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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최 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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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지인(知人)과의 만남을 앞두게 되면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운 이즈막에도 가슴이 달뜨는 것은 어쩌면 잘 익은 알밤이 땅에 떨어지듯, 야생화의 씨앗이 날이 차서 바람에 흩날리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그 지인과의 인연이, 오래된 것일수록 맛이 나는 포도주처럼, 교류 시기가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래서 서로 간에 얽힌 사연이 많을수록 더 반갑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잘하면 오가는 대화를 통해 청정 수역에서 오묘한 형태의 수석 하나 건지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멋진 추억 하나를 건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정말로 의외의 전화를 받았다.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지 20년이 된 친구의 귀국 인사 전화였다. 현재는 서울의 동서네 집에 머물고 있는데 사나흘 후쯤 청주를 방문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친구가 방문하겠다는 사나흘 동안 나는 친구와 지냈던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이십오륙 년을 함께 한 친구였다.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한데 고집이 좀 센 편이었다. 사회성과 남자다움은 그가 앞섰고, 공부에 대한 머리는 내가 좀 앞섰었다. 사회로 나온 뒤에도 그러한 점은 그대로 유지되어 그는 사업 쪽에서 수완을 보였고, 나는 공직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상업을 하던 그가 서울로 옮긴 것이 서른 중반쯤이었고, 그 이후로 둘의 사이는 조금 소원해졌다. 자연히 그와 관련된 소식은 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울로 옮긴 그가 처음으로 사업을 한 곳은 잠실 근처의 아파트 단지였고, 업종은 신발류였다. 그러다가 부동산 중개업으로 업종을 바꾸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소식이 뜸해졌다.
한참 후에 접한 소문에 의해 그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민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에 올리던 이민 사유는 부인의 불임이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이가 잉태되지 않아 입양을 했는데 사실을 숨기고 싶어 먼 남미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소식을 풍문만으로 전하던 그가 이십여 년 만에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전갈을 해 온 것이었다.
틈날 때마다 머릿속은 오랜만에 방문하는 그를 즐겁게 해 줄 일정 마련에 분주했다. 그러나 도통 적당한 일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질펀하게 술이나 마시며 취기 속에서 그 동안의 삶을 이야기하기엔 오랜만의 귀국 일정이 빠듯할 그이기에 소홀한 접대가 될 듯싶었고, 인근의 유명 관광지를 데리고 다니기엔 그가 나고 자란 고장인데다 이 도시가 그 동안 변한 것이 별로 없어 탐탁치를 않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해 나는 아내의 의견을 구했다.
“불알친구라니 생각할 게 뭐 있어요? 당신의 주특기 있잖아요? 그 왜 상대방의 손목을 강제로 틀어잡고는 과거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거. 그 친구하고도 그렇게 해요. ……외국에서 이십여 년을 살았으니 그것이 어울릴 듯싶네요.”
비웃음이 조금 섞인 무성의한 의견인데도 나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산 설고 물 설고, 거기에다 언어와 종족까지 낯선 먼 이국땅에서 이십여 년을 지낸 몸이기에 자신의 과거가 스민 추억의 장소를 순례하며 그 시절의 회한에 젖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던 것이다.
대충 마음속으로 일정을 잡아 놓고 그의 방문을 기다리던 나는 막상 그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참으로 엉뚱한 면모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만나면 당연히 가져야 할 그 동안의 생활에 대한 서로간의 변모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이 대뜸 자신이 쓴 글들을 모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분명 국내에 거주할 때의 그는 돈만을 좇아 정신없이 내닫던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그는 이미 돈에 있어서는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 낸 뒤 돈 많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풍요와 여유를 밑천 삼아 문화 속에 발을 깊이 들여놓고 있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스크랩북에는 그가 현지 한국어 신문에 고정으로 연재한 잡문을 모은 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제목만을 훑었는데도 내가 그를 이끌고 들어가고자 했던 과거들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스크랩북의 대강을 더듬기를 기다려 그는 성공한 사업가의 훌륭한 자기 갈무리를 보여주는 근황을 차근차근 전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머릿속에 그려 놓은 일정이 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이튿날, 나는 거꾸로, 방문객이 되어 그가 마음속으로 미리 정해 놓은 순례의 길을 다소곳이 따랐다. 우리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차례대로 되짚는 일정이었다. 그것은 그가 현지 한국어 신문에 기고한 내용들을 차례대로 더듬는 일정이기도 했다.
