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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씨앗-네팔기행 스크랩 룸비니에 세운 황룡사-대성석가사
찰라 최오균 추천 0 조회 79 11.01.17 06: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총건평 1935평, 374개의 기둥, 42m 높이로 지어진 룸비니 대성 석가사는 신라 황룡사를 재현시켜 놓은 절이다.

 

▲법신 스님이 머릿속에 설계한 설계도. 대성석가사는 백용성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법현스님이 혈혈단신으로 15년 동안

벽돌을 쌓아온 공든 탑이다. 건축은 완성되었으나 아직 탱화를 입히지 않아 마치 싯다르타의 고행상처럼 앙상하다.

 


 

 

룸비니에 머무는 동안에는 대성석가사에서 템플스태이를 하기로 했다. 마야대비사원에서 대성석가사로 도착을 하니 오후 6시다. 경내로 들어서니 대웅보전의 골조가 우람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은 탱화를 하지 않아 마치 부처님의 고행 상처럼 앙상하게 보인다.

 

대성석가사는 백용성스님의 유훈으로 1995년 각현 법신스님이 주지로 임명되면서부터 정부 보조 없이 15년 동안 불자들의 시주로 지어오고 있다. 1995년 음력 4월 8일 지금의 제1요사 '불탄무우수당(783평 규모)을 착공하였고, 이어서 1997년 음력 10월 2일 대웅보전을 착공하였다.

 

 

▲탱화를 입히지 않는 대웅보전

 

대성석가사는 11,615평의 부지를 네팔 정부와 협의 하여 99년 동안 임차하여 매년 840달러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기단부 1,016평, 기둥 210개 등 3층 규모로 총 1935평에 374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높이 42m의 거대한 절이다.  아마 룸비니에서는 제일 높고 큰 사원인 것 같다. 각현스님에 의하면 이 절의 규모는 신라시대 황룡사의 규모와 같다고 한다. 스님은 고려시대에 불타 없어진 황룡사를 룸비니에 재현 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제1요사

 

5년 전 5월,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룸비니에 도착했을 때에도 나는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 당시에는 골조공사를 완성하고 내부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네팔의 5월은 덥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요사에서 세수를 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더운 여름에 웬 온수 일까?”

 

그런데 그것은 태양이 워낙 뜨거워 물탱크에 데워진 물이 온천수처럼 뜨거운 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다음 한참을 식혀서 세수를 해야 했다. 그런 더위에도 네팔 사람들은 벽돌을 머리에 이고 지고 계단을 걸어올라 꼭대길 나르고 있었다. 이 절은 기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고 있었다.

 

 

▲네팔리들의 땀으로 완성된 대웅보전

 

이 절을 짓는 동안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여주고 품삯을 지불했다. 기계의 힘으로 하면 단시일 내에 공사를 할 수 있으나 고용효과는 적다. 동네에 기근이 들면 아이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을 하러 왔다. 인부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밥이 목에 차도록 먹었다. 밥을 먹다가 죽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 배고픈 설움은 인간을 이렇게 아귀로 만들고 만다.

 

대성석가사는 이처럼 긴 시간 동안 벽돌 한 장 한 장을 남녀노소가 머리에 혹은 등에 지고 옮겨서 쌓아올린 공든 탑이다. 공사비용 조달이 어려워서 공사진행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공사비용이 없으면 공사는 중단하고, 시주로 비용이 조달되면 다시 진행을 했다. 마치 부처가 고행을 하듯 쌓아올린 고행의 탑이라고나 할까?

 

▲공양간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법신 스님은 대성석가사를 방문하는 배낭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준 절로 인도와 네팔 배낭여행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절이다. 그래서 네팔과 인도를 오가는 여행자들 중 룸비니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이곳을 찾는다.

 

집도 절도 없으면 굶어 죽는다고 했던가? 5년 전, 티베트의 긴 배낭여행에 지친 우리도 인도로 넘어가기 전 대성석가사에서 며칠을 쉬었다. 공양시간이 되면 종이 울렸다. 공양간에 가면 법신스님은 항상 웃으시며 “많이 드세요”라고 했다.

