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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4)
2015. 8. 29- 30 (부산 및 마산교구)
◉ 순례 장소
첫째날:김범우 묘➟명례➟신석복묘➟박대식묘➟형제순교자묘➟한국순교자 박물관둘째날 : 수영장➟병영장대➟언양성당➟살티공소➟죽림굴
1박 2일로 성지순례 가는 날.
여명의 어둠을 뚫고 체육관에 도착하니 자매님 한분이 벌써 와 계셨다.
시간이 되자 여러 자매님들이 많이 오셔서 회장님의 성수세례와 함께 차에 올라타니 남자 4분 여자18명 총22명 순례 길에 올랐다.
임원소개. 일정소개. (부산8곳 마산3곳) 가며 순례자 중 2번째 가는 분들도 있으며
도내 25개 본당 교우님들이 참석하고 수동, 구룡, 조치원 성당 순으로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감사하고, 순례 후 각 성당으로 돌아가 많은 홍보바라며
‘우리들도 예수님 같이 죽자’
하나의 밀알이 썩어서 부활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산에서 마산의 순례를 잘 할 수 있도록 시작부터 끝까지 은총 주시고 3천사 가부리엘, 미카엘, 라파엘 천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시작기도 주님의 기도, 청원기도, 103 성인호칭기도, 묵주기도, 삼종기도, 연도, 자비의기도, 124 한국순교복자 호칭기도 등 기도와 성가를 부르면서 순례지를 향하여 가고 있었다.
첫 번째 간 곳
김범우 묘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 묘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웠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1785년 자신의 집 명례방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그 혼자만 먼 곳으로 도배(徒配)되었다. 그곳에서 형벌의 여독으로 약 1~2년 후 36~37세의 나이에 선종하여 이곳 밀양에 묻혀 있다.
김범우는 1785년 봄 명례방 집회로 집회의 중심인물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지방으로 도배되어 형벌의 여독으로 약 2년 뒤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부산교구에서는 가계 전승이나 지역 교우들의 진술을 토대로 대체로 순교자 김범우가 도배된 곳을 이곳 밀양 단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귀양처가 충청도 단양(또는 청주)이라는 그의 친지들의 관변 진술이 있어서, 향후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공동으로 모여 학술적 재검토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최근 교황청에서는 김범우가 도배를 떠날 때 맞은 형장(刑杖)의 장독(杖毒)이 악화된 것이 그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었음을 인정하여 순교자로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도록 부산교구 측에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가 되는 셈이고, 1791년 신해박해로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한국 교회 최초의 참수(斬首) 순교자가 된다.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또는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세례를 받은 뒤 김범우는 즉시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그러다가 1785년 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도배형을 언도받고 단양(경상도 밀양의 단장, 충청도 丹場, 청주 등 세 가지 설이 있음)에서 도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1787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사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자(순교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인고는 경상도 밀양군 삼랑진읍 굴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1985년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과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회장 등은 1989년 극적으로 후손의 외손 중 한 명을 만나 김범우의 묘로 지적해 준 묘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김범우의 묘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김범우의 묘소는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동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 성모 동굴 성당 십자가
김범우 묘역에 있는 성모동굴 성당에는 특이한 모양의 십자가가 있다. 돌로 이어 놓은 모양의 이 십자가는 순교자 김범우의 묘를 발굴할 당시 순교자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돌 십자가 형태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종 당시에는 성물도 귀했지만 세상에 드러내 놓고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신을 안치시킬 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 세 개를 모아 만든 십자가를 순교자의 머리맡에 두어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표시하며, 또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 평안한 안식을 기도 드렸던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신앙 중심의 장례 모습인 것 같다.
◆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 토마스(1751~1787)는 1784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坊, 현재의 明洞)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 및 권일신 등과 함께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 관리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교우들은 모두 명문의 양반들이라 형조로부터 훈방되었으나 김범우만은 그대로 갇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끝에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현 을지로 2가 명동성당 부근)은 한국 천주교회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장소가 되었다. 김범우가 체포된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 도배(徒配)
김범우는 유배(流配)를 간 것이 아니라 도배를 갔는데, 조선 왕조의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등급이 있었고, 여기서 문제가 된 도배는 단순히 그냥 유배(귀양, 流)가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가서도 편히 있지 못하고 도형(徒刑 :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거나 수군에 종사케 하는 등 일종의 강제 노역이 1년부터 3년까지 5등급으로 부가됨)이 부가된 형태의 처벌이었다. 김범우의 사망 원인은 도배지로 떠나기 전에 관례적으로 부가되던 60~100대의 장형을 받고, 그 장독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가혹한 노역형이 최소한 1년 이상 부가되어 충분한 치료 기간을 갖지 못했기에 이것이 장독사(杖毒死)로 이어진 측면이 클 것으로 본다.