아득하게 먼 세월 속의 일인데 직접 다니며 현재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생생하게 그 시절이 떠올랐고 감회에 젖었다. 나는 그가 쓴 글들을 펴 들고는 유홍종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책 속의 문화 유적지를 더듬듯이 우리의 과거가 스민 장소를 함께 차근차근 더듬었다. 추억 속의 장소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글을 통해 골똘히 들여다본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2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탁구장이 있던 자리였다. 진작부터 상업적인 이익을 기대할 수가 없어 70년대 후반부터 하나하나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것이 탁구장이어서 우리가 젊은 시절을 채 보내기도 전에 도심에서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탁구장인데, 당시만 해도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던 탁구장 중에서 단연 인기를 끌었던 그 탁구장은 국가 대표를 지낸 사람이 운영하던 곳이어서 항상 인파로 득실거렸다. 마침 우리 중의 하나가 주인과 고등학교 동문이어서 호형호제를 하며 드나들었던 그곳은 지금은 이 도시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가 그 사건과 인연을 맺던 날은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971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1971년의 봄날이라면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억의 저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편린들을 억지로 일깨워 보면 바로 박정희가 자신의 3선을 저지하려는 온갖 세력을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굴복시킨 뒤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선거전이 불을 뿜고 있던 시절이었다.
음양으로 가해지는 각종 압력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다른 경쟁자들이 겨루어 보아야 이길 수가 없는 승패가 뻔한 경기였지만 이제나 저제나 행여나 하고 머리를 드미는 정치인이 그때도 들끓고 있어서 박정희 김대중을 비롯한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포스터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화제는 단연 대선이었다.
문제의 그날, 우리는 목련․장미 등의 꽃나무를 심은 화단이 다리의 한편에 조성되어 있어 ‘꽃다리’로 불렸던 남사교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잔뜩 물 먹은 솜처럼 음습하게 가라앉은 이 나라의 현실을 탓하며, 더욱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네 신세가 처량하고 원망스러워, 죄 없는 소주만을 목울대가 벌렁거리도록 털어 넣고 있었다.
당시의 무심천은 술판을 벌이기에 아주 적절한 분위기를 시민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80년대로 들어서며 무심천 주변에 벚나무 단지를 조성하고는 널찍한 포장도로를 개통해 이즈막에는 봄날이 되면 시민의 날 행사니 뭐니 해 분위기가 달뜨며 북새통을 이루게 되지만 당시에는 2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수양버들들이 비달사순의 모델처럼 윤기 나는 머릿결을 바람에 날리며 너울너울 춤추고 있어서, 한적한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기 제격인 풍경이 무심천을 중심으로 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두 시간 이상 꽃다리 근처의 잔디밭에 주저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는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취기가 우리의 정열과 패기를 흔들어 일깨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잠자는 영혼이 부스스 깨어 일어난다 하여 달걀로 바위를 칠 수는 없는 일. 해서 당시 유행하던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며 송창식의 ‘고래 사냥’을 이장희의 ‘그건 너’ 등과 섞어 맥없이 흥얼거렸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것에도 지쳐 도심의 탁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단이 벌어진 것은 우리가 빈 탁구대 하나를 차지하고는 막 경기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복식으로 나뉘어, 술과 안주를 상품으로 걸고 막 경기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일행 하나가 스포츠머리를 한 건장한 체구의 사내 둘에게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왔던 것이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 격으로 벌어진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아연실색을 하였는데 탁구장 안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인파가 맥을 놓은 채 이쪽의 사태를 예의 주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동의 원인을 알게 된 우리는 실소했다. 비틀걸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오던 녀석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박정희의 선거 포스터를, 요원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반체제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북 찢어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실소에 그칠 정도로 가볍게 진행되지 않았다. 선거법 위반으로 즉시 기동 순찰차에 실려 구금된 그는 경찰서를 거쳐 검찰청으로 압송되었다. 화급해진 우리는 지도 교수에게 달려갔다.
