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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정원?? 스크랩 타인의 고통과 공감의 원리
유수/백재성 추천 0 조회 94 18.11.20 0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타인의 고통과 공감의 원리


민 은 경*



【주제 분류】 윤리학, 근대철학, 미학
【주요어】 공감, 관망자, 시민사회, 죄의식, 전쟁사진, 자유간접화법, 수전손탁, 아담 스미스
【요약문】 이 글은 수전 손탁(Susan Sontag)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에서 보여주는 공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 의 주요 쟁점들을 짚어본다. 손탁은 공감의 문제를 전쟁사진과 응시의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역시 공감을 ‘죽은자들과의 공감’, ‘중립적 관망자’, ‘죄의식’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어서 손탁의 논의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다.

이 글은 궁극적으로 스미스가 분석하는 공감의 한계, 모순, 나아가 필요성과 중요성이 손탁의 논의를 보다 풍성하게 해준다고 보며, 특히 스미스의 논의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민사회와 ‘자유간접화법’에 관한 논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감(共感, sympathy)이란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를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타인과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공감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전쟁사진을 다루고 있는 수전 손탁(Susan Sontag)의 책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1)

우리가 읽는 일간지에는 먼 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해 집과 고향을 빼앗기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끔찍한 사진들이 매일 등장한다.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못할 광경을 매일매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페이지를 넘기고 아침밥을 편안하게 먹고 출근한다. 혹은 저녁을 먹으면서 저녁뉴스에서 전쟁 동영상들을 본 후 텔레비전을 끄고 밤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사진들을 평범한 하루 일과 속에서 소비하는 것은 ‘전형적인 근대적 체험’이라고 말해야할 정도로(Being a spectator of calamities taking place in another country is a quintessential modern experience) 이 사진 이미지들은 쇼크를 넘어 상투성 그 자체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2) 이러한 사진들을 매일 소비하는 우리가 과연 공감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공감의 척도는 무엇일까? 그 공감의 무게는?


공감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감이 근본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감은 내가 타자와 만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멀고, 서로의 불평등이 클수록 공감은 부질없어 보인다. 특히 타인이 큰 고통이나 아픔을 당하고 있을 경우에 더욱 더 그러하다.

공감은 오히려 타인의 아픔을 지우는, 혹은 전유해버리는 개념이 아닐까?


이 글은 손탁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공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철학서 중 하나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의 주요 쟁점들을 짚어보는 것을 목적으로한다.3)

손탁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에서 공감의 문제를 사진매체와 응시(regarding)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도덕감정론』과 거리가 많이 있으나 두 저서를 관통하는 핵심어가 ‘관망자’(spectator)라는 점에서 비교분석이 용이하다.4)


*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1) Susan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03), 18. 번역본으로 이재연繹, 타인의 고통 (이후, 2004)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원제의 ‘regarding’을 살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로 번역하기로 한다.
2)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8쪽.
3) Adam 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ed. D. D. Raphael and A. L. Macfie, The Glasgow Edition of the Works and Correspondence of Adam Smith, vol. 1 (Oxford: Clarendon Press, 1976; Indianapolis: Liberty Fund, 1982). 번역본으로 박세일, 민경국 공역, 『도덕감정론』 (비봉 출판사, 1996)이 있다.
4) 박세일, 민경국은 스미스의 ‘spectator’를 ‘관찰자’로 옮기고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관망자’로 번역하기로 한다. 관찰(觀察)이 개별적 사물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 반면, 관망(觀望)은 보다 포괄적으로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관망자는 관객(觀客)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관망자의 거리두기를 강조한 점에서 흄(David Hume)이나 허치슨(Francis Hutcheson)의 공감론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John Mullan의 Sentiment and Sociability: The Language of Feeling in the Eighteenth Century (Oxford: Clarendon Press, 1988)는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18-56쪽 참조).



