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운동장을 지나 더 올라가 끝, 11시 방향에는 정구장이 있다. 시합을 할 수 있는 운동구면이 두 곳이다. 지금처럼 딱딱한 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재래식의 말랑말랑한 고무공이다. 그때는 정구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요사이는 취미로 많은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지만 그때에는 선수로 활동하는 사람들만의 경기이다. 정구를 할 만한 곳도 많지 않았다. 정구장은 그냥 흙을 덮는 것이 아니란다. 잡석층(가능하면 고운 흙, 15cm), 마사+규사 혼합토(15cm)를 깔고 정지작업을 잘 해야 하는 구장이라 조성비용도 꽤 많이 들어간다. 또 수시로 소금을 뿌린단다. 이유는 비가와도 바닥이 질축하지 않고 잘 말라 공이 잘 튀어야하고 먼지도 많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점수를 부르는데 0: love, 1 fifteen, 2 thirty, 3 forty, 동점 all, 듀스 deuce 등등으로 부르는 것이 생소했다. 지금도 카운트를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위와 같은 경기방식은 영국의 백인들이 하는 경기를 노예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여름이 되었다. 방과 후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다. 학교에 남아 노는 아이들이 없다는 말이다. 아니 서너 명이 허리를 반쯤 접고 손을 뒤쪽으로 올리고 스케이트를 탄다. 아이스하키부가 아니라 빙속 경기 스케이트 선수들이다. 스케이트를 타듯이 한 발을 뒤로 길게 내밀어 앞으로 나가고 다시 발을 바꾸어 앞으로 나가는 다리 근력운동을 그렇게 여름에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이고 돌았다. 그 줄에 ‘이정로’가 있다.
정로는 중학교 3학년 때 유도반 부원으로 같이 맞잡고 운동을 하다가 내가 엎어치기를 하여 넘어뜨렸는데 잡아주지 않고 내리 떨어뜨리는 바람에 목이 수직으로 내리꽂혀 다친 적이 있다. 유도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서 나도 잘 못할 때 저지른 실수였다.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 빙상반 선수들이 그렇게 여름에도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정로는 나보다 많이 크다. 목에 울대뼈도 많이 나왔다. 목소리가 고음이면서도 굵은 편이다. 멋지다고 생각하였다.
스케이트 하면 그냥 ‘롱(long)’이라고 부르는 속도경기용과 아이스하키처럼 팩을 가지고 골을 넣는 시합용 짧은 스케이트, 또 피겨라는 스케이트 앞부분에 톱니가 있어 무용을 하는 것이 있다. 물론 운동 방식에 따라 스케이트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하지만 나도 스케이트를 조금 타 보았지만 그 당시(1957년)만 해도 국산 스케이트는 아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많이 부실했다. 또 날도 쇠가 물러 조금만 타도 날이 쉽게 무뎌졌고 날을 감싸고 있는 쇠가 벌어져 날이 많이 노출되기도 했다. 수리를 하는 곳을 몰라 아버지를 통해 수리를 맡겼더니 너무 심하게 전기용접을 하는 바람에 더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우리는 서울운동장(동대문 옆) 수영장에 그냥 수돗물을 넣고 얼려서 만든 자연빙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겨울이지만 햇볕에 얼음이 녹을까봐 수영장 위에 줄을 여러 곳 치고 넓은 흰 천으로 가리개를 만들었다. 수영장 위를 덮은 것이 아니라 천을 내리뜨려 햇볕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얼음을 얼게 하는 시설, 스케이트장이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얼음을 얼게 하고 또 녹지 않게 계속 전기를 사용하는 비용이 훨씬 비싸서 입장료가 높아지기 때문에 운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 주변에는 스케이트 날을 갈아주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대개 들어가기 전에 날을 갈고 들어갔다. 새로운 직업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자주 만나서 간 친구가 창신동에 사는 박흥선이었는데, 박흥선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척척해진다. 지난 송년회 모임 때 만난 이성휘가 한마디 덧붙인다. 흥선이 아버지께서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고, 아 그러니까 ‘그곳에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선아, 잘 지내니?’ 그 친구 살았으면 무슨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리 일찍 갔는지. 천국으로 메아리라도 전해졌으면….