이후 상황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지도 교수는 교무처장과 학생처장, 총장에게 협조를 구했고, 넷은 황급히 검찰청으로 달려가, 우매한 제자가 제 길을 찾도록 선도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결국 친구는 이튿날 훈방 조치되었다. 돌아온 친구는 일주일 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청춘은 그렇게 시들어갔다. 이후로도 한참동안 대학생을 포함한 젊음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유일한 탈출구는 몇 년 후의 봄날을 기대하며 그 시각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봄날은 무려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서야 찾아왔다.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발생한 연후에야.
이제는 건물마저 새로 지어지고 전자오락실이 들어차 괴상한 전자음이 고막을 때리도록 쏟아져 나오는 옛 탁구장 자리를 우두커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인데 그가 문득 물었다.
“벽보를 찢었던 친구, 지금 무얼 하며 지내? 내가 고국을 떠날 무렵엔 박사 학위를 받겠다고 뛰어다니더니.”
“대학 교수.”
“대학 교수?”
“응. 법학을 강의해.”
“법학을? ……그 참 아이러니로군.”
생각해 보니 그랬다. 기본법마저 제한하며 지킬 것을 억지로 강요하던 수용하기 힘든 법이긴 했지만 그것을 위반해 고초를 겪은 친구가 30년 세월의 이쪽에선 대학 강단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법학을 강의하고 있다니……. 그의 말대로 아이러니가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런 짓을 했던 친구가 법학을 강의한다는 사실을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기에 가끔은 피차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교환하며 호젓한 음식점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사이인데 이국에서 날아와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해내는 그를 만나기 이전에는 교수라는 녀석이 엉뚱한 소동을 만들어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쓰디쓴 경험을 겪었던 법학 교수로서는 젊은 날의 호기가 불러왔던 한때의 부끄러운 고초를 되살리기 싫어 억지로 외면했을 터이지만 그 소동을 조금은 재미를 가지고 뒷전에서 바라본 내 쪽에서는 안주 삼아 화제로 올리고는 약을 올리며 야금야금 씹을 수도 있는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3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70년대의 후반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디스코텍이 있던 자리였다. 내부는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상호만은 ‘남태평양’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달고 있던 그곳에는 지금 손바닥만 한 옷가게들이 여러 개 들어차 휘황찬란한 조명을 단 채 행인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이른 친구와 나는 마침 점심때였기에 ‘남태평양’이 자리했던 맞은편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분식집의 내부는 이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가 젊은이들뿐인 듯한 요즈음의 거리 풍경대로 청춘으로 흘러넘쳤다. 눈을 씻고 보아도 20대 이상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비어 있는 창 쪽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남태평양’을 드나든 것은 박정희 정권의 말기 현상이 도처에서 발견되던 때였다. 체제에 반하는 말 한 마디에도 가차 없이 구금되던 음울했던 그 어느 날, 우리들은 친구의 하숙집에 둘러앉아 바둑을 두며 농담 삼아, 박정희 정권이 어차피 우리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바위인데, 푹 쉴 수 있도록 학교 문이나 덜컥 닫혔으면 좋겠다는 식의 농담을 나누었는데, 정말로 그 날 저녁 전국의 대학 문을 닫아걸겠다는 보도가 나왔다.
1972년 10월 17일, 이른 바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의 정치 체제를 개혁한다’는 미명아래 자행되었던 10월 유신 선포였다. 숨차게 계속된 라디오 뉴스에서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며, 정당 활동이 중지되는 것은 물론, 헌법의 일부까지 효력이 정지된다는, 제멋대로 식의 비상조치 발령 끝에 이를 심의하기 위한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된다고 알렸다.
이튿날,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 본 학교 정문 앞에서는 군화소리가 어지럽게 난무해 낯선 나라의 낯선 땅을 이방인이 되어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장 병력들은 방독면까지 걸친 자세로 버티어 선 채 어느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내리는 동토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속절없이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정문 앞의 목로주점에 앉아, 이 나라를 이끄는 지성인입네 하며 오만함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귀싸대기를 보기 좋게 후려갈긴 무장 병들의 모습을 멀리 둔 채 생두부를 안주로 하여 ‘백조’ 담배를 피우며 막걸리를 마셨다.