◆ 김범우에 대한 재평가 작업
김범우(1751~1786?) 토마스는 현재 명동 성당이 들어선 자신의 집 명례방에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등과 신앙 집회를 열다 체포되어(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충청도 단양 또는 경상도 밀양에 도배된 뒤 형벌 여독으로 36~37세에 숨을 거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천주교를 믿다 죽음을 당한 최초의 인물이다. 또 이벽,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의 활동가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사망 연도, 유배지 문제, 순교 여부 등이 불명확해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교회사학계는 그동안 그의 위상을 섣불리 논하기가 힘들었다. 역관(譯官) 가문 출신 중인이다 보니 남아 있는 관변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도배지에 대한 이견
교회 내 유일한 관련 사료인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그를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단양읍으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돼 있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에는 천주교를 믿어 추조(형조)에 잡혀간 사실만 언급되어 있다. 다행히 1981년 후손 소장 고문서가 발견돼 그의 행적과 가계도 윤곽이 드러나고, 같은 해 외손의 도움으로 파묘함으로써 궁금증은 상당 부분 풀려 도배지가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이란 새로운 학설이 그 무렵에 제기되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는 가계 전승이나 이 지역 후손 및 교우들의 진술을 토대로 대체로 순교자 김범우가 도배된 곳을 이곳 밀양 단장으로 보고 있으나, 그의 도배처가 충청도 단양(또는 청주)이라는 그의 친지들의 관변 진술이 있으므로, 향후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공동으로 모여 학술적 재검토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 사인은 형벌의 여독?
한편 그를 증거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순교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의 불씨도 남아 있다. 한국 교회 최초 순교자는 1791년 당시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라도 진산 고을에서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라는 것이 최근 정립된 교회사학계의 통설이다. 2003년 9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펴낸 자료집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형벌을 받고 그 후유증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한 김범우는 한국 최초 순교자로 공경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최근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 교황청에서 김범우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여부를 품의한 부산교구 측의 질문에 대해 순교자의 절차로 추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음으로써, 교황청은 김범우의 직접적 사인(死因)이 형벌(杖刑)의 여독(杖毒)이라고 인정한 셈이 된다. 이 경우 김범우는 교회의 최고 공식 기관에서 인정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자리매김 되어진다.
◆ 순교자인가? 증거자인가?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최초의 순교자는 윤지충이었고, 김범우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분류되었다. 그 이유는 김범우의 직접적 사망 원인이 정부의 박해(형벌) 때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데에 있었다. 그의 도배 이후 약 1~2년 정도를 도배지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두고, 만약 도배를 떠나기 전 당시 관례적으로 당하던 장(杖) 60 이상의 형벌로 인해 그 장독이 악화되어 도착 즉시 죽었다고 본다면 분명 순교이지만, 도착한 후에도 최소 1년 이상 더 살았기 때문에 박해자가 가한 형벌인 ‘도배’가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범우에 대한 학계와 교계의 평가는 순교자, 증거자를 수시로 반복하여 변해 왔으며, 아직까지도 매우 예민한 문제로 취급되어 오고 있다.
◆ 순교자로서의 시복 청원 준비
이런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1990년대에 각 교구별로 시복시성 작업이 시작됐다. 부산교구에서는 3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지만,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두 사람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고, 김범우 토마스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다. 순교자 현양 위원회는 시복 청원 분위기가 고조되자 본격적인 묘지 작업을 진행, 2005년 9월 14일 김범우 묘역 준공 미사를 거행했다. 그 후 교회사 연구를 통해 유배지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죽은 이들도 순교자로 시성된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부산교구에서는 김범우를 증거자가 아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매년 김범우의 기일인 9월 14일에 김범우 묘역에서 기일 미사를 지내고 있다.
