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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국 8도 기행(9월 12-30- 01)
정용진 (시인)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다.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시정(詩情)이 깃들고 풍찬노숙(風餐露宿) 낭만이 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아내와 더불어 고국 8도를 방랑객처럼 홀가분한 심정으로 유람하였다.
고국을 방문하는 일행과 전국 지방치단체장들의 협조와 아시아나 항공의 협찬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願生 高麗國 一見 金剛山)다 던 중국의 시인 소동파(蘇東波)의 명시 금강산을 감격 속에 2002년에 찾았고 내가 고국을 이렇게 샅샅이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자 이제 고국 8도 기행을 떠나보자.
조 국
정용진
조국은
내 사념(思念)의 영토를
장지문(壯紙門) 틈 사이로
스며오는
고향 하늘.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깃발이 되어
휘날리기도 하고
영원의 강물로
굽이치는
아! 아! 조국은
한의 얼
한의 꿈
한의 혈맥.
백의민족 선열들의
경천애인(敬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애국 혼이
여기
우리들의 모토위에
뿌리 깊이 내려
그 체온이 따사롭다.
우리 모두는
한(韓)의 숨결
꽃으로 피어나
향이 되고
열매로 익어야 하리
뼈를 묻을
조국. 뜨거운 가슴에.
2010년
9월 12일(일) 0시 20분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을 떠났다.
9월 13일(월) 이른 아침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한뒤에
국내 최대 사장교 인천대교를 지나 국제자유도시 송도에 도착, 재미동포 실버타운 후보지를 둘러본 후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군산으로 이동 민족의 대 역사인 세계최장 새만금 방조제를 관광한 후 국립공원 변산으로 이동 채석강변 대명리조트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가을을 맞이하는 채석 강변의 모래밭은 은모래 빛이었다.
내소사(來蘇寺)
정용진
만경강 건너서
김제 벌 지나
내소사 가는 길.
억년을
선돌로 서서
가슴을 내어 맡긴 채
해풍에 씻기고
파도에 빨려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이루었구나.
변산반도 채석강.
겁(劫)의 세월을
욕망의 늪을 못 헤어나
고해(苦海)를 떠돌던
중생들의 마음이
둥 둥둥
둥 둥둥 울리는
내소사 북소리에
무량(無量)이
불심(佛心)으로
불심이 무량으로
일주문
전나무 숲길을 들어서는
나한(羅漢)들의 발길이
선(禪)으로 덧입어
청정심(淸淨心)으로 거듭나네.
9월 14일(화) 맑음.
조식 후 채석강변을 산책하고 전남 담양으로 이동, 죽녹원 대나무 숲, 대나무 박물관을 보고 대숲 길을 걷고 대통밥으로 점심을 들고 경남 통영으로 가서 거제 포로수용소를 견학하고 통영 해저 터널을 관광하고 한려수도를 유람선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 제승당을 참관하고. 충무 리조트 호텔에서 유숙하였다. 몸이 심히 불편한 고향 친구 심재복 내외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위로 하였다. 퍽 오랜만의 친구와의 만남이었다.
과연 우리 민족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안 계셨다면 우리 민족에게 오늘의 이날이 있었을까?. 너무 감격하여 이충무공 영정앞에 큰 절을 올렸다.
송림이 울울창창하고 쪽빛 바다 물결이 비단폭 같은데 주위 경관이 잘 보전되어 아름답기가 그지없 었다. 강산제일의 명승지란 이런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 같다.
이런 명산 창랑지수에 달이 밝아오면 이순신 장군의 애국시조 한산도가가 울려 날 것 같다.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 명월야(閑山島 明月夜)
상술루 무대도 심수시(上戌樓 憮大刀 深愁時)
하처일성적 갱첨수(何處一聲笛 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
한산도송(閑山島頌) 정용진
푸른 산은
병풍으로 두르고
맑은 물엔
거북선을 띄워
밤에는
둥근 달로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나라사랑
겨레사랑
충무공 이순신장군.
거북선의 위용 앞에
벌 벌 떨며
기가 죽은 왜병들의
한숨소리가
거친 물결로 출렁이고
통곡소리로 흐르는구나.
여기는
우리 민족의 성지
해송(海松)의 힘찬 기상으로
영원무궁토록
푸를레라.
9월 15일(수) 맑음.