Ⅰ. 죽은 자와의 공감


죽은 자는 절대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심지어 죽은 자들과도 공감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5)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추운 땅 속 무덤에 갇혀 벌레와 부패에 희생되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친지들에 의해서마저 짧은 시간에 곧 잊혀질 죽은 자의 운명이란 참으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며 죽은자의 아픔과 공감한다고 스미스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미스가 말하는 ‘우리’의 공감이 죽은 자들이 느끼는 것을 공유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공감은 다가갈 수 없는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칙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알 길이 없으며,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공감을 할 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타인의 몸에 들어가서 같은 사람이 되어보는 체험을 한다.6) 그러나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는 그 타인과 같은 사람일 수는 없으며 타인이 되어 보
는 상상을 할 때에도 ‘나’를 버리지는 못하며, 여전히 타인의 관망자(spectator)에 머문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공감하는 주체가 타인의 관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타자가 언제나 나의 밖에 있기 때문이며, 그 차이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은 그 만큼 불완전한 것이라고 스미스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본래 타인과 공감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감각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공감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라고 스미스는 규정한다.

왜냐하면 공감을 하는 자는 자신이 타인이 겪고 있는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안전감’이 필연적으로 공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7)

스미스가 제시한 공감의 한계에 대한 유명한 예는 다음과 같다.
거대한 지진이 하루 아침에 중국의 수억만 인구를 모두 삼켜버렸다고 가정하자.8)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유럽의 교양 있고 인도주의적인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잠시 먼나라 중국의 그 불쌍한 사람들을 애도하며 인간 삶의 불안함과 부질없음에 대한 고상한 철학적 명상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곧바로 부담 없이,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자신의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수억만의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어도 코를 골아가며 마음 편안하게 잠잘 이 사람이 그러나 다음날 자신의 새끼손가락이라도 잃게 될 것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억만 인구의 비극적 죽음과 비교했을 때 아주 작은 그의 상실에 그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손탁의 책을 읽다보면 전쟁사진들이 스미스가 예로 들고 있는 중국 지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쟁사진은 우리의 공감의 한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기능한다.

손탁은 우리가 전쟁사진을 통해 결국 느끼는 것은 공감의 한계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의 응시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9)

손탁은 오히려 우리의 공감이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그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죄 없고 무력함을 전제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은 우리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고 부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는 것이다.10)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체험을 산 자들이 온전히 공유할 길은 없다. 그러나 스미스 식으로 말하자면 산 자가 죽은 자의 체험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 지각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공감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우리가 죽은 자와 공감을 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공감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상상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우리의 손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처지를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공감은 나와 타자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하는 개념인 것이다. 감은 ‘우리의 살아있는 영혼을 죽은 자의 생명 없는 몸에 투입해보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며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류의 불의를 억제한다고 스미스는 말한다.11)

죽은 자들이 우리에 대해 완벽하게 무관심하여도 우리가 그들의 처지에 대해 완벽하게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끝없이 기억하고 그들의 운명을 비탄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들과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감이 그들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죽은 자에 대한 공감은 언제나 너무나 뒤늦다) 우리가 공감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죽음이 끔찍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5) “We sympathize even with the dead…It is miserable, we think, to be deprived of the light of the sun; to be shut out from life and conversation; to be laid in the cold grave, a prey to corruption and the reptiles of the earth; to be no more thought of in this world, but to be obliterated, in a little time, from the affections, and almost from the memory, of their dearest friends and relations. Surely, we imagine, we can never feel too much for those who have suffered so dreadful a calamity.”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12-13쪽.

6)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9쪽.
7)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21쪽.
8) “Let us suppose that the great empire of China, with all its myriads of inhabitants, was suddenly swallowed up by an earthquake, and let us consider how a man of humanity in Europe, who had no sort of connexion with that part of the world, would be affected upon receiving intelligence of this dreadful calamity…” 이하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136-37쪽 참조.

