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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첫 번째를 바꿔야 진짜 희망찬 시작>의 줄거리 :
한 해가 지나고 다가온 새해가 아니라 완전 질이 다른 새로운 해를 살 수는 없을까요? 그냥 달력만 새 달력으로 바뀌는 것일 뿐 환경도 내 마음도 내 신체도 어디를 봐도 새롭다고 할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선하게 완전히 결이 다르고 질이 다른 새해를 사는 법이 있습니다. 24시간 존재감과 만족감이 필요한 마음속 첫 번째 대상을 세상 것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으로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진짜로 완전히 결이 다르고 질이 다른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를 바꿔야 진짜 희망찬 시작
(출애굽기 12:1~51)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유월절(踰越節) 규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는 일주일간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떡을 먹는 무교절 규례에 대한 말씀과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번째 재앙까지 내린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고 진정한 출애굽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에 관한 추가적 규례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과 이것을 모면하기 위한 유월절의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긴 본문을 묶어서 ‘첫 번째를 바꿔야 진짜 희망찬 시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느끼지만 달력만 새 달력으로 바뀌는 것일 뿐 환경도 내 마음도 특별히 달라지지 않고 몸만 점점 더 늙어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이했다는 감격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신선하게 질이 다르고 결이 다른 새해를 사는 법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24시간 무엇이 있다는 느낌의 존재감을 필요로 합니다. 또 마음은 공백을 채워서 만족감을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을 바꾸면 완전히 질이 다르고 결이 다른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장자의 재앙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본문에는 이러한 장자의 죽음을 모면하는 방법으로 유월절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유월절 이후에 출애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을 바꾸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출애굽은 광야 교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대로 유월절과 출애굽이 일어난 달을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 새로운 달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새로움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우리의 마음 자체를 일신하여 새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찬 새해’라는 말이 명실공히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번째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37~42절을 보면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 뒤에 드디어 출애굽이 이루어집니다. 선민의 애굽 생활은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30년이 지나는 동안 선민은 20세 이상 장정만 60만을 헤아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하여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200~250만으로 추정합니다. 이처럼 선민은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한편 말씀드린 대로 출애굽 사건은 유월절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스데반 집사님이 사도행전 7장에서 언급한 광야 교회의 출발입니다. 광야 교회의 시작은 겉모습은 출애굽이지만 유월절의 의미가 그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장자의 죽음 재앙을 모면한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넘을 유(逾)에 넘을 월(越)을 씁니다. 쉽게 말해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2절을 보면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문 인방은 문을 가로지르는 나무이고 좌우 설주는 문의 기둥입니다. 우슬초로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면, 장자를 죽이는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소생을 죽이는 장자의 재앙을 모면함이 교회의 출발점이라니 참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장자 재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소중하고 아까운 존재가 이삭인지 하나님인지를 드러내 보이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 대신 이삭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이것이 장자 재앙이 임하는 완악함의 상태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아닌 이삭을 선택했다면 마음에서 첫 번째가 되는 대상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첫 번째 대상이 될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이삭일까요? 이 세상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김으로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그 대상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가 완악함의 열 번째 성분입니다. 이 열 번째 성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장자 죽음의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의 죽음은 그것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죽음이란 내 육체의 목숨이 끊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껴야만 하는 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 첫 번째 대상의 죽음이란 곧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고 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숨과 생명을 구분해 봅니다. 생명이란 곧 살아야 될 궁극적 이유입니다. 마음에서 첫 번째로 소중한 대상이 생명입니다. 늘 첫 번째로 생각하고, 늘 첫 번째로 신경 쓰는 그 대상이 내가 살아야 될 이유인 것입니다. 첫 번째를 상징하는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그 장자만 죽는 게 아니라 나의 생명도 끊어짐을 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명단에 있는 자들입니다. 