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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규칙을 외면한 나의 파격 행보>의 줄거리 :
파격(破格)은 일정한 규칙이나 원칙, 격식, 관례 등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며,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뜻합니다. 주로 파격 인사, 파격 승진, 파격 댄스, 파격 제안 등 기존의 틀을 깨는 놀라운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파격이란 일상적이지 않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여 밀착한 상태에서 일상을 살면, 모든 말과 행동이 파격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파격적이다 보니 이런 파격이 일상이 됩니다.
규칙을 외면한 나의 파격 행보
(여호수아 17:1~11)
3.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 하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기업을 주므로
5. 요단 동쪽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으니
6. 므낫세의 여자 자손들이 그의 남자 자손들 중에서 기업을 받은 까닭이었으며 길르앗 땅은 므낫세의 남은 자손들에게 속하였더라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본문은 므낫세 지파에 땅을 분배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길르앗 땅은 요단강 동편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서편의 므낫세 지파의 땅은 가문을 따지자면 여섯 분깃으로 할당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아버지의 항렬과 나란히 분깃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각각 분깃을 받았기에 요단강 서편 므낫세 반 지파의 땅은 열 분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규칙을 외면한 나의 파격 행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파격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파격이 일상이고, 일상이 파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파격적인 행보로만 살 수밖에 없는데 본문이 바로 그 말씀을 해주십니다.
파격(破格)은 격식을 깬다는 뜻입니다. 격식, 관례, 원칙, 관습, 규칙 같은 것들을 깨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를 파격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입사 한 달 만에 과장으로 승진한다면 파격 인사라고 할 것이고, 댄스의 격식을 깨면 파격 댄스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관련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차원을 완전히 달리하는 제안이 있다면 파격 제안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패션계에서는 파격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됩니다. 남녀 한 쌍이 명동에 나타났는데 남자는 수영복에 넥타이를 매고 여자는 수영복에 하이힐을 신었다면 파격적인 패션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격적인 일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3절을 보면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라고 했습니다. 헤벨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요단강 서편에서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수기 27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섯 번째 아들인 슬로브핫은 일찍 죽었고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이 있었습니다. 이에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와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슬로브핫 가문의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는 것은 옳지 않고 자기들에게도 땅을 분배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결국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땅을 분배하기로 결정하였고, 실제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여호수아 때에 분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여섯 분깃이 되어야 할 땅은 열 분깃이 되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분배받았다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을까요?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기에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민수기 27장과 36장에서 반복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다시 언급됩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겨졌기에 물건처럼 매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물건으로 여겨지는 여자가 가문의 땅을 상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땅을 분배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잠시 뒤에 잊히면 그만인 사소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어떻게 이러한 파격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땅을 분배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기들이 땅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파격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이것이 당시로서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는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봅니다. 그 당시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 분배를 요구한 것은 대낮에 명동 한복판을 수영복만 입고 활보하는 것 이상의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여자가 자기 이름으로 땅을 요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철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구를 소리치며 내쫓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그렇게 했다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스라엘의 여자들로부터 미쳤다는 비난을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식을 뛰어넘는 괴이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기인(奇人)이라고 부릅니다. 땅 분배를 요구한 슬로브핫의 딸들은 기인의 행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않던 모세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다만 모세도 내심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시기에 하나님을 간과할 수 없어서 여쭙기는 하지만 내심으로는 여자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딸들의 요구대로 땅을 분배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강릉에 사는 저를 갑자기 대통령으로 삼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슬로브핫 딸들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7장 3절을 보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와서 한 말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죄로 죽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처럼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고라는 레위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민수기 16장 3절을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라 무리는 이처럼 모세와 아론에 저항했습니다. 이때 르우벤 자손 중의 일부가 가담했고, 이스라엘 회중의 대표 250명이 동참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지를 하나님께 직접 묻자는 의미에서 250명 대표에게 향로를 들고 오게 합니다. 이때 고라 무리와 르우벤 자손 일부가 땅이 입을 벌려 삼켜졌고, 회중의 대표 250명은 향로에서 불이 나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슬로브핫 딸들은 아버지가 여호와를 거슬러 고라 무리와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음을 굳이 언급했습니다.