진해로 이동, 해군사관학교를 관광하고 거북선에 승선 후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김해공항을 통해 제주도로 이동, 용 바위를 구경하고 라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9월 16일(목) 맑음.
한림공원, 감귤농장, 천지연 폭포를 관광하고 서귀포 유람선을 탔다.
주상절리대, 쇄쏘각을 보고 제주 도지사의 만찬 참석 후 라마다 호텔에 투숙하고. 다음날 한라산의 물줄기를 바다로 내려 쏟는 천지연폭포를 찾았다. 비단폭 같은 물줄기에 안개비가 흐르고 그 음향이 천지를 뒤흔든다. 과연 천하 절경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인 듯싶다.
9월 17일(금) 맑음.
민속촌 성읍 민속마을, 테마파크 선녀와 나뭇꾼을 보고 한라산 중턱 중림 휴양림을 산책하였다.
제주도를 떠나 부산으로 이동,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을 둘러보고 영도다리, 광안대교, 해운대 야경을 바라보며 경주 힐튼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가을 백사장
정용진
누가 걸어갔나.
은빛 모래밭
외줄기
기인 발자국.
언제 떠나갔나.
자국마다 고인
애수(哀愁).
가슴을 두드리는
저문 파도소리.
9월 18일(토) 맑음.
조식후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불국사. 안압지, 국립 박물관, 왕릉고분을 둘러보았다. 신라의 국호가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년)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 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연유함을 비로서 알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의 경사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마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 수 밖에 없었다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포항으로 이동, 죽포시장을 둘러본후 포항 시장의 만찬에 참석 한뒤에 팔로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9월 19일(일) 맑음.
해병 제1사단 방문 후 의장대 시범 사열을 받고 역사관을 둘러본 뒤에 한국 근대 사업의 현장인 포항제절을 찾아 강판 제철의 생생한 모습을 관람한 다음 아름다운 동해안을 따라 대게의 명산지인 영덕, 울진. 삼척. 동해 주문진을 지나 강릉에 도착하니 폭우가 쏟아져 신사임당의 오죽헌과 낙산사의 관광을 겉으로만 바라보고 설악산으로 이동하여 강원도지사의 만찬에 참석한 후 설악파크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금강굴(金剛窟)
정용진
하늘 만지며
흰 구름 이고 걷는
금강굴.
발아래 만학천봉(萬壑千峰)
청의(靑衣)를 걸치고
사공
노 젓는 소리
노 젓는 소리
아 ㅡ
잎마다 조각배
천불동 계류여
노승의 기원
석굴에 배어
영겁의 세월을
풍설에 깍이며
선(禪)의 탑을 이루다.
비선대 명경수
우유 빛 커ㅡ튼 드리우고
선녀
옷 벗는 소리
옷 벗는 소리
칠천 팔백봉 마다
미의향연
칠월 염천도 얼어붙는다.
청해를 마시며
흰 구름 이고 걷는
금강굴.
* 금강굴은 설악산 중턱의 동굴이름.
9월 20일(월) 안개 비.
새벽안개에 쌓인 설악산 비경에 취하여 케이불카로 권금성을 오르고 안개 걷혀가는 신비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년 명찰 신흥사를 관광 한 후 미시령 털을 거쳐 중앙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통하여 우리 내외는 나의 고향인 여주 휴게소에서 내리고 일행 160명은 용인 민속촌으로 이동하여 관공 후 경기관광공사의 만찬에 참석하고 광화문 앞에서 해산하였다.
고향 여주 휴게소에 내리니 죽마지우 신홍은 내외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내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고향 방문인데 폭우가 심하게 내려 퍼 부었다. 비가 어느 정도 멈춘 후 이슬비를 맞으며 우리 내외는 호텔앞에 우람히 솟아있는 영월루에 올랐다. 여주에는 사대강 사업의 이포보, 여주보, 강천보가 한창 진행중이 었다.
강 마을
정용진
내 님이 사는 마을은
돛단배 밀려오고
따사로운 인정 머무는
버들 숲 강마을.
동산에 돋는 해
머리에 이고
가녀린 손길을 모두어 가며
한없이 한없이
기다리는 마음
애달픈 사연 토해놓고
기러기 떼 떠나가고
파아란 강심에
깃드는 강 노을
하아얀 모래밭
푸른 갈 숲을
끝없이 끝없이
가고픈 마음
외로운 초생 달
창가에 들면
멧새도 울음 멈춰
숲으로 드네
그토록 오랜 세월
고운 꿈 가꾸며
이 밤도 잔잔한 강마을
창가에 쉬네.