약속의 명단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태어날 모든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가 가져야 될 믿음이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마음가짐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마음속에서 죽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등극하는 세상의 대상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광야 교회는 독특한 출발점을 갖습니다. 완악함의 열 번째 성분은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을 세상 것 중에서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마음의 첫 번째 것을 죽이는 역사를 일으키시고 이로부터 교회가 출발합니다. 완악함은 애굽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약속의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 선민도 완악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완악함 속에서 선민에게는 특별한 일이 주어집니다. 마음속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세상의 대상을 죽이는 것이 장자의 재앙입니다. 선민도 똑같은 완악함을 갖고 있으나 선민에게는 유월절 어린 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선민들은 죽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이제까지의 생명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새 생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시작은 첫 번째 대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을 바꾸는 역사가 이렇게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있음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채움을 통한 만족감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은 세상 것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출애굽을 위한 열 가지 재앙 등 어마어마한 우여곡절을 끼워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 번째 대상을 세상 것으로 붙잡은 상태에는 재앙이 내립니다. 그 재앙을 유월절 어린양이 대신 받았습니다. 선민은 유월절을 통해서 살아남았습니다. 나 대신 죽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으면서 내가 죽은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제까지 세상 것이 첫 번째였던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으로 바뀌는 역사를 통해 교회는 시작됩니다. 이것을 알면 믿음이 유지되는 상태에서는 마음에서 세상 것의 존재감과 만족감이 첫 번째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을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바꾼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대답을 유월절 규례가 상세하게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유월절 규례는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족이 언급되기에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44절 이후를 보면 단지 혈연 상 이스라엘 가족들끼리 모여서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할례 언약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할례를 받았다면 돈으로 산 종이든 이방인이든 어린양의 고기를 먹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이것을 교인과 예수님의 죽음의 관계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이 함께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자들이 교인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가족만 유월절 어린양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공동체인 광야 교회의 교인이 됩니다. 이는 곧 내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않으면 교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인은 예배당에 나가느냐 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출석은 교인이 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세상을 잘라내는 할례의 의미가 살아있으면 교인입니다. 선민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할례를 행했듯이 우리가 마음에서 세상을 잘라내는 이유도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세상 것을 첫 번째로 삼은 나의 마음 상태가 죽어야 함을 알고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자가 교인이 됩니다. 교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월절 규례는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피를 바른 집에는 장자를 죽이는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장자는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상징합니다.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세상 것이 차지하고 있다면 죽음이 임합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세상 것이 첫 번째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내 의식이 유월절 어린양이신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으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세상 것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함이란 곧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문설주와 인방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것은 내 마음의 입구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의식하고 기억함으로써 세상이 마음에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일단 마음에 들어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됩니다. 그렇기에 아예 마음의 입구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마음에 세상이 들어왔다면 그러한 나는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의 입구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죽음의 재앙을 가져오는 세상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월절 규례는 어린양의 고기와 함께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는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았기에 부풀지 않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껴안고 있으면, 이제 첫 번째 대상을 위해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세상 것을 받아들였기에 발생하는 판단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내 삶에 끼어드는 상태가 바로 누룩입니다. 세상 것을 첫 번째 대상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누룩이고 이것 때문에 삶이 부풀려지는 것입니다.