점심마저 거른 채 그렇게 대폿잔을 비우던 우리가 저녁 어스름이 되어 몰려간 곳이 바로 ‘남태평양’이었다. 잊자, 잊자, 우리의 나약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자위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우리들은 쉽게 취기에 젖었다.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을까. 어느 순간 고개를 드니 일행 중 두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홀에서 광기 어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침침한 어둠 속을 살폈지만 둘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밖으로 나가니 거기 정문 옆의 공터에서 둘이 불량배들에게 끌려나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급히 일행을 데리고 나와 함께 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물러났다.
그렇게,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튿날, 우리는 거대한 군사 독재 집단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뒤, 어두운 거리의 무법자들에게도 늘씬하게 얻어맞고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귀가했다.
같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 그가 물었다.
“그때 일을 벌였던 녀석들, 지금 뭘 하고 있어?”
“응?”
“불량배에게 싸움을 걸었던 녀석들.”
한 번도 반추하지 않던 일이어서 누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가 내 기억을 돕지 않았다면 당사자들이 누구였는지 끝내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 녀석은 지금 자그마한 건설 회사를 하고 있고, 한 녀석은 지방 신문사에 있어. 신문사에 있는 녀석은 부국장이라지, 아마.”
말하며 나는 다시 부끄러움에 젖었다. 먼 이국에서 날아온 사람이 당시의 상황을 저리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장소 그 인물을 항상 옆구리에 낀 채 살아가는 사람이 이 모양이라니 싶었던 것이다. 곁에 두고 살아가니 추억이 그저 일상처럼 생각되었던 것일까?
4
이번에 우리는 10년 세월을 껑충 건너뛰었다. ‘다정집’이 있던 자리.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닭 내장이며 순대를 보골 보골 끓여주며 술자리를 너무 자주 갖는 우리네 젊음을 곱게 나무라기도 했던 그곳엔 지금 은행이 들어 있어 바쁜 사람들의 발걸음이 출입문을 향해 총총히 다가서고 있었다.
우리가 그 집을 자주 들락거린 것은 사회에 진출해 한창 기성세대와의 세대 차이를 느끼며 갈등으로 부대끼던 시절이었다. 나는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5년쯤이 되었을 무렵이었고, 그는 변두리에 자그마한 광고 회사를 차려 놓고는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많이 바뀌어, 학창 시절의 우리를 그렇게도 번민하게 하였고, 초라하게 하였고, 방황하게 하였던 통치자가 반 년 전쯤 부하의 총탄에 맞아 이승을 떠나 남한 땅 전체가 온기와 냉기를 두루 마셔 가며 쓴 입맛을 쩝쩝 다시던 때였다. 당시의 상황을, 박정희의 죽음 직후로 거슬러 올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을 잠시라도 살펴본다면 후진국의 정치 생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한심한 순환 고리의 그 어느 한 시점이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둔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변변한 후계자마저 없었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바싹 얼어붙었다. 그러나 처음 며칠 동안 숨죽이던 모두는 염려했던 극한 상황이 한반도를 비껴가자 태평성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모두는 3김이 노래하는 ‘서울의 봄’을 보며 화사한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느 집단이든 틈새를 노리며 은인자중하는 무리가 상존하기 마련인 법. 이 나라의 심장부 저변에 똬리를 튼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신군부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만주주의의 꽃봉오리를 무참하게 짓뭉개며 우람한 군화 소리와 함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세상은 다시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서울의 봄’을 노래하던 모두는 시래기처럼 축 늘어졌다.
이후 상황은 신군부의 각본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12월 12일 밤을 기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중장으로 재빨리 올라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꿰차더니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빌미로 5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그럴 듯한 이름의 초권위를 지닌 단체를 만들더니 자신이 상임위원장이 되어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 하였다.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던 모든 국민의 가슴에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체증처럼 묵직하게 들어앉았다. 갈팡질팡하는 국민에게 앞으로 나아갈 나침반조차 쥐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는 납작 엎드려 침묵한 채 분을 속으로 속으로만 삭였다.