 

▲자귀꽃이 활짝 핀 정원

 

김치에다 풍성한 야채, 꿀맛 같은 밥을 배불리 먹었다. 티베트의 오지에서 야크차와 보리빵으로 연명했던 배고픔을 이곳에서 마음껏 채워 넣었다. 그 대신 아내와 나는 벽돌을 지고 대웅보전 꼭대기로 나르곤 했다. 벽돌을 몇 장만 지고 가는데도 헉헉거렸다. 먹는 것은 쉽고 좋은데, 일을 하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대성석가사는 완공을 하여 2010년 5월부터 대웅보전에서 법회를 열고 있다. 법신 스님을 친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5척 단구의 법신 스님은 여전히 헐렁한 잿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보면 헛헛 하고 웃는다.

 

▲법신스님(윗줄 가운데)과 함께한 바지공덕회 회원들.

 

15년 동안 절을 짓느라 그을린 그의 얼굴이 대성석가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으면 그 사람의 이력이 얼굴에 모두 기록 된다고 했던가? 스님의 얼굴에는 불모지 룸비니에서 더위와 싸우며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린과 이력이 촘촘히 나타나고 있었다.

 

“스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스님의 얼굴은  5년 전의 모습 그대로 인데 절은 많이 변했군요.”

 

“헛헛, 그런가요? 공사판 막일을 하다 보니 이제 많이 늙었지요.”

 

15년 전 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갈대밭 늪지에 코브라와 개구리들이 득실거렸다. 지금도 법당에서 법회를 보다 보면 개구리들이 펄덕펄덕 기어 다니고 가끔 코브라도 출현한다. 

 

"나는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는 그저  공사판의 막노동꾼입니다. 15년 동안 이곳에서 절을 짓느라 벽돌만 쌓아왔어요." 

 

우리 일행이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그렇게 짧게 몇 마디 던지고는 입을 닫았다.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반특이'를 떠 올린다. 일생 동안 청소만을 해온 반특이와 15년 동안 벽돌만 쌓았다는  법신스님의 모습은 어쩌면 닮은꼴이다.

 

 

▲공양간에 걸린 종

 

반특이는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었다. 오백 명의 수행자들은 날마다 그를 삼년 동안이나 가르쳤지만 반특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반특이 무슨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며 그를 비웃었다. 반특이가 하는 일은 매일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을 깨끗하게 쓸고 닦는 일이 전부였다. 그는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소를 하면서 그는 오고가는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석가모니 역시 그런 반특이를 갸륵히 여기고 제자들에게 그를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말기를 여러 번 당부했다.

 

그런 어느 날 석가모니가 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으로 가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반특이에게 발우를 들게 하고 자기 뒤를 따르도록 했다.

 

평소에는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석가모니 바로 뒤에 발우를 들고 따라갔는데, 그 자리를 반특이가 대신하자 제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모두가 불만에 쌓였다. 

 

반특이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던 왕도 반특이가 뒤를 따르는 석가모니의 행렬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께서는 뛰어난 제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머리가 둔하기로 소문난 반특이를 데리고 다니십니까?"

 

"왕이시여,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똑똑한 제자들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지만 알아듣는 것만큼 실천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반특이는 머리는 둔하고 잘 알아듣지 못해도 하나를 배우면 그것을 꼭 실천합니다. 그것이 똑똑한 제자들과 다른 점입니다."

 

석가모니의 예견대로 반특은 훗날 모든 번뇌를 끓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 비록 천 마디의 경전을 외우더라도 행하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 한 마디의 말을 듣더라도 옳게 듣고 그대로 행하여 편안함을 얻음만 못하다.

 

▲374개의 기둥으로 초석을 다진 대성석가사

 

스님의 얼굴에서는 그런 반특이의 실천 지혜가 엿보인다. 경전 공부와는 벽을 쌓고, 절을 짓는 벽을 쌓아올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는 스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반특이다.