9월 21일(화)
폭우가 내려 내가 사랑하는 명주 비단자락 여강(驪江)이 흙탕물로 흐른다.
가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이요 애국관의 정의다. 영월루(迎月樓는 전설의 바위 마암(馬巖)위에 솟아있어 여주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공원으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다.
평택에서 고종여 동생이 찾아와서 함께 여주 아울렛을 찾아 쇼핑을 하였다. 140여개의 세계적 명품 아울렛들이 모여 있었고 년 5-6백만명의 국내외 쇼핑객들이 몰려온다는데 신세계와 미국 첼시가 50대 50의 지분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영월루(迎月樓)
정용진
오대산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온 물줄기
여강(驪江)에 이르러
거울을 이루었구나.
애타는 마음
중천 명월로 떠서
내 가슴과
강심(江心)에
티 없이 프르른데
연연(戀戀)한 그리움이
물결져 흐르네.
밤마다
눈부시게
돋아오는 앳된 얼굴
그리운 임을
오늘도
가슴가득 안으려
마암(馬巖) 영월루(迎月樓
돌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
여주는 옛 지명의 이름이 고구려 시대 장수왕 때에는 골내근현(骨內)이었고, 마암 굴에서 두 말을 탄 현인이 솟아올라 하나는 여흥 민씨의 시조가 되었고 다른 한분은 여흥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하여 낙화암과 같은 바위에는 마암이라 크게 새겨져 있고 “두 말이 물가에서 솟아오르니 현 이름이 황려가 되었다.”(双馬雄起 出水涯 縣名從此 得黃驪)라 전한다.
그래서 여주는 황려 여흥 여강 여주의 여러 이름이 있다.
여주에는 청심루(淸心樓)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어 포은 정몽주, 다산 정약용, 목은 이색, 우암 송시열, 퇴계 이황, 류성룡, 김종직 등 4백여편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 전하며, 숫한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었고 성종. 중종, 숙종, 영조. 정조등 많은 임금들이 성군 세종릉을 참배한 후 쉬어가기도 하였다. 지금을 소실 되었으나 복원 운동이 한창이다.
청심루는 여주 팔경의 진수 이기도한데 서울의 낙천정.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청풍의 한한루. 남원의 광한루. 제주의 관덕정과 함께 한국의 명루 반열에 올랐다.
또한 여주는 싸리산을 중심으로 양질의 고령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일찌기 이조 백자의 근원지가 되었고, 일본. 경기 이천 등지로 그전파된 곳으로 해마다 광주 이천과 더불어 매 4년마다 세계 도자기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는 명 도자기의 생산 공장 행남도자기 본사가 여주로 옮겨와서 성업을 이루고 있고, 강진, 부안의 청자와 함게 자기의 명산지로 수백개의 공장들이 학동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어 한국 생활자기의 80프로를 이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마암(馬巖)에 올라서
정용진
청산을 우러르며
벽사(壁寺)를 휘감아
마암으로 흘러드는
청심의 여강(驪江).
무구한 세월의
꿈이 서린
천인단애의 바윗등엔
초연히 웃고 섰는
진달래 꽃 등걸
머언데선 구름이 일고
가까이선 범종소리
청강에 파문지는데
발아랜
가없는 은 모랫벌
내 고향 강마을.
그리던 옛님도
학(鶴)으로 되돌아와
강심(江心)을 거니는데
어제의 동안(童顔)은 어디두고
백발서린 모습으로
장승처럼 예섰는가.
마암에 뜨는 달이
영월루에 깃을펴고
이릉(二陵)에 걸린 달이
향촌에 가득한데
내 마음도
물빛으로 젖어들어
파아란 가슴
하늘이 고여오네.
신륵사(神勒寺)를 굽이돌아
마암을 우러르고
오늘도
소리 없이 저어가는
청심의 여강(驪江).
* (이릉은 세종 효종릉)
나는 다시 내 고향 여강을 이렇게 노래 하였다.
여강(驪江)
정용진
님은
명주 비단자락.
내 마을 인정을
살포시 두르고
굽어 도는
청실 강줄기
그리운 물결 소리
밤마다
애틋한 꿈을 싣고 와
은 모랫벌
조포(潮浦) 나루를 건너는
님은
아련한 달빛.