두 번째 간 곳
명 례
◆ 마산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순교자 신석복 생가가 있는 곳
명례 공소는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는 하느님의 종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현재 마산교구의 관할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본당이고 경상도 전체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명례 본당은 대구 본당(1886년), 가실(왜관) 본당(1894년), 부산 본당(1890년)에 이어 1897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강변 마을 명례는 나루에 걸맞게 예로부터 외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차츰 도로가 확충되고 배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는 작아지고 번성했던 모습을 역사 속에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 갔다.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된 명례에 신자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박해를 피해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우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잡혀 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명례 본당은 개항 이후 경남 지역 첫 본당인 부산 본당 주임 파리 외방전교회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경남 중부 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 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姜聖參, 1866~1903, 라우렌시오) 신부가 발령받게 되었다.1897년 본당으로 승격됐던 명례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입했고 강삼 신부는 그 땅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후 1926년 새로 부임한 권영조(權永兆, 1901~1965, 마르코)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1928년 낙성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다. 지금의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명례에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처음 본당이 설립되어 사용한 제대와 십자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명례는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28년에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했고 피난 교우들의 권유로 신자가 됐으며 병인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혀 1866년 3월 31일에 순교하였다.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는 명례 성지 조성을 위하여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또 2010년 개인소유의 축사로 변해버린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일대를 매입하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 성당과 그 일대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신청하여 12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다. 앞으로 명례 성지는 생가 터에 순교자 신석복 기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명례를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 명례 본당과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
명례 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하고 초대 주임은 강성삼 신부였다.
강성삼 신부는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내포에 살았던 외조부 신 베드로는 의술이 뛰어났으며 영세한 후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다가 병인박해 때 홍주읍 포졸들에게 잡혀 해미에서 85세로 치명하였으며. 외숙인 신 아우구스티노도 23세 때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나가사끼에서 코스트(Coste) 신부의 지도로 1년 간 예비 신학 교육을 받고 1882년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1890년에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미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민덕효)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레오와 함께 국내에서는 최초로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날의 사제 서품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때(1845)로부터 50년만이었다.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으로 부산 절영도에 부임하여 절영도와 8개 공소의 364명 신자를 돌보았다. 1897년 임지 변경 문제로 우도 신부와 상의하여 경남 밀양군 하남면 명례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9월 명례에 3칸짜리 집 한 채를 120냥에 매입하였으나 매수자가 집을 비우지 않아 이듬해 1월에야 명례로 옮길 수 있었다. 밀양, 청주(현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6년 동안 사목하였다.
명례 본당에서 사목중에 일화가 있다.
1899년 3월 자인에 사는 교우 정씨가 어떤 일 때문에 대구의 로베르 신부에게 부탁하여 밀양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밀양 군수는 몹시 자존심이 상해 정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에 강성삼 신부는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 정씨가 무죄이므로 즉시 석방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군수는 강 신부의 청을 묵살했고, 면담 요청도 거절했으며 강 신부와 다른 천주교인마저 감옥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 강 신부는 밀양에서는 군수의 천주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될 수 없으므로 서울에 가서 재판을 열자고 군수에게 제의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겁을 먹고 정씨를 석방하는 한편 강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1900년 초 강성삼 신부는 병 때문에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듬해 여름에도 크게 앓아 공소 순방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본래 병약했고 한적한 산촌인 명례로 임지가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03년 9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강성삼 신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단지 절영도와 명례에서 남긴 13통의 서한이 있을 뿐이다. 강성삼 신부의 묘비는 삼랑진 성당에 있으며, 묘소는 부산 성직자 묘역에 있다. 강 신부가 죽자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가 되었고 마산 본당에 속했다. 그리고 1926년 5월 10일 권영조 신부가 부임하며 다시 본당으로 재 설립되기도 했으나 1930년 삼랑진으로 본당 소재지를 이전하며 다시 삼랑진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진영 본당을 거쳐 현재는 수산본당 관할 하에 있다.
