 드디어 당세의 사람들로부터 신복(信服)을 얻고 후생(後生)들로부터 경모(景慕)를 받게 되었으니, 반드시 그 자신이 궁벽한 시골 구석에 은둔하여 검약하게 지내면서 학문의 기반을 닦는 데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빈천(貧賤)과 우척(憂戚) 또한 사실은 하늘이 선생을 옥성(玉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두고 선생을 애석해한다면, 이 또한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 아니겠는가.” 한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긴 눈썹이 나 있었으며 손바닥에는 ‘문(文)’이라는 무늬가 있어서 미수(眉叟) 허 선생(許先生)의 ‘장미악문(長眉握文)’의 상(相)과 서로 부합하였으므로, 스스로 그 호를 소미(少眉)라고 하였다. 선생이 지은 글로는 경해(經解)와 예설(禮說)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없어져 버렸으며,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선생의 현손 종헌(鍾憲)이 선생의 묘소에 명(銘)을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왔다. 그래서 내가 이를 승낙을 했었는데, 미처 이를 짓기도 전에 그만 종헌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 그 아들 덕구(德九)가 다시 이를 청하여 왔다. 그래서 지금 생각이 나거니와, 우리 고숙조(高叔祖 종고조(從高祖))이신 방산공(方山公)이 당시 학문으로 사우(士友)들로부터 신망을 받았었는데, 특히 선생과의 교분이 두터웠었다. 그리고 선생이 일찍이 손자의 관례를 치를 때에는 우리 증조부에게 계빈(戒賓)을 부탁했었다. 증조부께서 비록 병으로 나가지는 못하셨지만, 그 복서(復書)가 매우 공손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니, 대저 두 가문의 오랜 정분으로 인해서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선생의 일을 사양한다는 것은 의리상으로 보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재주가 없어서 선생의 유광(幽光)을 제대로 밝혀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선생이 교화한 곳이 / 先生之化
나라가 아니고 마을이었다네 / 不于邦而于鄕
선생이 계시던 세월이 / 先生之世
지금 백 년이 흘렀어라 / 今百星霜
그런데 그 마을을 살펴보니 / 而試觀其里
아래로 농부나 장사치에 이르기까지 / 下及農商
상사(喪事)에는 슬퍼할 줄 알고 / 喪知必戚
제사에는 공경할 줄을 아는구나 / 祭知敬將
면과 메가 정한 자리가 있고 / 麪糗有處
과일과 채소가 찬란히 줄을 이루어라 / 果菜粲行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 謂不如是
귀신이 제사를 잡수지 않는다는구나 / 神不享嘗
이처럼 뒷사람들을 경복시킴은 / 敬伏後人
저 부귀로도 감당할 수가 없어라 / 富貴莫當
초가지붕에 흙담을 친 이 재실에 / 茅屋土垣
부르지 않아도 달려오는구나 / 不召走蹌
당우처럼 높다랗게 봉분을 쌓았으니 / 有封若堂
양지바른 산자락의 기슭이어라 / 在麓之陽
산에 자란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를 / 山有柞橡
서로 경계하여 상처 내지 말고자 / 相戒勿傷
참으로 그 유풍과 남긴 운치가 / 蓋其遺風餘韻
오랠수록 더더욱 다하지 않으리니 / 愈遠而靡央
누가 말했던가 사방 육칠십 리의 고장이 / 孰謂方六七十而後
군자를 기다려야 비로소 예약이 빛난다고 / 禮樂始竢君子以彰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