내 누님의
속마음 같은
명주 비단자락.
* 여강은 여주 앞강 이름. 조포는 신륵사 앞 나루 이름.
내 고향 여주에는 여강(남한강)에 3개의 큰 다리가 있는데 처음에 놓인 다리는 폭이 좁아서 지금을 인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낭만적으로 여강 연인교라 부르고 새로 신축한 강다리는 여주대교, 그리고 세종 영릉 쪽에 신설된 한강에서 제일 긴 다리를 세종대교라고 부른다.
여강(驪江) 연인교(戀人橋)
정용진
여강(驪江)을 가로질러
절경 영월루(迎月樓)와
명찰 신륵사(神勒寺)를 잇는
옛, 여주대교
연인의 다리.
발아래는
명주비단자락
푸른 물굽이가 넘실거리고
밤마다
아련한 달빛이
박꽃으로 피어
내 님의 맑고 고운 옷자락.
너와 나는
이 연인의 다리를
손 마주잡고 거닐면서
사랑을 싹틔우고
꽃을 피운다.
오늘도
애틋한 그리움이
외등 불빛으로 번져
내 고향
여강의 가슴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정겨운데
해맑게 씻기운 은 모랫벌 위에
사랑의 발자국을 나란히
추억으로 아로새기자.
여주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명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신 사찰로 유명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변에는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는 8각정 누각이 암벽위에 서있다.
신륵사 앞 나루를 조포(潮浦)나루라 하는데 마포, 광진포, 이포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라 전해온다.
조포(潮浦)나루
정용진
지존(至尊)의 선비가
천한 뱃사공이 젓는
낡은 목선(木船)에
옥체(玉體)를 맡기고
청강(淸江)의 물살을 갈랐으리라.
인간의 정(情)이란
주고받을 수 록
소리 없는 강물처럼
저리 깊어만가는 것인데
사농공상(士農工商) 계층을
권력의 잣대로 그어놓고
가난한 백성들을
함부로 부리던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조포(潮浦)나루에서
서러운 세월 속에
소리 없이 낡아가는 목선(木船)은
사공의 노 젓는 소리가
옛 임의 숨결로 그립다.
산 노을이 붉은 이 저녁
신륵사 천년의 종소리가
여강(驪江)물결에 티 없이 번지는데
오늘도
마암(馬巖)을 굽이돌며
한양(漢陽)을 향해
도도히 흘러가는
저문 강물소리가
나그네 가슴을 두드린다.
다시 고향을 그리는 시 한수를 감상해보자.
강나루
정용진
노을 붉어
하루가 저무는
강나루.
계곡을 따라 흐르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내리는 강물
천 만길 벼랑을
구르는 아픔보다
더한 진통의 밤은
침묵의 산을 낳고
청명한 공간에 삶을 부르면
티 없이 메아리 져
되돌아오는 언덕에서
온갖 번뇌로 젖어온
그 마음은
바람을 따라 흐르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내리는 강물
가오는 세월도
맴돌아 씻기는 길 역에서면
님의 노래는
애달픈 물결
오늘도
머 언 꿈길을 밀어가는
강나루.
<여주의 노래.2>
9월 22일(목) 맑음.
시인인 정용주 막내 동생과 함께 만나 지난밤에 회포를 풀고 원효대사가 창건한 신라 천년의 명찰 신륵사(神勒寺)를 찾았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경내가 잘 정비 되었고 대웅전인 극락보전은 천년만에 완전 해체되어 복원중에 있었다.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거처한 절로 여강의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있는데 사명대사가 지팡이를 꼿았다는 천연 기념물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있고 벽탑(전탑)이 너무나 아름답다.
신륵사(神勒寺)
정용진
외길 향한
구도의 염원이
얼마나 깊고 멀기에
여강(驪江)은
봉미산(鳳尾山) 자락을
품에 안고
밤과 낮을
여울져 흐르는가.
대 소리 같은
신륵사 종소리가
차안(此岸)에 일어
피안(被岸)에 달하면
원효(元曉), 나옹(懶翁), 무학(舞鶴)스님의
설법이
중생의 낡고 빈 가슴을
자등명(自燈明)을 채우고
법등명(法燈明)으로 밝히네.
