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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믿음의 싸움입니다. / 2023년 5월 14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무엘하 11:1-13
팽이는 정지한 상태에서는 똑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회전하지 않는 팽이는 그 가늘고 뾰쪽한 끝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팽이가 운동을 하면 똑바로 서게 됩니다. 운동 에너지가 약해지면 팽이는 흔들거리고 휘청거리다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회전해야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팽이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운동 에너지로 회전할 때에만 비로소 똑바로 설 수 있는 팽이처럼 성도의 믿음도 운동력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자녀로 설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운동력은 어떻게 얻어지겠습니까? 팽이는 스스로 자신을 치지 못합니다. 사람이 쳐주어야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신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말씀합니다.
정말 구원을 이루어가는 이 믿음의 길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아마 구원을 만만하게 보는 자들은 사단에게 붙잡혀 있는 자들일 겁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성이 되었어도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야 하는 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치지 않으면 곧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넘어졌다고 해서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주저앉아 있으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영영 지워지고 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한 번 받고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다는 것으로 되는 구원입니까? 마지막에 넘어져 있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달리기에서도 초반에 월등하게 앞서가도 그것으로 등수를 정하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에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말씀합니다.
구원에 대해 생각할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믿음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요?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 이 영원한 세계를 생각하면 정말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것이 뭔지 모르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겁니다. 두려움도 걱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치열하게 믿음으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력으로 달리지 않습니다. 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쉬엄쉬엄 걷다가 곁길로 갑니다. 잠시 살다가는 세상의 재물과 영광과 썩어질 육체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재물을, 하나님과 자신의 육체를 함께 섬기면서 구원 받은 척 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척 합니다. 구원의 문이 좁다고 해도 나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는 하나님과 십자가와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육체의 만족과 기쁨을 선택하면서도 구원을 받은 척하는 겁니다. 왜 믿음의 선진들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믿음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믿었을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는 말씀도 잊었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나와 수도 없이 말씀을 듣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듣고 죄와 싸우며 세상을 이기며 순종하는 사람들은 적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불법을 행한 자들로 심판을 받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선지자 노릇도 안 했고, 귀신도 쫓아낸 일도 없고, 권능도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안심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해 보였던 사람들이 심판대에서 아니었다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믿음으로 자기 마음과 형편대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의 타락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집니까?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사람도 타락하였다는 것을 나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굉장한 위로로 삼으려고 합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도 타락했으니 너희도 타락하라고 하나님이 다윗의 그 타락을 기록해놓으셨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간음에 대하여 관대한 잣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도 그랬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회개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촉범소년이 나는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저주와 치욕과 고통을 받고 죽으신 그 십자가의 보혈이 육신대로 사는 자들과 내 마음대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 흘리신 사죄의 보험입니까? 대속의 은혜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정죄를 받지 않는 촉범성도입니까?
회개가 잘 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눈물 한 번 흘리는 것입니까? 또 다시 죄를 지으면서 또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길에서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빨리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난 촉범성도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는 내가 죄로 넘어질 때마다 달콤하게 타먹는 보험이 아닌 것입니다. 보험에 가입한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부딪치고 넘어져서 보험금을 탑니다.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 나면 보험금을 타 먹으면 된다고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없겠습니까? 은근히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로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손으로 못을 박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손으로 내 몸에 못을 박는 것이라면 죄가 아무리 달콤해도 누가 그 고통을 참으면서 죄를 짓겠습니까? 내 몸이 아니라 예수님 몸에 못을 박는 것이고 예수님이 고통을 받는 것이니 나는 괜찮다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와 타락을 통해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에서 잠시 자신과 싸우지 않을 때 넘어졌는데 너희들은 어떻겠냐고 말씀하는 겁니다. 다윗도 넘어졌으니 너희도 당연히 넘어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믿음에도 천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언어, 예술, 스포츠에만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도 천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를 알려주면 그 하나를 믿을까 말까 할 때 이 사람들은 백개 천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믿음에는 둔재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 이해시키고 가르치려면 속이 터지듯이 정말 하나님이 인내하고 설득하지 않으면 온전히 믿지 않는 둔재입니다. 얻어맞으면서 믿음을 배워야하는 둔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더디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어느 날 제 자신을 보면서 믿음에도 천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백부장이 그런 천재구나! 예수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낫겠다고 믿은 그 여인이 천재구나! 삭개오가 천재구나! 그리고 다윗이 그런 천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그 수많은 병사와 용사들이 골리앗이 무서워 하나님을 조롱하는 데에도 감히 누구 하나 싸울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나이가 어려 군대에 들어갈 수도 없는 소년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격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냐는 겁니다. 그것도 칼도 없이 돌멩이 다섯 개를 가지고 말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저는 이 본문만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같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합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말입니다. 제가 둔재여도 천재는 알아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천재들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다섯 살짜리가 대학교수도 못 푸는 수학을 줄줄이 풀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천재도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그 믿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다윗 하나였던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갑자기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이미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믿음으로 천재였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이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물어간다고 따라가서 쳐 죽이고 찾아 오냐 말입니다. 그것도 소년이 말입니다. 이게 정말 실화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고 말입니다.
다윗이 삼손처럼 힘이 엄청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런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재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으니 사울에게 10여년을 쫓겨 다니면서도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왕이 된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사울을 마음대로 죽이고 도피 생활을 끝내고 빨리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절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믿음의 천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엄청 눈치가 빠른 사람들입니다. 지금 어려울 때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면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뜻은 무엇인지 재빠르게 파악하고 신속하게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도 그런 천재였던 겁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시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고백하는 겁니다.