9) “These dead are supremely uninterested in the living: in those who took their lives; in witnesses—and in us. Why should they seek our gaze? What would they have to say to us?
‘We’—this ‘we’ is everyone who has never experienced anything like what they went through—don’t understand. We don’t get it. We truly can’t imagine what it was like. We can’t imagine how dreadful, how terrifying war is; and how normal it becomes. Can’t understand, can’t imagine.”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25-26쪽.
10) “So far as we feel sympathy, we feel we are not accomplices to what caused the suffering. Our sympathy proclaims our innocence as well as our impotence. To that extent, it can be (for all our good intentions) an impertinent—if not an inappropriate—response.”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02쪽.
11)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13쪽.



Ⅱ. 공감과 관망


Sympathy(συμπ θεια)의 어원은 σ ν(같이)+π θο (고통)이다. 즉, 공감은 ‘함께 느낀다’는 뜻을 지닌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뜻을 가진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공감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의 관망자일 뿐이다. 손탁이 역설하고 있는 공감의 무력함과 뻔뻔스러움, 혹은 부질없음은 바로 이 구조적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점점 더 이미지化, 스펙타클化 되어가면서 우리는 더욱 더 현실을 관망하게 된다. 손탁에 의하면, 이미지로 극도로 포화된 세상에 사는 우리가 그 이미지들에 대해 무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타자를 관망하는 시각문화가 전쟁을 기록, 고발하는 사진들의 도덕성을 이내 중화, 약화시키고 마는 것이 아닌가?12)


스미스 역시 『도덕감정론』에서 공감하는 사람은 관망자라고 말한다. 관망은 거리를 뜻한다. 사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쉽사리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 스미스의 판단이다. 질투가 개입하지 않는 한 우리는 타인의 기쁨에 훨씬 쉽게 공감을 하는 반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기 마련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13) 누군가가 한숨을 몰아쉬고 눈물을 쏟아가며 시끄럽게 통곡하는 광경을 보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반면 눈이 퉁퉁부었고, 입술과 뺨이 떨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슬픔을 가까스로 다스리고 있는 사람의 조용한 비애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와 더욱 공감한다고 한다.14)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공감을 할 때 고려하는 것이 타인의 감정(emotion)이나 정념(passion) 그 자체뿐만이 아니고, 타인이 그 감정을 느끼게된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반응하는 타인의 태도도 같이 고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공감은 일종의 판단(judgment)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우리가 타인과 공감을 한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의 타당성(propriety)에 수긍하고 동의함을 뜻한다.

동의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공감을 통해 기쁨(pleasure)을 느낀다. 타인의 배고픔이나 성욕이 우리의 공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육체적 고통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고통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며(Nothing is so soon forgot as pain) 타인의 육체적 고통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배고픔이나 성욕 보다는 타인의 실연 혹은 실패에 더 공감하는 것이다(A
disappointment in love, or ambition, will, upon this account, call forth more sympathy than the greatest bodily evil).15) 다시 말해 공감의 대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의 마음의 고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실 그들의 몸과 언어를 보고 읽는 간접적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을 보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의 고통이 숨겨지면 숨겨질수록 우리가 더욱 더 공감한다는 역설은 공감이 순순히 ‘드러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스미스의 관망자가 공감을 할 때 사용하는 눈이 신체의 눈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눈, 상상력의 눈임을 보여준다. 타인이 고통을 참고 다스리는 광경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본다.

지나친 감정을 보일 경우 여성적이고 나약하게(effeminacy and weakness)비춰질 것이라는 것을 아는 타인은 감정표출이 지나칠 경우 우리가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을 꺼려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즉, 우리가 느낄 공감이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남자답게’ 안으로 가져간다.16)

(스미스의 이상적 관망자가 ‘남성’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남성성’은 단순한 ‘감정적 공감’이 아닌 ‘윤리적 공감’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를 의식하는 그 타인이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 타인이 의식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관망자가 아니고 어떤 보편적 관망자, 제3의 관망자, ‘중립적’ 관망자(impartial spectator)라고 스미스는 말한다.17)

즉,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는 ‘나’나 고통을 느끼고 있는 타인이나 이미 내면화된 ‘제3의 관망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던지는 응시, 혹은 자신이 받고 있는 응시를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관망자가 알고 싶은 것은 타인의 고통 그 자체라기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응시해야 할 것인가 이다.