인연(人緣)이 다하면
만남과 헤어짐도
무상(無常)한
구름처럼
떠나가는 것.
오늘도
사바(娑婆)의 세계를 향해
멀어져 가는
저문 강물소리
여래(如來)의 마음 같은
신륵사의 종소리가
노을 속에 번지네.
이조 중종때 경기 광주에서 세종능을 여주로 천장하고 여주는 현에서 주로 승격하여 목사가 부임하였고 신륵사를 세종대왕의 은덕을 기린다는 뜻으로 크게 중창하고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하였었다.
입구에는 솟을 삼문이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이문의 이름을 공모한다기에 내가 보은문이라고 하라고 하였더니 세종문이라고 명명하여 이곳방문객들이 다른곳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을 찾는 일이 잦아 개명의여론이 도마위에 올라 있다고 한다. 주위에는 여주 박물관이 있고 여기에는 여주 출신의 문인 목은 이색, 백운거사 이규보, 묵사 류주현의 문 학비가 서있다.
이어 민족의 성현 한글창제의 명군 세종대왕의 능침 영릉(英(陵)과 병자호란으로 고통을 겪고 왕위에 오른 효종대왕의 녕능(寧陵)을 참배 하였다.
여주에는 노론의 영수요 효종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사당 대로사(大老詞) )와 북벌계획의 명장 이완대장의 묘가 있다. 이는 사후에도 효종대왕께서 함께하기를 바라는 염원의 결정이었다.
여주는 정감록이나 택리지에서 명당으로 일컸는 곳이다.
소양강변의 춘천. 여강(남한강) 변의 여주. 낙동강변의 청도가 천하 길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시인 묵객들이 많이 나왔고 왕비가 무려 9명이나 탄생하였다.
지금의 인구가 11만명인데 그 당시는 1천여 명이나 되었을 법하다.
여주가 배출한 태후와 왕비를 보면 고려 고종의 원비 순경태후(順敬)를 시작으로 이조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 (세종의 모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 순조의 비 순원 숙황후(元). 헌종의 비 효현왕후(孝顯). 철종의 비 철인왕후(哲仁). 고종의 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 순종의 비명효황후(明孝).가 나셨다. 그리고 순조의 생모 현목수빈 박씨(顯穆).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府大) 민씨가 탄생한 곳이다. 여주는 쌀도 좋아 명인이 많이 배출된 천하 명당 길지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영릉(英陵)에서
정용진
뜻이 높으시매
넓은 가슴에
어진 백성들의
애달픈 마음을 품으시고
문(文)이 깊으시매
나랏말씀(國之語音)을 창제하사
만백성들의
언로(言路)를 여셨네.
여기는
경기 땅. 여주 고을. 왕대마을
천년 노송들도
성덕을 기려
주야, 사시장철
고개 숙여 푸르른데
미물(微物)
멧새들도
천지 사방에서 몰려와
ㄱㄴㄷㄹ
ㅏㅑㅓㅕ
나랏 글을 익히네.
오늘도
임의 먼발치에서
미진(未盡)한 이 몸
훈민정음으로
시를 쓰는 기쁨이여.
* 영릉은 경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능임.
그후 경기 금강산이라 부르는 양평 용문사를 찾아 관광하고 옛 친구인 이정기 내외와 산채비빔밥으로 식사를 나누었다. 용문사는 신라가 망하고 마지막 마의태자가 세상을 하직하고 금강산 가는 길에 자신의 지팡이를 꼿은 것이라는 공손수의 귀한 벼슬을 한 대형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흐르는 물이 맑아 어느 누가 세심천(洗心川)이라 바위에 새겨 놓았고 그 물소리가 요란하다. 아름다운 산경이다.
용문사
정용진
기(氣)가 솟아
산이 되고
한(恨)이 서려
바위가 되는 가
섬섬옥수(纖纖玉手)
낙랑공주의 손길을
뿌리치고
마의(麻衣)를 두른 채
금강산 가는 길에 꽂았다는
태자의 지팡이가
저리도 정정히 버텨
천년세월 황금빛인데
옛 임이 그리워
백발노안(白髮老顔)
정인(情人)의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르는
그대의 마음은
바람인가
구름인가
달빛인가
연지볼 타는 단풍으로
물든 산 노을.
그리워라
앳된 얼굴
꿈에라도
자로자로 드소서
이 밤도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운 물결소리.