가장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둔재들은 믿음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돼지처럼 본능대로 행동합니다. 저는 머리 좋은 사람들, 예술에 능력에 있는 사람들,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 그리고 얼굴 천재들도 부러웠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좋은 천재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쓴 책이 아니라는 것이 다윗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람이 썼으면 분명 다윗의 간음과 범죄를 기록하지 않았을 겁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기에 인간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천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머리가 아무리 비상한 천재여도 공부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이해하고 암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는 해야 하는 겁니다. 천재도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한 둔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그렇다는 겁니다. 싸우지 않으면 천재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다윗의 타락과 범죄를 보면서 충격입니다.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원숭이는 나무에서는 떨어져도 다윗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 어떻게 비열하고 파렴치한 죄를 지을 수 있을까 말입니다.
그것도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를 범한 것입니다. 그 간음으로 밧세바가 임신하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불러드려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는 다윗이 술을 먹였지만 자기 집에 바로 코앞인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에 있는데 집에 가서 자기 아내와 잘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충성과 정직함 때문에 자신의 간음을 덮는데 실패한 다윗은 이번에는 우리아의 그 충성심을 이용해 그의 손에 우리아를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내 적에 손에 죽게 하라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결국 우리아는 적에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아마저도 적에 손으로 죽이는 살인을 하고 만 것입니다. 믿음의 천재였던 다윗이 죄를 짓는 데에도 천재가 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 죄를 드러내기까지 태연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죄에 감각이 없었으면 자신을 죄를 고발하는 비유를 듣고는 가난한 사람의 하나 뿐인 양을 빼앗은 그 부자는 죽어야 할 자라고 분노까지 했겠습니까?
믿음의 천재였던 다윗이 한 순간에 추락하여 심각한 죄인으로 타락하는 이 사건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닙니까? 싸우지 않으면 천재도 뭐고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자기 자신과 말입니다. 다윗이 그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싸우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자신과 싸우는 데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만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죄를 안 짓는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죄와 싸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죄와 싸워 승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아멘!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아무리 큰 죄를 용서받았어도 그 후에 자신의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를 붙잡고, 의지하며 즉 자신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못을 박고 싸우지 않으면, 부인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다 죄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죄 아래 끌려가는 죄의 노예와 종이 되는 겁니다. 육신대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그 정욕과 탐심과 감정과 교만과 자존심으로 자신을 숭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제 멋대로 믿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많은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데도 예배 끝나면 십자가와는 상관없어지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게 다닙니다. 자신의 마음과 삶에서 시험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그래서 착각을 많이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 엄청 은혜를 받는 것 같지만 삶에서 열매는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고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고 것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은 받지 않았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도 받고 성령도 받고 회개도 했던 겁니다. 구원도 받았던 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그때 죽으면 구원을 받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믿음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통해서 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대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찾지 않고 십자가의 믿음으로 산 사람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치는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그 과거의 사건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비한 것을 경험했습니까? 환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까? 방언을 합니까? 그런 체험은 없지만 주일 예배와 십일조는 철저하게 한다고 그것을 의지합니까?
제가 30년 가까이 목회하면서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있습니까? 폐렴으로 한 번 있는 것 같습니다. 십일조를 안 드렸습니까? 넘치게 드렸습니다. 내 것을 드렸다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새벽에 기도는 안 했습니까? 저도 환상을 보았고 음성도 들었습니다. 방언을 못하는 목사님이 많은 것을 놀랐는데 방언을 못합니까? 제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원이 됩니까? 그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저에게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과 내 육신의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믿는 것처럼 자신도 남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심판대 앞에 가서야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뒤늦게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 중에 목사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 있을 때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구원을 이루어가는 믿음은 하나님만을 홀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즉 하나님과 자신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죄로 넘어져 죄 가운데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과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함께 섬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때부터는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바울을 나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세상으로 숭배받기를 원하는 나는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평안해지자 그 싸움에 실패한 것입니다. 평안에 익숙해지면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성도들은 자도 마귀는 잠자지 않습니다. 같이 자면 문제가 없겠지만 마귀는 성도가 평안에 익숙해져 잠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죄를 즉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슬그머니 갖다 주면 근심과 경계도 없이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자신과 싸우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잠자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망으로 가지만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사슴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습니다. 연한 풀이 너무 맛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풀을 먹는 그 재미와 맛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 사자 한 마리가 몸을 납작 숙이고 사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슴은 이제 더 이상 경계하지 않습니다. 사자는 기회가 오자 몸을 일으키고 달려갑니다. 그때에도 사슴은 아무 것도 모르고 꼬리를 툭툭 치며 풀을 먹습니다.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알고 뛰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사자는 사슴의 목을 물어버렸고 그것으로 사슴의 생명은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 헤맨다고 말씀합니다. 죄와 자신과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귀에게 다 잡혀 지옥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죄는 믿음의 천재였던 다윗도 무참하게 넘어뜨릴 만큼 달콤했던 겁니다.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죄에 붙잡혀 넘어진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죄를 당해낼 장사가 없습니다. 지금 마귀에게 끌려가는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를 의지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망을 이룰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는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멈추지 말고 끝까지 싸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