우리가 ‘다정집’을 들른 것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밤 10시 이후의 통행이 제한을 받던 때였다. 냉엄하게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불태워 학창 시절엔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던 사람이었지만 이미 사회 물을 먹은 지 제법 된 그쯤엔 아무런 대책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 이 땅을 더욱 어둡고 음습하게 몰아간 박정희가 야속하게만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닭 내장 찌개를 보골 보골 끓이며, 사이사이 술잔을 홀짝이며, 우리는 그 즈음 매일처럼 쏟아져 나오던, 이 땅을 끝 간 데 없는 동토로만 몰아가던 계엄 사령부의 서슬 퍼런 포고 내용이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입에서 입으로만 은밀하게 전해져 우리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저들이 유언비어라고 단정했던 소문들을 목소리를 죽이며 화제로 삼았다. 역으로만 흘러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의 물길을 옳은 길로 돌릴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채 그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통금 안내 사이렌이 울리는 10시를 넘겼다. 걱정이 된 주인이 자고 갈 것을 권했지만 그나 나나 집에 전화조차 없던 가난뱅이 시절이어서 걱정으로 잠을 지새울 늙은 부모를 생각하며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10시를 훌쩍 넘겨 11시가 가까워진 거리는 가로등만이 멍청하게 졸고 있을 뿐 정적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기 적당한 후미진 거리를 택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금을 위반하면 20일 정도의 구류에 처해진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어 몸은 한껏 졸아들었다. 가끔 군용 트럭이며 지프가 휑하니 뚫린 어두운 공간을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다. 모든 정물이 정지한 채 희미한 불빛만이 냉랭한 공기 속을 떠돌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군용차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움직여 모충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데 검은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누구야?”
심장이 딸깍 정지할 듯한 충격 속에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전투복 차림의 두 명의 경찰관이었다. 내가 나섰다.
“술을 마시다가 그만…….”
“이거 정신 나간 친구들 아냐?”
곧바로 연행되리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울 가족들 생각도 스쳤고, 노한 상사들 얼굴 또한 스쳤다. 공포의 시간이 한참을 흘렀다. 잠시 둘이 수군수군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둘 중의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작게 말했다.
“이보게들, 모충교로 가면 지금 계엄군이 지키고 있으니 무심천 하상으로 내려가서 물길을 건너뛰도록 해.”
아!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감도는 잔혹한 거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변해 있을 때는 경찰도 민간 편이 되어 있었다. 그때 경찰은 한쪽 발을 슬쩍 뒤로 빼어냈을 뿐인데도 그 고마움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훈훈한 온기를 불러일으켰다.
박정희의 죽음 직후엔 모두가 그렇게 조금씩 양보하며 이 나라를 지켜냈다. 다가올 불확실한 상황 탓으로 모두가 조금씩 조금씩 양보하며 이 사회를 평온하게 지켜냈다. 무법자처럼 거리를 질주하던 택시들도 철저하게 법을 지켰고, 밤이슬을 맞으며 담을 타고 넘던 도둑들마저도 자중했다.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분출되던 각종 악이 신문지상에서 몽땅 사라졌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대한민국 국민들다운 국민들을 그 며칠 동안 생생하게 목도(目睹)할 수 있었다. 비록 며칠 후에 정권욕을 가진 신군부가 뛰어드는 바람에 국민 모두가 쉽게 과거의 습성으로 되돌아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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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상당 산성을 넘어 보은 쪽으로 한참을 나간 한적한 야산이었다. 그곳을 향하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그와 나 사이에 얽힌 추억이 없어 의도를 찾느라 그의 얼굴을 서너 차례 쳐다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향의 자연 경관을 오랜만에 더듬으려는 의도려니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외려 시내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상당산성 쪽이 나을 것인데 싶어 그곳까지 굳이 차를 몰게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의도가 어쨌건 도로를 버리고 걸어 올라가는 산길은 상쾌해 숲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보송보송한 공기가 쫓아 나와 봄의 화사함과 함께 바닥에 몸을 깔며 우리를 반겼다. 양옆의 둔덕으로는 찔레꽃이 질펀했다. 분명 흰색의 꽃들인데 흘러간 노래 속에 붉은 색으로 표현되는 것을 지적한 언젠가의 내 글을 생각하는데 그가 불쑥 물었다.
“자네는 잃어버린 형제 없지?”
내게 묻는 말이되 그의 시선은 먼 등성이를 향해 있었다. 질문의 초점을 몰라 애매한 답변이 나갔다.