9월 23일(금)
충북 진천 맹동을 찾아 13대 선조의 묘가 있는 선산에 성묘하고, 친척들을 만난 후 동생 정용주 시인이 사는 원주 치악산 금대계곡 화전민 집을 찾았다. 가정을 버리고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인적이 드문 깊은 계곡에서 수도승처럼 홀로 사는 막내 동생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하여 오르는 산길은 험하기도 하였다.
홍수로 인하여 징검다리가 다 떠내려갔고 다리도 불편한 아내는 발을 벗고 머루 다래 넝쿨을 잡으며 2 킬로메타를 징검다리를 세번이나 건느며 힘겹게 올라야하는 가파른 길이었다. 혈육이나 집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산행 이었다.
운반 수단은 알미니움 지개 하나. 이를 등에 지고 식량과 일상 용품들을 져 나른다. 이 사람은 무슨 운명으로 이런 고행을 사서하나 싶어 마음이 찡하였다. 저널리즘의 보도로 등산객이나 시인들이 더러 찾아와 쌀, 간장, 된장, 참기름, 라면 등을 전해준다고 하며 더러는 고기 양념을 하여 가지고와서 식사와 함께 대접도 해주고 간다고 한다. 이웃이라고는 퍽 멀리 염소를 키우며 사는 노 부부 뿐이라고 한다.
주위에는 낡은 화전민 집과 야생 벌통 몇 개, 물은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호수로 끌어다 마시고 쓴다.
산머루
정용진
꽃사슴도
입 맞추는
숲길 시이로
조각하늘이 열리면
그리움 못 견뎌
고목 등걸을 휘감던
산머루가 익는다.
바람이
세월로 흐르고
세월이
바람으로 흐르는
외진 산록.
길 찾는
너의 옷 빛도
주홍으로 물들고
머루 향에 취한
이 저녁
산 노을이 붉다.
*이 시는 박환철 작곡가에 의하여 가곡으로 작곡 되었음.
방에는 시인답게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고 많은 음악 씨디가 진열되어 있다. 이런 심산유곡에 전기와 전화가 들어 온 것이 신기롭다.
시인 동생은 힘겹게 찾아간 우리 내외에게 된장찌개와 찬 이 부실한 저녁상을 드리며 멋쩍게 웃는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어느덧 얼굴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김삿갓 시인이 천하를 방랑하던 중에 가난한 산골 옛 친구를 찾았는데 저녁으로 멀건 죽한 그릇을 소반에 내어놓으니. 이를 보고 김삿갓 시인은 “네다리 소나무 소반에 내어놓은 죽 한 그릇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떠있도다./ 그러나 주인은 미안하다 말하지 마라,/나는/ 물에 비치는 청산을 사랑하노라/하였다 그 생각이 내게 퍼뜩 솟아 올랐다.
단풍(丹楓)
정용진
지금
줄리안 계곡에는
고목 가지마다
옮겨 붙는
불빛이 한창이다.
잎들은
그 영혼이
얼마나 투명하기에
한밤중
별들이 쏟아 놓은
눈빛만으로도
연정의
타는 입술로 저리 붉었는가.
순간을 살아도
영원으로 물드는
나무들의
침묵의 언어들...
서릿발이
영그는 하늘
땅거미가 내리는
어스름
다리를 절고 가는 여인의
발자국 위로
추억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다.
*줄리안은 샌디에고 팔로마산자락 단풍이 아름다운 사과동산.
산곡에서 잠이 들었는데 간간이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리고 산밤 알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단잠을 몇 번 깨기도 하였다.
우리의 일정이 있어 이른 아침 서둘러 친구가 빌려준 차를 타고 동생 잘 있어. 인사를 나누고 우리 내외는 중앙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를 손수 운전하여 여주 호텔로 돌아왔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라도 제 갈 길은 서로 다르더라. 마음이 퍽 아팠다. 건강을 빌 뿐이다.
산을 내려 오는데 가을 단풍이 낙엽이 홍엽으로 물들이기 시작 하였다.
산울림
정용진
산에 올라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계곡을 내려와
너를 찾으니
초생달로
못 속에 잠겨 있는
앳된 얼굴.
다시 그리워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한다.
산에 올라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계곡을 흐르는
산들바람에
피어나는
꽃송이 송이들의
짙은 향이
다시 그리워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 권길상. 박환철 선생에 의하여 가곡으로 작곡되었음.