데이빗 마샬(David Marshall)이 지적했듯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그리는 공감과 관망의 복잡한 관계는 일종의 만화경(萬華鏡, kaleidoscope)처럼 얽히고 설킨 응시의 관계망이다.18) 사실 손탁이 다루고 있는 전쟁사진의 문제는, 스미스식으로 말을 하자면, 그 사진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응시를 돌려주지 못하는 데에 있다. 죽은 자는 보지 못하며 말을 못한다. 손탁이 말했듯이 죽은 자는 산 자에게 할 말이 없다.

진정한 공감은 나와 타자간의, 서로를 의식한 응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고 스미스는 보았다. 죽은 자와의 공감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은 자들이 참혹하게 쓰러져있는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응시하지 못함을 안다. 우리만 죽도록 그들을 응시하는 것이다.


가장 섬뜩한 전쟁사진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응시를 사진매체 특유의 사실성을 가지고 재현한 경우다.

손탁은 1970년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크메르 루즈가 ‘정치범’들을 총살하기 전에 그들의 얼굴을 기록한 사진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은 죽음 당하기 직전에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 카메라를 조작한 사람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즉 우리가 그 처형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사진들을 응시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19)

최근에 필자가 본 가장 섬뜩한 사진은 최근 2007년 11월21일자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신문 일면에 게재된 1950년 한국전쟁 사진이다.20) 이 사진에는 나이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무척 어려보이는 젊은이가 땅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있다가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가 앞으로 겪을 운명은 그의 앞에 파인, 시체로 가득한 얕은 구덩이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그의 발을 잡고 있다. 그는 2초 뒤에 분명 그 무덤으로 내팽개쳐질 것이 분명하다. 그와 운명을 같이할 청소년들과 등뒤로 팔을 끼고 있는 그는 순간적으로 혼자서 뒤를—카메라를—그를 겨냥한 총을—우리를 바라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자유이다.

카메라와 총은 같은 위치에—그의 뒤에—있다. 관망자, 그는 총살자이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진을 언제 어디서나 신문에서, 텔레비전에서, 이제는 인터넷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우리는, ‘관망적 응시의 문화’(culture of spectatorship)에 물든 우리는, 이러한 사진들을 보면서 응시의 대상과 공감을 하는가? 아니면, 이렇게 손쉽게 소비되는 사진들이 우리의 공감을 오그라들게 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오히려 무뎌지고 있지 않은가? 손탁이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서 내리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적어도 이 사진들은 우리에게 이 광경들을 잊지 말 것을 주문한다. 공감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억하게 해준다. 우리는
죽은 자와 공감하기 보다는 그들을 기억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인 행위이며, 기억은, 뼈아프게도, 우리가 죽은 자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관계이다.’21) 전쟁사진을 보면서 중립적 관망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의 시선이 곧 칼부림이요 총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쳐다보는 사진 속의 저 타인의 응시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우리가 그 응시를 상상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저 타인을 바라보는 나를 스스로 응시하고 나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그와 불완전하게나마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총알이 날아가고, 칼이 몸을 가르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12)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05쪽.
13)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45-46쪽.
14) “We are disgusted with that clamorous grief, which, without any delicacy, calls upon our compassion with sighs and tears and importunate lamentations. But we reverence that reserved, that silent and majestic sorrow, which discovers itself only in the swelling of the eyes, in the quivering of the lips and cheeks, and in the distant, but affecting, coldness of the whole behaviour.”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24쪽.
15)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28-29쪽.