“사람도 참, 갑자기 잃어버린 형제라니?”
“먼저 저 세상으로 간 형제 말이야.”
“아하, 그런 슬픔. 없는데…….”
고갯길을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자 어느 동네인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아직 도시물이 덜 든 자그마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굴뚝에서 솟는 밥 짓는 연기 가닥쯤을 기대할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제 그런 기대는 도시의 변두리에서마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저곳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야.”
이십여 호가 될까 말까한 동네였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납작 엎드린 것이 꼭 소꿉 같았다. 아담한 마을의 평화로운 풍광 뒤로 화사한 햇살과 연둣빛 들판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네는 초등학교를 청주에서 다니지 않았나?”
“그랬지. 하지만 그 이전……취학 전 어린 시절을 저곳에서 보냈어.”
그는 평평한 돌을 찾아 엉덩이를 걸쳤다. 그의 시선은 옅은 구름 몇 조각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동녘 하늘에 멈추었다. 감청색 바탕의 표지 위에 뜯다 만 솜뭉치처럼 흩어진 그것들은 황소처럼 유유자적 흘렀다. 그의 눈에서 물기가 반짝이는 듯싶어 유심히 살폈는데 착각인 듯 초점 풀린 멍한 시선이었다. 나도 그의 옆에 엉덩이를 걸쳤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다. 훈기를 품은 바람은 저 아래 동구 밖에서 한창 움트기 시작한 느티나무 잎새들을 살짝 흔들어 놓는가 싶더니 어느새 들판을 가로질러 냅다 골짜기로 달려들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찔레꽃 이파리들이 후르르 빗발처럼 흩날렸다. 내 시선이 푸르름이 제법 짙은, 한국화 속의 원경처럼 겹겹으로 포개어진 산등성이들을 더듬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을 하나 잃었어. 어린 시절에…….”
그는 먼 시간의 그늘 속에 엎드린 가슴 시린 상처를 봄기운이 가득한 풍광에 실어 슬쩍 디밀었다.
그와 나의 어린 시절에는 찬바람이 가득 찬 가슴으로 주린 배를 움켜잡은 채 보릿고개를 울며불며 넘던 한 많은 세월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의 가난은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허기에 지친 삶들이, 병마에 신음하는 삶들이, 도시와 농촌의 구별 없이 도처에 평상처럼 널려 있었다. 그 세월의 어느 틈바구니에 가슴 아픈 사연이 끼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동생을 두고 내가 지은 시들이 있네. 한 편만 들어보겠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동조했고 그는 자신이 지었다는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병실 안/ 링거병 위/ 소리 없이 봄비 내리면/ 혈관 언저리/ 방울/ 떠오르는 동심원/ 어린 시절/ 아우와 소꿉놀이하던/ 들풀 찧은 사금파리와/ 아롱/ 아롱/ 번지던 동심원/ 보릿고개 힘겨운 봄날/ 아우와 함께 앓던/ 장질부사/ 모자라는 젖도/ 겨우 끓인 밥물도/ 수소문해 구한 양귀비 뿌리도/ 큰놈인 내 입에만/ 꾸역꾸역 넣어 주시던 어머니/ 야속한 맘에/ 입술 깨물어/ 힘없이 돌아누운/ 아우 눈가에/ 하늘/ 하늘/ 일렁이던 서러운 물빛 동심원/ 지루한 봄날/ 찔레꽃 새순/ 아릿한 맛도/ 혀끝 어지러워/ 여우비 오는 새벽/ 서당골 언덕배기/ 동글/ 동글/ 해맑은 동심원 되어/ 혼자 먼 길 떠나간 아우
제목이 ‘아우 생각’이라고 일러준 그는 시선을 들어 옅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는 하늘로 돌렸다. 여전히 구름들은 황소처럼 유유자적 흘렀다. 가난과 병마에 시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도 함께 섞여 황소걸음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쁘게 내달리다가도 문득 동생의 모습……하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젠 얼굴마저도 희미해져 사진을 보아야만 동생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지만……그 애의 생각을 하게 되면 어머니의 정을 혼자만 챙긴 듯싶어 한없는 죄책감에 빠지기 마련이야. 해서……지금의 내 두 아이들에겐 정을 치우침 없이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있지.”