 

스님은 네팔이라는 나라도 좋았지만 절 짓는 공사가 더 좋았다는 것. 공부를 하는 것보다 골조, 벽돌쌓기, 건축, 집수리, 공간구성, 수치계산 등 공사가 좋았고, 머릿속에 설계도면을 넣고 다니는 스님. 각현 법신은 그랬다.  

 

어떤 건물을 짓고자 하면 딱 5분이면 설계도가 머리에 그려진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쪽 방면에 물리가 터진 사람이다. 선천적으로 도형과 계산 쪽에 밝은 스님은 머릿속에 절을 설계를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결심이 서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스님의 직성이다.

 

 

▲제2요사

 

스님은 고2때 경주고 불교학생서클을 하다가 경주 분황사에서 도문 스님을 만났다. “출가할 사람 있으면 신청하라.” 도문 스님이 학생들을 향하여 말을 하자 그는 손을 번쩍 들었고, 그길로 출가를 했단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올바른 은사스님을 만난 그는 번개처럼 출가를 한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그런 사람.

 

우리는 방을 배정 받고 저녁 공양을 먹었다. 5년 전과 달라서 2010년부터는 정액제로 요금을 받고 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그러게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어준다는 소문이 돌자 네팔 리는 물론이고 너도나도 이곳에 와서 몇 달을 죽치고 있는 바람에 견뎌나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

 

튼튼한 기단과 기둥

 

도미토리는 1인 1박 250루피, 1~4인 원룸은 1000루피를 받고 있다. 한국 돈으로 1인 1박 숙식제공 1만원인 셈이다. 단체는 한국에서 예약을 하고 미리 입금을 해야 한다. 배낭여행자는 현지 사무실에서 방 배정을 받으면 된다. 룸비니 동산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곳은 대성석가사 밖에 없어 수많은 여행자들이 종교에 관계없이 몰려든다. 오늘도 동서양의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니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예불은 새로 완성한 대성마야부인당에서 진행되었다. 법신스님의 집도아래 법회가 시작되었다. 경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웅장하다. 목탁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상서로운 기운이 법당에 가득하다.

 

▲대성석가사에 떠오르는 일출

 

반야심경을 봉독하는데 소리가 울리고 울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는 것 같다. 법당에는 개구리가 펄떡펄떡 뛰어 가고 있었다. 녀석도 예불을 드리려 왔을까? 대성석가사의 부처님은 마야대비사원 방향에 모셔져 있다. 즉 부처님이 태어나신 방향에 불단이 조성된 것이다.

 

“이곳에서 절을 하면 자동적으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에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룸비니에 있는 다른 절하고는 방향이 다르다. 법신 스님은 터를 보고 척하니 절의 설계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절의 건축은 완성이 되었으나 아직 탱화를 그리지 못해 회색 색깔 그대로다.

 

“스님, 언제 탱화를 입히지요?”

“그게,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요. 이제 기초를 완성했으니 옷을 입히는 것은 시간문제겠지요. 누군가 시절인연이 닿으면 이 절에 옷을 입혀 줄 것입니다.”

 

전혀 서두루지 않는 모습이다. 하기야 15년 동안 공사를 하며 기다려온 스님이다.

 

룸비니에는 약 20여 개국에서 절을 이미 짓거나 건축 중에 있다. 다른 절은 거의 탱화를 입혀 놓았는데 아직 대성석가사만 콘크리트 색 그대로 있어 보기에 흉하다. 하루 빨리 탱화를 입혀 신라시대 황룡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도량이 되었으면 좋겠다.

 

 

룸비니 동산에

우뚝 솟아 있는

대성석가사

 

수십년 땀방울 흘려

찬란한 황룡사로 나투었네

 

세계의 지붕

네팔에 세운

한국의 불교정신이여

룸비니 절중에 제일이로다

 

용성, 도문, 법신으로

이어지는 서원이

룸비니 동산에 꽃을 피웠네

 

부처님 정법

온 세상에 두루 밝혀

영원한 진리의 등불로

평화세계 이루소서

 

 

(룸비니 대성석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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