무교병이란 이와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내가 마음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먹을 때, 마음에서 세상 것이 첫 번째인 상태는 종식됩니다. 그러면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껴야 하는 마음의 첫 번째 영광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고 뚜렷해질수록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뜻하고 지시하시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세상 것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붙잡고 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싹 거둬진 상태가 무교병을 먹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낸 후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내게 하십니다. 이전의 나는 마음으로 세상 것을 첫 번째로 붙잡고 그것을 살아야 될 이유인 생명으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먹고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는 하나님만 두기로 합니다. 이제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기능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담기게 되고 하나님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오셨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학자들은 누룩을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그 하나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붙잡고 해석하면 누룩과 무교병의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은 첫 번째 유월절에 이어서 생긴 절기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마음의 첫 번째 장자를 죽이는 절기입니다. 이로부터 누룩이 없는 무교병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누룩이란 세상 것을 첫 번째로 삼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내 삶에 들어감으로써 부푼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 삶의 모양이 아니라 이물질에 의해 부풀림이 일어난 현상입니다. 유월절에 이어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 기간이 이어지는 것은 세상의 누룩이 제거된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대상을 바꿈으로 시작되는 교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무교병과 함께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세상 것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을 붙잡는 이유는 그것이 맛있고 좋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쓴 나물을 먹음이란 이제 세상 것들의 맛을 단호히 거절하겠다는 결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는 이유는 재물이 너무나 맛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입맛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맛있게 여기고 재물에 대해서는 쓴 나물을 먹는 것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이러한 결심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는 맛있게 여겨지는 대상들이 많습니다. 자녀의 형통이 대표적입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합니다. 자녀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녀가 재벌가의 상속자와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녀를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둔 부모는 그야말로 꿀맛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장 맛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쓴 나물을 먹음이란 모든 꿀맛으로 느껴지는 세상 것들을 끊고 하나님 맛에만 취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아기가 젖을 뗄 때가 되면 엄마는 젖에 쓴 약을 바릅니다. 쓴 나물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이 맛있게 느껴지는 마음에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내 마음에는 달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내 영혼을 멸망시키는 독이다.’라고 깨우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들은 세상 것을 대할 때 그동안 맛있게 느껴졌던 모든 것을 끊기 위해서 그것을 쓰게 여깁니다.
이전에는 돈이 맛있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맛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무탈한 상황이 맛있었습니다. 남편의 승진이 맛있었습니다. 자녀들의 형통이 맛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쓴 맛으로 여겨서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달게 느껴지는 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에 첫 번째 자리로 끌어들여 장자로 삼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을 상징합니다. 어떤 대상을 장자로 붙잡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좋고 맛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맛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쓴 나물을 먹듯이 ‘내가 세상에서 좋고 맛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사실은 맛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에 맛있게 느낄 뿐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전에는 세상 것들을 맛있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을 먹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게 되자 점점 하나님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전에는 그렇게 맛있게 여기던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쓴 나물의 의미입니다.
네 번째 유월절 규례는 어린양의 고기를 남겨두지 말고 남은 것은 태워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 것 이외에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잘못된 용도로 사용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주님! 2025년에는 재정 문제가 무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고기를 남겨서 다른 곳에 쓰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내 마음에서 첫 번째로 붙잡은 세상 것을 죽이는 일에만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문제입니다. 건강이 문제입니다. 나라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에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쓸 수는 없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남겨두지 말고 태우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세상 것을 첫 번째로 붙잡고 있는 상태를 종식하기 위해서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1절을 보면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유월절 음식은 천천히 앉아서 포도주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먹는 것이 아닙니다. 급하게 먹는 이유는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먹을 때의 마음가짐은 이 세상에 정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뜻하는 헬라어 엑소도스(ἔξοδος)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별세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을 출애굽과 똑같은 표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으려고 한다면 마음은 이 세상을 급하게 떠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시려는 별세의 다급한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 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없고,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내가 함께 죽었다는 고백도 할 수 없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을 때는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새해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회사에서 잘리게 생겼습니다. 자녀가 대학입시에 실패했습니다. 재정 문제가 있고 건강 문제도 있습니다. 친지 간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해부터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선민이자 믿음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마음의 첫 번째 관심거리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죽이고 하나님을 첫 번째 관심으로 삼음으로써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나의 참여와 헌신과 기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떠나야 합니다. 엑소도스가 출애굽을 의미하는 것처럼 별세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을 따라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급하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급하게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되, 남은 것은 다 태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다른 일에 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쓸 수 없습니다. 오직 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쓸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기 위하여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유지한다면 2025년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날마다 질이 다르고 결이 다른 새로움의 날들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를 악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 것이 첫 번째가 되는 상황만을 죽이고 또 죽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세상 것은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마음에서 첫 번째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질이 다르고 결이 다른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