깊은 산중을 차로 헐떡이며 오르다 영원사 입구 나누아미타불(나무阿彌陀佛)이라 새겨진 돌 비석 앞에서 부터는 온통 길이란 게 없고 장마가 져서 징검다리마져 끊긴 험한 산길을 다리도 불편한 아내와 함쎄 머루 다래 덩굴을 헤치면서 뒤뚱 뛰뚱 10여리 오르니 움막집이 나타났던 기억이 미국 집으로 돌아와서도 자꾸 떠오른다. 과연 정이란게 무엇인지?
치악산(雉岳山)
정용진
산이 좋아
산을 오르네.
그리움에 취하여
오르는 산길
그 마음 못 잊어
달도 따라 나서고
산심(山心)을 싣고
세렴폭포 뛰어내려
달려오는 시냇물도
나를 반겨 맞는데
흐르다 쉬어가는
맑은 소(沼)에는
구룡사(龜龍寺) 선경(禪景)이
병풍을 두르고
그대 마음이
애틋이 고여 있네.
세속의 번뇌를
아득히 잊고
치악산 비로봉을
오르는 산행
간밤 찬 서리에
타는 연정(戀情)으로
잎마다 저리 붉어
옷깃에 젖어드네.
심산에 홀로 사는 정용주 시인은 당호를 취월당(醉月堂)이라 스스로 정하고 심산에 떠오르는 달은 거저 보며, 몽유거처(夢遊去處) 호접지유 일장춘몽(胡蹀之遊 一場春夢)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 고독한 시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동생이라도 애처롭고 고고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는 마치 열반에 드신 법정스님의 삶을 닮았다고나할까. 산을 오르는 행객들의 보살핌이 각별 한듯하다. 산중에는 할미새 영자가 들어간 영원사라는 사찰이 있다.
정용주 시인이 사는
치악산 금대계곡 취월당(醉月堂)에서
정용진
낮에는
빈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띄워 보내고
밤에는
천공에 떠오른 달빛에 취하여
수림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로
잠을 청하네.
산은 첩첩
물은 굽이굽이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빈집에서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토종벌집을 뒤지고
나물 캐먹고 물마시며 살려하오.
인적이 드무니
오가는 길도 필요 없고
노래야 산새들이 불러주면 되지요.
새벽잠은
지붕위에 툭툭 떨어지는
산 밤알이 깨워주고
한밤 문풍지 우는소리
자장가로 들으려하오.
천산에 눈이 덮여
산길이 끊겼으니
오늘 밤은
하현(下弦) 달과 대작(對酌)하며
시나 한 수 읊으려하오.
나의 안부는 낙엽에 적어
바람에 띄우오리다. * 정용주 시인은 나의 막내 아우임.
9월 24일(토) 맑음
아침에 여주로 돌아와 고향 친구들과 여강변에서 여주명물 쏘가리 매운탕에 반주를 들며 옛 벗들과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 아내는 여자 친구들과 여주 온천에서 피로를 풀었다.
9월 25일(일) 맑음.
국제 면허증을 지니고 운전을 하고 아내와 친구 신홍은 내외와 함께 안동 하회마을, 도산서원, 영주 부석사를 관광하였다. 배흘림 기둥의 목조건물의 진수 무량수전과 도산 십이곡을 지으며 유학을 강론하던 퇴계의 모습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하회 마을에는 멀리서 찾아왔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기념사진이 걸려 있었다.
9월 26일(월) 맑음.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로 이동하여 올림픽 타운 최선생댁에서 베푸는 만찬에 참여하고 올림픽 공원을 산책한 후 숙박을 하면서 옛정을 나누었다. 아내의 친구 이선생 내외아 식사를 나누고 올림픽 공원에서 사륜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기도 하였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염려가 되는 것은 이제 인생 70대에 든 여러 친구들이 건강이 좋지 안다는 사실이다. 시인 도연명이 말한 것 처럼 과연 인생은 70을 살기가 고래로 드믄 것일까. 진정한 마음으로 고향 친구들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 하여야 하겠다.
9월 27일(화) 맑음.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백제의 옛 도읍 부여로 향하여 대구에서 올라온 아내의 옛 친구 민선생과 만나 백제의 고도 사비궁 천정전을 관광하였다. 백제박물관과 무녕왕릉 등의 모습을 보면서 감회가 실로 깊었다.