16)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46쪽.
17) 참고로 박세일, 민경국 공역의 『도덕감정론』은 ‘impartial spectator’ 를 ‘공정한 관찰자’ 로 옮기고 있다. ‘중립적’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18) David Marshall, “Adam Smith and the Theatricality of Moral Sentiments,” Critical Inquiry 10.4 (1984), 597쪽.

19) “And the viewer is in the same position as the lackey behind the camera; the experience is sickening.”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61쪽.
20) Choe Sang-Hun, “Confronting past, South Korea digs up killing field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Thursday, November 22, 2007 (Seoul edition).

21) “Remembering is an ethical act, has ethical value in and of itself. Memory is, achingly, the only relation we can have with the dead.”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15쪽.



Ⅲ. 공감, 내 마음의 감옥?


재미있게도 전쟁사진에 대한 손탁의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22) 대신 전쟁사진들을 묘사하는 글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전쟁사진이 주로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반면, 그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나’는 관망자요, 그 광경에서 어쩔 수 없이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나의 시선은 관음증적이라는 손탁의 주요 논지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겠다.

손탁이 지적하듯이 서양회화사를 살펴보면 끔찍한 학살, 강간, 주검을 묘사한 사례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회화와 사진은 다르다. 사진은 ‘사실’을 보다 가까이서 보여주기 때문에 훨씬 더 충격적이며 우리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23)
왜 우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우리의 온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사진들을 자꾸 응시하게 되는 걸까?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펴내기 2년 전에 출판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숭고와 아름다움 개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고찰』(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7)에서 버크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하는 면도 있지만,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적지 않은 기쁨' 을 느낀다고 말한다.24)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손탁은 이미 플라톤이 『국가』 제4장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고 지적한다. 레온티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들려주는 다음 일화는 우리가 타인의 끔찍한 불행에 적지 않은 호기심, 심지어 시각적 쾌락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레온티우스는 어느 날 처형당한 범죄자들의 시체가 가득한 곳을 지나게 된다. 그 시체들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싸우다 끝내 그 광경 앞으로 발을 옮긴다. 눈을 가려도 본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그는 보고 싶은 것이다. 이윽고 그는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결국 치우면서 다음과 같이 내뱉는다. ‘자, 보아라, 망할 나의 두 눈아, 이 아름다운 광경을 맘껏 즐겨라.’25)

플라톤이 이성과 욕망의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로 들고 있는 욕망이 이러한 ‘눈의 욕망’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버크 역시 지진을 예로 들며 시각적 욕망을 설명한다.

 ‘영국과 유럽의 자랑’인 런던이 화염에 휩싸이거나 지진에 의해 파괴될 것을 바랄만큼 ‘이상스럽게 사악한’ 사
람은 별로 없겠지만, 만약에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면 수많은 군중이 런던의 폐허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들 것이라고 버크는 말한다.26) 즉 우리는 대개 타인의 끔찍한 죽음을 바랄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지만 타인이 끔찍하게 죽었을 경우 그 광경에 이상스럽게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 이끌림이 없다면 우리는 전쟁사진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끌림의 근원은 무엇일까?


버크는 공감을 이 이끌림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개념으로 보았다. 대신 그는 이 이끌림을 설명하기 위해 ‘숭고’(sublime)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숭고한 것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우리의 생존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버크에 의하면 우리는 숭고한 체험을 했을 때 느끼게 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적, 감정적 노동을 하게 되고 그 노동이 우리에게 ‘공포의 빛이 도는 일종의 평온’(a sort of tranquillity tinged with terror)을 안겨준다.27) 끔찍한 광경을 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전에 안도를 하고 그 광경을 타자화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공포로부터 스스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것을 보고 우리가 살아있음을 반사적으로 느끼고 우리의 생명에 일종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아, 다행이다, 나는 살아있다.’


스미스는 왜 숭고 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할까? 이는 버크가 시민사회 속에 형성되는 ‘군중’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스미스는 상업적 시민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관계에 신뢰를 보낸 사실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28) 사회학자 알란 실버(Allan Silver)는 스미스가 그리고 있는 공감이 기본적으로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전제한다고 본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여유가 필요하다. 공감은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에도 나 자신을 되돌
아보는 방법이고, 나 스스로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타인의 응시를 배려하는 방법이다.