고라 무리가 주동한 모세와 아론을 향한 저항 운동은 이스라엘의 전민족적 화젯거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 250명이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슬로브핫도 땅을 분배받는 위치에서 보면 대표 중에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전체는 모세와 아론을 표적으로 저항 운동에 가담하거나 상황을 지켜보던 상태였습니다. 이때 슬로브핫은 가족을 다 모아놓고 고라 무리에게 찬동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던 것 같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여호와를 거슬러 고라 무리에 들지 아니했음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슬로브핫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백성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고라 무리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겠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모세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다만 슬로브핫의 딸들이 단순히 아버지가 고라 무리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모세 앞에 나왔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올바르게 살다 죽은 것과 여자들이 땅을 상속받을 수 없도록 정해진 철칙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아버지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다면, 딸들도 믿음의 사람으로 살면 될 뿐입니다. 굳이 아버지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과 딸들이 땅을 분배받는 것을 연결할 수 있는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무엇을 근거로 땅을 분배받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갖고 계신 의도가 마음에 각인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 딸들은 아버지의 소유로 여겨졌기에 아버지가 받는 땅을 대신 상속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러한 철칙보다도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느냐는 사실을 더 비중 있고,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매 순간 의도를 갖고 계시고, 선민은 그 의도를 올라타야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딸들은 상속받을 수 없다는 철칙 따위보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따끈따끈하게 흘러나오는 의도를 올라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파격 행보의 근거입니다. 대낮에 명동 한복판에 수영복만 입고 나가는 파격적 옷차림을 감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따끈따끈한 의도를 나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그 의도를 올라타는 것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맹신하며 좇는 어떤 철칙이나 규칙보다 더 우선적인 사실임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만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따르던 철칙을 뛰어넘게 됩니다.
사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므낫세 지파에 분배된 땅의 육 분의 일을 얻고, 그것을 다시 다섯 등분으로 쪼개서 자기 땅으로 할당받는 일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정복한 것이나, 칭기즈칸이 유럽까지 정복한 것이나, 광개토대왕이 요동과 만주까지 점령한 사건들의 규모에 비하자면 사소한 일입니다. 다만 이들은 지구상에서 넓은 땅을 정복했을 뿐이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온 세상에 통용되던 철칙을 뛰어넘는 파격을 일으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던 철칙의 장벽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왕들이 말을 타고 땅을 정복하는 자들이었다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하나님을 가지는 자들이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행동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차원에서는 작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훨씬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왕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위한 소모품이었다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따끈따끈한 의도를 올라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모든 철칙, 격식, 원칙, 관례, 관습,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서 살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없는 때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따끈따끈한 의도를 올라타는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나 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규칙이나 격식을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것에 맞춰서 기계적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통은 끊어지고 맙니다. 규칙, 원칙, 관습, 상식, 격식에 익숙해진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신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자동적 기계적으로 관습과 상식과 규칙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뿐이라면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이나 상식이나 관습 등을 버리고 무조건 파격 행보를 해야만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우리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옷 입습니다. 지금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밀착하게 되면 몸이 남아 있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놀라운 삶이 이루어집니다. 규칙이나 원칙을 따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매일매일 움직이는 나의 행동이 규칙이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등교하는 시간은 규칙적입니다. 직장인이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도 규칙적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 안에서 실제로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다면 어떤 식으로 파격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기억하며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합니다. 그러면 규칙을 지키더라도 파격이 됩니다. 어제도 8시 반까지 학교를 갔는데 오늘도 8시 반까지 학교를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밀착하면 오늘이 완전히 새로운 날인 것처럼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8시 반까지 학교를 가는 겁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마음이 이 세상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가 되면, 사회적으로 내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규칙과 원칙과 격식 같은 것들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흘러나오는 따끈따끈한 의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밀착한 상태에서 회사에 나가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생긴다면 그것은 파격이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회사에 아무런 저항감이 생기지 않아서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더라도 그것은 오늘 새로운 파격이 됩니다. 