마침 백제의 문화축제가 한창이었는데 신라의 고도 경주에 비하여 너무나 외면 되었던 백제고도 부여에 사비궁 천정전(天政殿))이 복원으로 마치 창덕궁의 규모로 거대하게 재현되어 마음이 흐뭇하였고 저녁에는 새로 세워진 부여 롯데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백제 문화 축제는 부여와 공주에서 동시에 열리는데 전국에서 100만 여명의 인파가 몰려와 북새통을 이뤘다.
낙화암(落花巖)
정용진
밤낮으로
울며
소매깃 부여잡는
백마강 물결에
부소산 앞가슴이
무너져 내려
낙화암으로 솟았구나.
풍덩 풍덩 풍덩...
백옥장삼의 나비 떼들이
망국의 설움을 삼키며
천만 길 벼랑으로
몸을 던진 삼천 궁녀들.
오늘도
고란사 종소리는
그 슬픈 넋을 달래느라
엉 엉 엉 우는구나.
강 건너 너른 벌에는
계백과 김유신의 칼날이
굉음을 토하며
번쩍이는 슬픈 불꽃.
9월 28일(수) 맑음
아침 일찍 서둘러 문무왕의 명에 의하여 의상대사가 창설한 계룡산 갑사를 관광하고 공주의 공산성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왔다. 과연 듣던대로 명산의 대찰이었다.
저녁에는 대전의 김우영 문우 내외가 먼 길을 올라와 저녁을 함께 나누면서 문학적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의가 대단한 분이었다.
9월 29일(목) 맑음.
우강 대학동문과 조반을 함께하고 모교인 성균관 대학, 성균관을 관람하고 동창회관을 찾았다.
점심에는 옛 제자 월천과 문화의 거리 인사동 이름도 고운 “처마 끝 하늘풍경”에서 전통적인 한식을 대접 받고 국가 지정 문화재인 전 윤보선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여 동상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안동교회도 들렸다.
그후 남대문 시장에 들려 오랜만에 고국에서 쇼핑을 하였다.
9월 30일(목) 맑음.
오늘은 나의 고종사촌 여동생 김난옥화백(국전 특선작가)과 청계천 발원지 무교동을 산책 하였고 이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둘째아들 의친왕의 둘째딸 길운황제 이해원 옹주댁을 방문하여 역사적 관심사의 대화를 함께 나누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오후에 인천공항을 통하여 미국으로 돌아왔다.
길운황제 이해원 옹주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일본에서 의문사하여 황실의 대가 끊겨 그의 88세때 대한제국 황족회는 2006년 9월 29일 이해원 옹주를 제 30대 황위 계승자로 추대하여 길운황제가 되었다. 그의 대문에는 대한제국이라 현판이 걸려 있었고 집안에는 태극기와 대한제국기가 세워진 가운데 용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를 작별하고 집을 나설 때 대문밖에 까지 전송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퍽 외로워 보였다. 정부차원에서 보훈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이해원 옹주는 충청도 갑부의 아들 이승규씨와 결혼하여 남편이 다니던 일본 (게이오대학)에 머물다 귀국하였고 남편은 6.25 동란시 납북되어 홀로 4남매를 키웠다.
옹주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사신일이 있어 신문에서 나를 본 일이 있으시다 고 반가워하셔 더욱 친밀감이 들었다.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비극으로 일본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은 황족 들과는 달리 경기여고를 나온 그는 일본 황족과 결혼한 이방자 여사와는 다르게 일본을 배척하고 조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감금되기도 하였다. 조국돌아와서 한때는 하남시에서 막노동을 하는 둘째아들과 함께 지냈으며 지금은 92세로 노년을 보내시는 정경이 너무 애처로워 보였고 이는 국가적인 배려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은가 심히 마음이 아팠다. 우리 일행이 떠나오는 길을 대문앞에 까지 전송하시며 가냘픈 손을 흔들며 바라보는 모습이 못내 외로워 보였다. 조그마한 용돈에도 그는 심히 고마워하시며 소녀처럼 웃는다. 천안에 조선제국 황실을 조성중이니 다음에 꼭 들려 달라고 애청하셨다. 이번 여행은 과연 오랜만의 기념비적인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귀한 기회를 우리 부부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필자: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장로님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