공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타인으로서 또한 성립하여야 한다. 공감은 나 자신을 타자화하고, 타자를 자기화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타자는 절대적 타자가 아니다. 공감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하지 못하게 하지만, 우리가 공감을 느끼는 타자는 우리에게 제3자, 우리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무관심한 사람(stranger)일 필요가 있다. 즉, 스미스가 말하는 공감이란 적군과 아군으로 두 조각난 세계에서는 온전히 작동할 수 없다. 내가 아군이나 적군의 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제3자로서 느끼는 공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시민사회-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절대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유롭고 무관심한 사회-에서 공감이 가장 잘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에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적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29)


스미스가 말하는 공감은 다시 말해 봉건시대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근대시민사회에서 작동하는, 역사화된 개념이다. 전쟁은 그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도 공감의 조건에 위배된다. 전쟁에서는 스미스가 말한 ‘타인에 대한 관망’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에는 타인도 없고 나도 없다. 스미스가 묘사하는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사회에서 나는 내 안에 ‘중립적 관망자’로서의 타인을 들여놓고 나 스스로를 심판하고 통제하며 범죄를 저질렀을 때 적절하게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30)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에게 가장 혹독한 형벌은 철저한 고립이다. 자신의 범죄를 만인이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범죄자는 타인의 공감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혼자이고 싶어 하지만, 결국 사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왜냐면 철저하게 혼자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운명이기 때문이다.31)

스미스는 우리는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문학비평가 존 벤더(John Bender)가 스미스의 ‘공감 사회’가 결국 벤덤(Jeremy Bentham)의 펜옵티콘(Panopticon)과 연결되는 일종의 ‘감시사회’, ‘감옥사회’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2)

감은 나의 죄를 스스로 깨닫는 법칙인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죄에 공감해야 한다. 그 죄를 깨닫게 해주는 내 안의 관망자는 숭고한 신이 아니라 나의 사회적 타자(stranger)이다.

(스미스—벤덤—프로이트—푸코의 연결고리가 어렵지 않게 연상되는 지점이다.)33)


22) 이재원譯 『타인의 고통』은 친절하게도(?) 손탁이 언급하는 사진들을 찾아서 싣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은 될 수 있어도 원작의 의도에 충실한 선택은 아니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23) “But there is real shame as well as shock in looking at the close-ups of a real horror. Perhaps the only people with the right to look at images of suffering of this extreme order are those who could do something to alleviate it…The rest of us are voyeurs, whether or not we mean to be.”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42쪽.
24) “I am convinced we have a degree of delight, and that no small one, in the real misfortunes and pains of others.” Edmund Burke,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ed. Adam Phillip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1990), 42쪽.

25) “There you are, curse you, feast yourselves on this lovely sight.”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97쪽에서 재인용.
26) “This noble capital, the pride of England and of Europe, I believe no man is so strangely wicked as to desire to see destroyed by a conflagration or an earthquake, though he should be removed himself to the greatest distance from the danger. But suppose such a fatal accident to have happened, what numbers from all parts would croud[sic] to behold the ruins…” Burke, Enquiry, 44쪽.
27) Burke, Enquiry, 123쪽.

28) 버크는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과 같은 저서에서 절대적이며 숭고한 타자(신, 군주)에 대한 사유를 이어갔다.