세 번째 간 곳
신석복 묘
◆ 하느님의 종 신석복 마르코의 묘
하느님의 종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는 명례 공소와 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누룩과 소금 행상도 했던 마르코는 1866년 병인년 정월 누룩을 팔기 위해 웅천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마르코는 1866년 대구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신석복(申錫福, 1828~1866, 마르코)의 생가는 명례 공소와 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그동안 우사로 변해 있어 젖소들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최근 정리하여 공터로 되어 있다. 신석복 마르코는 밀양군 하남읍 명례리에서 출생하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누룩과 소금 행상도 했다. 밀양에서 김해를 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명례엔 나루터가 있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이곳엔 사람들이 붐볐고 피난 교우들도 정착하여 살았다. 그는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1866년 병인년 정월 하순경에 누룩을 팔기 위해 웅천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해 질 무렵 그가 태어난 명례리 가까운 가산동(김해군 이북면 가동)에서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밀양에서 하루를 지내고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서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쫓아 갔다.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신석복 마르코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9일간 감옥에 있었고 세 차례 형문(刑問)을 받았다. 뼈가 부러지고 성한 곳이 없었다. 마침내 1866년 3월 31일(음 2월 15일)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신 마르코와 함께 체포된 오 야고보 역시 밀양 백산(밀양군 하남읍 백산리) 출신으로 그해(1866년) 3월 15일(음 1월 29일)에 순교를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신영순(이냐시오)이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부친의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운구해 왔으나 고향 명례에는 전주 이씨 가문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반대로 안장할 수가 없었다. 부득이 낙동강을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 노루목(현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가매장 하였다.신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리에서 살았고 후손은 아들 이냐시오에게서 아들 4형제가 났고, 네 아들 중 막내가 신순균(申順均, 1910~1948, 바오로) 신부다. 1935년 사제품을 받고 고성 황리(黃里) 본당 초대 신부로 재직했으나 1948년 지병으로 선종하여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마르코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의 현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 쫓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네 번째 간 곳
박대식 묘
◆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한 하느님의 종 박대식 빅토리노의 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1812~1868, 빅토리노)의 세례명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순교 사실과 무덤은 후손들의 증언으로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시적으로 노렌죠(라우렌시오)라 불려 왔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있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치명사적》(제23권 91쪽)에 등장하는 ‘박 위도서’가 ‘박대식’이었는데 몰랐던 것이다.경남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도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천주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李學逵, 호 洛下, 1770~1835)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에 천주교가 전해지고, 순교자 박대식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 ?~1810)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대흥, 대식 삼 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혀 김해 관아에서 삼일 간 문초를 받은 뒤 대구의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박대식은 이곳 대구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웃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음 8월 27일) 조카 박수연과 함께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당시 조카 박수연은 예비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시신을 염습한 뒤 선산에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여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삼 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친척들이 마을 뒷산인 유씨들의 문중산에 평장으로 매장하였다.그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에는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 도마 신부의 주선으로 비석을 세워 그의 순교를 기리게 하였다.
◆ 박대식(朴大植)의 세례명
“박 위도서-본디 김해 예동 살더니 무진(1868년) 칠월 칠일에 대구 포졸이 본읍 포졸과 더불어 잡아, 본읍으로 들어가 있다가 삼일만에 대구로 올라가서 팔월 이십 칠일에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오십칠 세라. 증참(증인 참석자) 박 안당은 죽고 그 아우 도마가 그 형에게 들었습니다. ” 도마가 살기는 김해 중북면 안평동, 字는 文七. 박선달 위도서(威道瑞)는 한자식 표기로서 원본인 병인치명 사적의 ‘위도리(威道理)’를 전사하는 과정에서 오타가 생긴 표기로 보이며, 우리말로는 빅토리노(victorinus)다. 박 위도서가 박대식 임을 밝힌 사람은 사학자 마백락(글레멘스)과 순교자의 4대손 박영식(요아킴)이다(2001년 8월). 위의 《병인치명사적》에서 증인으로 등장했던 도마(文七)가 박대식 순교자의 둘째 아들 종반(宗班)이란 사실을 족보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년)
박대식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의 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이에 따라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빅토리노의 나이는 57세였다. 가족들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다섯 번째 간 곳
형제순교자 묘
◆ 죽어서도 선산에 못 모셔진 김해 왜장대 순교자 조씨 형제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 치명한 조석빈(曺錫賓, 利觀, 1825~1872?)과 조석중(曺錫曾, 聖三, 1834~1872?) 형제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당한 후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다.