파격인 이유는 규칙으로 정해놓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똑같이 일하는 것 같아도 오늘 하나님이 8시 반까지 회사에 나갈 것을 의도하고 계심을 따르기에 파격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실제로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밀착할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어제 8시 반까지 갔기 때문에 오늘도 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8시 반까지 가라고 하시는구나’라고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삶은 규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규칙 안에서 움직이게 하시는 것이지, 내가 규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정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해를 보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도가 해를 뜨게 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착이 없다면 일출과 일몰은 자연법칙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하나님과 먼저 밀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출조차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신비한 현상이 됩니다. 반복되기에 자연법칙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자연법칙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일출과 일몰이라는 현상을 일으키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는 것이 이론이 아닌 실제라고 하니 ‘설교하는 본인은 얼마나 파격적으로 살아가느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제 삶에서 일어난 파격은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유학을 갔던 것도 파격적인 계기였습니다. 제가 유학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독일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것도 파격입니다. 규칙이 적용된 것도 아니고, 관습이 적용된 것도 아닙니다. 유학 준비를 아무것도 못 한 상태에서 공부를 하는데, 학교에서는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해야 박사 코스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제대로 진행하려면 1년 반에서 2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6개월 만에 세 고전어를 다 통과했습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어학 실력이 있어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 그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유학이었기에 준비도 없었습니다. 독일어도 잘 못하는데 고전어까지 요구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했던 것은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던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하나님과 밀착하고 살았던 세월이 지나가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6개월 동안 고전어 세 개를 다 통과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과 학과장님이 저에게 외국인 학생으로서 고전어 세 개를 6개월 만에 통과한 것이 대단하다고 편지를 다 쓰셨습니다. 제 논문을 보고 교수님이 기적이라며 수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파격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이 어떤 목사를 길러내겠다는 상의 없이 수업을 하고 커리큘럼을 짠 것 때문에 제가 학교를 다 뒤집어 놓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난 이야기들을 말하자면 파격은 끝이 없습니다. 제가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나 광개토대왕처럼 이 세상에서 지평을 넓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가졌습니다. 십자가 생활화 때문에 하나님을 제일 먼저 밀착하고,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것이 파격 행보입니다.
요새는 유튜브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제가 2003년인가 2004년에 예배당에 모이지 말고 집에서 새벽 예배를 드리라고 인터넷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도에 그렇게 인터넷으로 새벽 예배를 생방송 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쪽 계통으로 많이 알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꿈으로 파격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실시했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너는 진짜로 파격적인 삶을 살았느냐?’라는 의문에 답해보았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때 규칙, 원칙, 관례, 관습, 상식 같은 것들을 보면서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합니다. 이 세상의 규칙이나 원칙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파격적인 일상, 일상적인 파격으로 삽니다. 파격이 일상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파격이 연속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파격적으로 사니까 그것이 더 좋거나 우월하다는 뜻에서 파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으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밀착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밀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밀착함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세상의 원칙과 규칙과 관습과 관례와 격식이 끼어들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면 세상 철칙을 지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철칙이 하나님과 내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수영복을 입고 명동으로 나가라 하신다면 저는 나갈 뿐입니다. 제가 한 모든 행동들이 그랬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복무할 때, 상관이 부당한 행동을 해서 이를 거부하고 싸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카투사들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 일은 누구나 다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꿈에서 미군 막사를 뚫고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싸우고 이기라는 뜻이기에 상관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습니다. 참는 것이 철칙이고 관례고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밀착하면 그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의도를 올라타다 보면 파격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철칙과 원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세상의 원칙을 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파격을 위한 파격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놓치기 싫어 십자가를 붙잡고 살다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의도를 갖고 계십니다. 그 의도를 올라타면 싫든 좋든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격식과 원칙과 규례와 관습을 외면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제 갔던 회사를 오늘도 같은 시간에 가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가는 것은 규칙이나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만나는 하나님이 오늘도 그 시간에 회사에 가라고 의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일어날 때 제가 갖는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어제도 했으니까 오늘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시고 설교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음 날도 ‘오늘도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시고 설교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저는 평생 단 하루만 설교를 한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그 하루만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규칙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매일매일 오늘 하루만 회사에 나가는 사람, 오늘 하루만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의도하심이 멈출 때가 없사오니 이 의도가 식기 전에 올라탐으로써 규칙, 원칙, 격식, 관례, 풍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만 따라 오늘 하루를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