중학교 본관 건물 입구는 중앙 현관과 좌우 현관이 있다. 좌우 현관에는 건물 뒤쪽으로 입구가 나있고 중앙현관만 앞뒤로 출입문이 있다. 중앙현관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서무과 출납창이 있어 등록금 교과서 대금 등등 현금수납을 하는 창구다. 학교에 직접 돈을 내는 방식이다. 부모님은 돈을 주시면서 꼭 하시는 말씀이 학교 가자마자 바로 납부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실에서 가방에 돈을 두고 왔다 갔다 하면 혹시나 분실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6년을 다니면서 한 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돈과 고지서를 주면 파란색 날짜가 찍힌 도장을 수납부와 영수증에 쾅쾅 찍고 수납인 개인 도장을 콕 찍어서 자를 대고 잘라서 준다.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소집일에 설명을 하시면서 교과서대금 입학금 등록금 그리고 교복 고지서 등등을 받고 지정 판매점(종로 4거리 화신백화점?, 아니면 건너편 단층 신신백화점?)에 가서 교복을 산다. 검정색 동복이다. 교복은 길면 3년을 입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3년 입을 요량으로 큰 옷을 산다.
그래서 입학식 때 보면 대부분 옷들이 크다. 상의는 목이 칼라를 하도록 되어있다. 일본식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옷깃이 올라가고 속에 흰 플라스틱 칼라를 끼도록 되어있다. 그 칼라가 얇고 부실해서 쉽게 망가져 오래 사용할 수 없었다. 부득이 칼라를 계속 살 수 없는 경우에는 뜨개실로 짜서 칼라를 대신하는 친구도 있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명찰이 2개 나온다. 좀 두터운 짧은 털이 나있는 군용 담요 같은 흰색 천 명찰에 이름은 하늘색 한자 이름이다. 명찰 덕분에 한자를 많이 깨우쳤다. 또 선생을 34년 하면서 수없이 학생들 이름을 읽느라고 한자를 많이 알게 되었다.
박번행의 번(繁)은 내 이름 민(敏)자 밑에 실 사(糸)가 들어갔고 김이식의 이(尼, 실제는 니), 김형수의 형(馨 향기 형), 이성휘(輝 빛날 휘, 光+軍)하는 식으로 알았고 웅(雄, 수컷 웅)도 이름에 많이 쓰이는 것을 보고 알았다.
현관에서 오른쪽 복도로 서무실과 교장실이 있고 교무실도 있었을 것이다. 그쪽 복도는 잘 가지 않는다. 괜히 어렵고 갈 필요도 없는 곳이다. 끝에 입구가 북쪽으로 나있다. 현관에는 깔판이 죽 깔려있고 우리는 실내화를 꺼내 신는다. 실내화는 바닥이 가죽이고 위는 헝겊인데 바닥보다는 헝겊이 부실해서 쉬 망가져 오래 신지를 못했다. 복도와 교실 바닥이 나무판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방도 학교 지정가방이다. 가방 한 가운데에 복(福)자가 새겨졌다. 베이지색 천에 고무판을 대어서 방수를 한다고 하지만 쉽게 해어져서 오래 가지고 다니지 못했다. 1학년 나머지 반은 구관이다. 2학년의 되어서 본관 건물로 왔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이근형 영어선생님이시다. 일찍이 탈모가 심하여 머리가 거의 없으시고 둥근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쓰셨다. 6.25 전쟁 중 서울에 남아 계실 때 외출을 하면 으레 모자를 벗고 다니시면서 노인 행세를 하여 군 소집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전쟁 중에는 시내에서 젊은이만 보면 무조건 잡아가 군 입영을 시킬 정도였단다. 머리카락이 없어 집에서 모자를 벗고 있으면 파리가 앉아 간질간질해서 많이 불편하다고 말씀하셨다.
교모, 중학교 교표는 그냥 중(中)이고 흰줄이 두 개다. 윗줄은 좁고 아랫줄은 약간 넓다. 고교 모표는 고(高)인데 획수 사이에 칠한 검은색 바탕은 아주 작은 오톨도톨한 돌기가 있었다. 멋일 수도 있고 다른 학교와의 차별을 두기 위한 것일 수도 있어서 좋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으레 멋을 내는 데 교모가 자꾸 주저앉아 줄과 교표가 안 보인다. 흰줄 2개가 상징이고 교표가 잘 보이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몇몇은 교모 안쪽에 니스 같은 페인트를 발라 주저앉지 못하도록 한 친구도 있었지.