창녕 조씨 29대 손인 조대연의 5형제 중 조석빈과 조석증 두 형제는 1870년경까지 천주교 연구와 전교를 열심히 하다가 병인박해 때 사학죄로 참형당한 순교자들이다. 1989년 6월 19일∼20일 부산교구의 묘지 발굴 확인으로 구전이 입증되었고, 1995년 5월 29일에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 미사를 가졌다.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 났으며 심한 박해 속에 가재와 전답을 몰수당하고, 문중 선산에 있는 생곡의 배정문(정삼품 통정대부)의 동서 학당에 은신하면서,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쓰고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 등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을 전교하는 데 앞장섰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며,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 당했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는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목을 떨구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갈대에 싸여 온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의 왜소한 알몸은 조씨 문중의 반대로 이곳 조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데 고(故) 배문한(裵文漢) 신부의 3대조 배정문(裵禎紋)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120여 년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묘를 관리하여 왔다.
◆ 배문한 신부 생가터
1934년 8월 경남 김해군 녹산면 생곡리(현부산 강서구 생곡동)에서 출생. 1960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61년 가톨릭대에 입학, 1964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으로 유학, 197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973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후 여주 본당 주임, 광주 가톨릭대 교수, 서정동 본당 주임, 수원가톨릭대학장 및 초대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했다. 순교자 조씨 형제는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다고 한다. 현재는 배 신부의 형이 이곳을 돌보고 있다.
여섯 번째 간 곳
한국순교자 박물관
◆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물, 서책 및 형구 등이 전시된 순교자 기념관
부산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정식 요한과 그의 일가족 4명을 비롯한 8명의 부산 순교자들의 유해가 이장되어 있는 이곳은 그동안 50년간 한국순교복자회에서 ‘부산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으로 운영해 오다가 2013년 10월부터 부산교구에서 성지를 담당하게 되어 명칭도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바꾸었다.
부산에서 순교한 8명의 순교자들은 1868년 부산 수영 장대에서 군문효수 당한 동래 전교회장 이정식 요한,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 며느리 박조이(朴召史) 마리아, 조카 이삼근 베드로, 조카(혹은 아우)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양재현 마르티노, 옥조이(玉召史) 바르바라 등이고, 이들은 ‘박근기 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었으며, 모진 악형에도 배교하지 않고 마침내 순교하였다. 유해는 동래구 명장동에 있는 갈멜 수녀원 뒷산 등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7일 이곳 오륜대로 이장되었다.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21일, 개성 본당 사제관에서 방유룡(方有龍, 1900~1986, 레오) 신부에 의해 창설된 한국 순교복자수녀회는 수도회의 명칭 그대로 순교자들의 얼을 기리고 후손 대대로 순교의 신앙을 물려주기 위하여 수녀들은 전국을 누비며 전교하면서 순교자 유물과 교회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서울대교구에서는 병인박해(1866년)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절두산 순교 성지에 순교자 성당과 기념관을 세워 이에 한국 순교복자수녀회에서도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 내에 순교자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1982년 이곳에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박물관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적으로 순교자의 유물과 교회사 자료가 중점적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1층에는 한국 천주교 박해사 자료 및 순교자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교회 초창기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 및 103위 시성 기념 코너를 비롯하여 조선 말기 왕실 관련 민속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김인순(루갈다) 기증 민속품 전시실이 있고 몇 계단 위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 관련 특별 전시실이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다.
◆ 박근기(朴根基) 사건
1866년 병인박해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될 시기에 동래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신자들이 발각되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1868년 6월 1일 《일성록》에 의하면 동래의 좌수영 관할 아래 있는 부산진에서 박근기가 체포되었다. 박근기는 “일본이 서양과 통상을 하고 있으니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일본인을 통해 서양에 호소해 보자”는 생각 아래 몇몇 교우들과 뜻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글을 가지고 있던 그가 부산 첨사 윤석오에게 적발되어 동래부로 이송되어 가두어졌다. 아마도 사형 당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같은 사건에 연루된 그 외 7명의 행방도 확실하지 않다. 이때 동래 지역에서는 천주교 신자 8명이 사형 당했다. 이들은 이정식, 이관복, 박조이, 이월주, 이삼근, 양재현, 차장득, 옥조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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