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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철도의 부산 종착역은 처음부터 부산진역으로 피차 정하였으나,
우리 측이 모르는 사이에 초량으로 변경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애초부터 철도부지에 포함되지 않았던 초량지역을 비롯하여
부산진역 일대 토지수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경부철도 공사는 시작부터 우리나라 관민의 저항과 반대에 부딪쳤다. 용지 매수에 따른 분쟁이 일고 겨울철의 결빙과 한여름의 홍수 등으로 난관이었다. 백성들은 농사를 망치고 고을이 망한다며 철도가설을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공사장의 십장이 노동자 사회에서 원님 대접을 받는가 하면 고을 수령과 양반은 철도 공사장 인부들에게 뭇매를 맞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공사장마다 술집과 밥집이 덩달아 생기고 몸을 파는 여자들로 득실거렸다. 이렇듯 철도가설은 조선의 전통적인 양반체제와 사회규범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기실, 경부철도의 부산 종착역은 처음부터 부산진역으로 피차 정하였으나, 우리 측이 모르는 사이에 초량으로 변경하고 있었다(광무 5년(1901) 4월 4일의 외무대신 지령 제19호). 그런데다 애초부터 철도부지에 포함되지 않았던 초량지역을 비롯하여 부산진역 일대 토지수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은 초량·부산진 일대에 경부철도 기본시설과 기타 공장 등을 설치할 목적으로 초량에 8만 평과 그 앞 해안 8만 평, 그리고 부산진에 21만 평 등 총 27만 평의 부지를 책정 고시하고 토지를 수용하기 시작하여 초량에 5만 평, 부산진에 3만 평의 토지를 수용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구역 내에 있는 600여 호의 조선민가는 철거되어 부산진 방면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 구역 내에 사유지를 가진 80여 명의 일본인에게는 대토(代土)를 초량역 앞 일대에 주었다(이때만 해도 초량-부산진 간은 외국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한편 철도종착역을 초량으로 옮겼으나, 초량과 일본인 조계지 사이에는 해발 130척이나 되는 쌍산(영선산과 해관산)이 가로막고 있고, 쌍산 아래는 바다여서 쌍산을 착평하고 바다를 메워서 육지로 만들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구역에 있는 영국인 토지와 한국해관부지 문제는 해결 되었으나 쌍산에 자리잡은 영국영사관 부지가 걸림돌이었다. 이것도 일제가 내놓은 환지양여((換地讓與) 계약으로 해결되어 1902년 12월 총 공사비 1만1천 원(圓)으로 초량-부산(중앙동)간 총 2,500m 폭 4간의 도로공사를 착공한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완공을 본다.
1905년 말부터 영선산 동북부 일대를 착평하여 해안을 매축하고 간선도로를 부설하여 1908년 3월 임시 부산역까지 연장공사를 마쳤다. 1910년 부산역사를 준공하고 1912년에는 사상역사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1912년 6월 제1부두(제1잔교)가 완공되자 여기까지 선로를 다시 연장하므로, 열차가 부두에까지 닿아 관부연락선으로 승객을 경성(서울)으로, 만주까지 실어 날랐다. (계속)
문의:010-8224-5424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