그렇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속에 자리한 슬픔 가득한 퇴색한 사진을 슬쩍 접었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가 둘인가?”
내 말에 줄곧 하늘을 더듬던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응. 아들 둘.”
“둘 다 부인이 낳았고?”
“이 사람, 무슨 소리야? 무슨 얘길 들었나?”
“소문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서…….”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도 그런 얘길 들었네. 내가 입양한 아이 때문에 이민을 갔다는 소문. ……사실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주말마다 아동 보호 시설을 쫓아다니며 봉사 활동을 한 착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아내의 몸으로 잉태를 했든, 입양을 했든, 자랑스러운 내 자식인데 남의 눈이 무서워 도피를 하겠나? ……아이 둘은 모두 아내의 진통을 통해 얻은 녀석들이야. 그것도 보통의 신생아들보다 일, 이 킬로그램은 더 커서 무던히도 애를 태우다 나온 녀석들이지.”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랬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심지어 시험을 눈앞에 둔 주말에도 친구들을 설득해 봉사 활동에 나서곤 했었다.
“이민 생활이 지겹지는 않나?”
“처음엔 앞만 보고 정신없이 내달렸지. 헌데 돈을 움켜쥐게 되니 옛날의 이 거리가 미친 듯이 보고 싶더군.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지.”
“돌아오지 그래?”
“돌아오긴 힘들어. 그곳에 이룬 기반을 버리고 오려니 그 동안의 노력이 너무도 아까워. 생사를 넘나들 정도의 위기마저 두세 번을 겪었어.”
말하며 그는 엉덩이를 일으켰다. 서녘 하늘에 석양이 그득했다.
6
다음날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 그와 나는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해장국집에서 술을 마셨다. 피곤한 탓인지 취기는 쉽게 눈가로 몰려들었다.
우리의 대화의 반은 지나간 세월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50년 가까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많은 일들 중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들로만 엮어져 있는 것이 그와 내가 대학을 다니던 4년을 포함한 30년 저쪽의 10년간이었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더듬더라도 격랑의 소용돌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3선 개헌, 10월 유신, 10․26, 12․12, 5․17, 광주 민주화 운동 등 굵직굵직한 일들만으로 이어진 숨 가쁜 세월이었다.
유리창 밖의 거리는 활기로 넘쳤다. 화사하고 번잡한 조명,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승용차들, 어깨를 맞댄 채 거리를 휩쓰는 청춘의 무리,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소음 소음들, 그런 것들로 가득한 이 거리의 옛날에 비참하고 음울했던 우리의 청춘이 엎드려 있었다. 보상받은 길 없는 우리의 청춘은 고작 삼십 년 저쪽의 일들인데 망각 속으로 사라져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옛일이 되어 있었다.
10시가 가까워 우리는 일어섰다. 내 집에서 잘 것을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외국 습성에 물든 사람답게 민폐를 생각해 호텔을 예약한 모양이었다.
이튿날은 직장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우리는 거리에서 헤어졌다.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 우리의 등 뒤로 지금은 60대에 가까운 나이로 남편과 자식의 시중들기에 지쳐 있을 ‘장은아’라는 여가수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젊음들 사이를 헤치며 씩씩하게 숙소를 향하고 있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감동에 젖었다. 우리들의 소중한 추억들이 눈 조각처럼 널려 있는 이 도시의 오밀조밀한 거리들. 그 거리를 어린 시절의 친구와 함께 거닐게 되니 과거라는 견고한 껍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당시의 삽화들이 그림의 주인공과 함께 확대되어 눈앞에 서곤 했다. 그것들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감동과 함께 밀려들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발길을 옮기며 나는, 너무도 쉽게 흘러간 세월을 옛것으로 만들어 망각 속에 파묻어 버리는 한국적인 내 습성을 탓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실마리를 잡아야만 되찾아졌던 기억들이기에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열심히 실마리를 이으리라 생각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곳이기에 갓 허물 벗은 매미처럼 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 도시이지만 열심히 사랑하자 하였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하자 하였다. 그래서 걸음을 옮기는 사이사이 항상 보던 모습들이 전개되는 거리임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모습을 담듯 풍광 하나하나를 세심히 더듬었다.
※ 인용된 시는 박천호 시인의 ‘아우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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