또 바지통이 너무 넓다거나 흉하다고 생각되어 옷을 고쳐 입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목에는 오른쪽이 福자이고 왼쪽이 학년표시를 하였다. 중학교 때 학년표시는 아라비아(1,2,3) 숫자이고 고등학교 때 학년표시는 로마자이었다. ‘福’자와 3학년 ‘Ⅲ’는 크기가 비슷해서 멀리서 보아도 ‘경복고 3학년’이라는 자부심을 은근히 가지고 다녔다.
특히 학교 배지는 잃어버리면 그냥 매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담임선생님에게 신고하고 확인서가 있어야 샀던 것 같다. 이유는 가짜 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을지로 입구에 사니까 시내 중심가를 자주 오가게 되는데 진짜 경복고 학생인 나를 교복을 입은 가짜 몇 명이 둘러싸더니 배지를 뺏으려했던 적이 있던 시절이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인기는 좋았던 것이다, 특히나 여학생들에게는.
그때는 학생들에게 신체검사를 하려면 일정한 장소에서 하지를 않고 학생들이 자기반에서 책걸상을 뒤로 밀고
앞에 나와 앉아 있으면 검사자(같은 학년 학생)가 교실로 돌아다니면서 한 것 같다.
시력검사를 하려면 검사표를 3~4명이 한 장씩 들고 와서 칠판에 붙이고 일정한 거리(3m?)에서 한사람씩 검사를 하였다. 주걱 같은 것으로 눈을 한쪽씩 가리고 했다. 나는 그때 시력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색약검사를 하면 나는 언제나 숫자나 글자를 읽지 못했다. 색약, 그것도 적록색약이란다. 색약은 유전이라는 것과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을 생물시간에 배웠다. 중학교 와서야 알았다.
1988년 45살에 색약인 내가 자동차운전면허를 땄다. 색약은 면허를 딸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색약인 조카가 면허를 땄다고 해서 물어보니 색약은 따로 신호를 읽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준단다. 나는 색약 검사책에 나오는 모든 색약검사 숫자를 외우고 시험에 응시하려고 했었는데 그렇지 않고도 쉽게 면허를 받았다.
청력검사는 손안에 들어가는 둥근 초시계인데 소리가 제법 크다. 앞을 보고 앉으라고 하고 뒤에서 시계를 귀 쪽으로 갖다 대면 손을 드는 식으로 검사하였다. 귀가 어두운 학생은 거의 없었는데 ….
근력검사를 한다고 나무 판때기에 올라서서 쇠사슬로 연결한 작은 둥근 저울을 허리를 굽혀 잡아 올리면 저울눈이 돌아가는 기구였다. 다른 친구는 힘이 약해서 그런지 많이 올리지 못했는데 나는 잡아당기니 쑥 돌아간다. 집에 형들이 운동을 한다고 아령과 역기들을 만들어 운동을 하니 나도 조금씩 한 덕분에 힘이 세어졌나 보다.
그리고 키, 앉은키, 가슴둘레, 체중 등을 검사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라면 체중이 40Kg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키도 작고 나올 배도 없었을 테니까. 구강검사, 소독약에 담갔던 기구를 입안에 넣고 이리저리 검사를 했던 것 같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회 끝 (계속)
첫댓글 교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수영장이 있었던 걸로 기억에 나는데, 어느해 여름인가 저녁무렵 어떤 학생이 준비운동 없이 갑자기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로 익사했다는 얘기도 들었었지. 또 운동장 옆 교사 응달쪽 맨땅에 겨울이면 물을 뿌려 얼려놓았는데 거기서 '이수길'이 스케이트 배우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명찰에 대한 기억은 한자 이름표는 한자공부 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특히 '최종열'은 친구들 명찰에 어려운 한자가 보이면 꼭 확인해서 써보고 익히곤 해서 한문박사로 알려졌었지. 내 이름의 형(馨)도 대부분 친구들은(심지어 선생님까지도) '향'으로 읽곤 했는데 종열이는 확실하게 읽고 쓰고 했었지.
수영장에서 그런 일도 있었군요. 몰랐네요. 이수길이 스케이트 탔다는 것은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는 것이 확실하군요. 김 형도 한자에 관심이 갔었군요. 죄 형이 한자를 열심히 했다니 나보다도 더 열심히 한 것으로 생각되네요. 즐거운 회상입니다. 수영장 운영에 관한 이야기가 좀 미흡했습니다. 수영장과 스케이트장 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추가해 주실분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