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혼합적 전개로서의 儺禮
1. 儺禮의 역사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연등회는 불교와의 습합을 통해 전개된 고대의 무교였다.
옛날의 민족적 祭典인 제천의례가 불교적인 외형을 띠고 전승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국인 고려왕조가 유교주의의 세력에 의해 망하게 되자 불교적
외형을 가졌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자연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적 형태의 행사였기 때문에 유교주의 왕조의 억불정책 밑에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팔관 연등에 내장되어 있던 古來의 무교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除災招福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이에 응답하는 제례는 지속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례의 형태는 시대적 문화상을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유교주의를 채택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형태가 형성되어야만 했다. 산천제의가
周禮의 형식을 따른 것이 그 예라 하겠다. 慕華思想을 동반한 유교주의는 자연히 중
국의 제례풍습을 수입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 전형적인 것이 궁중의 나례 행사였다.
중국의 儺禮를 앞에 내세우고 무교적 전통을 지속해 나간 것이다.
나례는 예로부터 있었던 중국의 驅儺儀가 전해 온 것이다.
이것은 12월 그믐날 궁중에서 행하는 악귀역신의 驅逐을 위해 행하는 의식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고려 때였다. 그러나 나례가 성행하기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유교주의가 중국풍속까지도 숭상한 데 기인하기도 했지만,
季冬나례는 폐지된 중동팔관회를 대신할 제례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나례 행사가
특히 성행된 때는 태종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대(1400-1623)였다.
이미 년중 행사로 변한 구나의례이기 때문에 매년 왕조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除夜追儺 또는 王觀儺戱란 기사들이 실록에는 적지 않게 있다.
2. 儺禮의 구성
「세종실록」에 의한 나례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16세 사이의 동자 28명을 뽑아 가면을 씌우고 赤衣를 입힌 다음 채찍을 쥐게 한다.
工人 28명이 赤巾赤衣를 한다. 역신을 驅逐하는 주인공 方相氏 4인은 黃金四目의
가면에다 熊皮를 덮어쓰고 玄衣朱裳을 입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가면을 쓰고 적의를 입고 작대기를 쥔 唱師 4인, 執鼓 4인, 吹笛 4인들이 다 적건적의를 한다.
公服을 한 서운관 4인의 사회로 예의가 진행되는데, 우선 수탉을 잡고 술과
함께 차려 놓고 서운관이 儺者들을 이끌고 근정문으로부터 궁 내정으로 소란하게
북을 치며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상씨와 振子들이 궁중을 두루 다니며
소리치기를 “甲作, 비위 등 12신으로 하여금 惡鬼凶赫을 쫓아 너희들을 잡아 간장과
살을 도려내게 할 것이니 네가 빨리 달아나지 아니하면 12신의 밥이 될 것이라.” 한다.
끝난 후에는 다시 소란하게 북을 치며 광화문으로 나가되 다시 4隊로 나뉘어 사대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간다.
이러한 歲時驅疫儺禮가 중국에서는 본래 季春, 仲秋, 季冬, 연 3회씩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와서는 계동나례만을 행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를 무렵에는 나례란 나희를 포함한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성종(1460-1494) 때에 와서는 자주 逐疫을 위한 葬時나례와 가무의를
하는 綵棚나례를 구별하려고 했다.
연산군 때에 이르러 나례의 양상은 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례의 중심을
處容戱舞가 차지하게 된 데 기인한다. 처용희무와 나례는 다 같이 벽사진경의
관념에서 형성된 종교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연산군 때에 이르러 나례의 중심은
점차 국속인 처용무로 옮기게 되었다. 외양과 명칭은 중국의 신앙 풍습을 도입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무교적 벽사진경의 개념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의식에 있어서도 재래적인 처용무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3. 처용가무와 巫敎
우리는 무격신앙의 출발을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보았다.
거기에 무교의 중심사상인 가무에 의한 벽사진경이 표현되어 있었다.
그후 처용가무는 무교문화의 한 중심을 이루어 갔다. 고려 때에
이미 탈춤 처용희 또는 처용무가 있어 나례나 연례에서 공연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연산군 때에 처용무가 가장 성행했으며, 모든
구나의 뒤에는 반드시 두 번 처용가무가 상연되었다.
12월 除夕 전야의 구나의가 있은 후에 처용무를 두 번씩 연주하는데,
먼저 女妓가 처용가를 부른 뒤에 각기 오방색의의복을 입고 처용의 탈을
쓴 오방처용이 五方作隊하여 춤을 추도록 되어 있다. 五方神將은
악귀사신을 퇴치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믿는 데서 나온 구상이라 하겠다.
여기에 나오는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대표적인 무가의 하나이다.
이것은 춤과 함께 역신을 몰아내는 극적인 구상을 가진 노래이다. 여기에는
신라 때의 처용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가는 긴 역사 속에서
점차로 부연되며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례는 중국의 逐疫 행사를 도입한 것이었다.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 밑에 있었던
조선 일대를 통해 궁에서는 나례를 행했다. 그러나 그 내용인 즉 전통적인
무교 행사의 계승에 불과했다. 여기 무교가 지닌 외래 종교 문화 수용양식의
하나가 있고, 무교의 혼합적 전개양식의 하나가 있다.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에서... 인용글 입니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낙천님 고맙습니다.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