29) “Only in commercial and impersonally administered society can friendship connect, not some in struggle against others, but potentially all through forms of association that cumulatively contribute to a moralized civil society.” Allan Silver, “‘Two Different Sorts of Commerce’—Friendship and Strangership in Civil
Society,” Public and Private in Thought and Practice: Perspectives on a Grand Dichotomy, ed. Jeff Weintraub and Krishan Kuma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7), 67쪽.
30)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에서 죄의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한 논문으로 R. F. Brissenden, “Authority, Guilt, and Anxiety in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Texas Studies in Literature and Language (1969)가 있다.
31) “The remembrance of his crimes has shut out all fellow-feeling with him from the hearts of his fellow-creatures. The sentiments which they entertain with regard to him, are the very thing which he is most afraid of. Every thing seems hostile, and he would be glad to fly to some inhospitable desert, where he
might never more behold the face of a human creature, nor read in the countenance of mankind the condemnation of his crimes. But solitude is still more dreadful than society.”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84쪽.
32) “Smith’s sympathetic self-consciousness rewrites the aesthetic of isolation as a social system. The solitude it propounds cannot be that of the old-fashioned dungeon…Rather it must be isolation under inspection—solitude displayed in the glaring backlight of a Panopticon cell.” John Bender, Imagining the Penitentiary: Fiction and the Architecture of Mind in Eighteenth-Century Englan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25쪽.
33) 스미스와 프로이트의 관계에 대해서는 Brissenden, “Authority, Guilt, and Anxiety in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949-51쪽 참조. 자기이해(self-interest)와 죄의식은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스미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나’ 혹은 ‘자아’는 자기애(self-love)와 자기이해(self-interest)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자기이해조차 타자와의 관계망(넓은 의미에서의 ‘commerce’)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누차 말하듯이,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the chief part of human happiness arises from the consciousness of being beloved).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41쪽.



Ⅳ. ‘중립적 관망자’와 3인칭 사실주의 소설


왜 손탁의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실려 있지 않을까? 손탁은 우리에게 그 사진들을 보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바라보는 경험에 대해 사유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진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글의 힘에 대한 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사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면 사진보다는 내러티브가 효과적이라고 손탁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저서 『사진론』(On Photography, 1977)에 쏟아진 비판을 의식하듯, 손탁은『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에서 기 드보르(Guy Debord)가 말한 ‘스펙타클의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현실이 스펙타클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독하게 편협한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4) 세계에는 사진이나 영화,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든 사람들을 관망자로 추정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한 발상이듯이, 뉴스를 아무런 생각 없이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전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고 손탁은 말한다.35) 1977년의 『사진론』에서 피력했던 자신의 예전 입장을 뒤집는 발언이다.

사진이 반드시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사진매체가 담고 있는 근대적 감수성의 특징이 ‘고통을 일종의 사고나 재해, 혹은 범죄로 바라보는 것’(modern sensibility…regards suffering as something
that is a mistake or an accident or a crime)이기 때문이다.36) 우리를 충분히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사진 이미지들의 윤리적 의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올바른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진은 일종의 ‘초대’(invitation)다. 사진은 우리를 사고하게끔 도와줄 뿐이다.37)


손탁이 말하는 ‘내러티브’는 소설일 수도 있고(손탁은 미국 소설가 드라이저[Dreiser]와 뚜르게니에프[Turgenev]를 예로 들고 있다) 영화일 수도 있다(일본 감독 하라 카즈오의 1987년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 한 예로 제시되고 있다).

공감은 내러티브와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관망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타인의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표출되었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공감은 분명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감정론』은 관망자의 상상력이 가지는 ‘서술성’(narrativity)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하고 있지 않다.

벤더(Bender)는 스미스가 말하는 공감의 장이 사실 사회라는 거대한 ‘극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극장이 실제의 3차원의 극장이라기보다 내면화된 극장,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주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3인칭 서술의 극장’(theater…of third-person narrative)이라고 말한다.38) 타인의 감정과 상황과 생각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3인칭 화법으로 묘사하는 근대소설의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 style indirect libre)이야말로 스미스가 말한 관망과 공감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벤더는 앞서 인용한 범죄자와 관련된 대목을 스미스의 소설적 글쓰기의 예로 들고 있다:

‘모든 것은 그에게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황량한 사막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 곳에서는 다시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범죄에 대한 비난을 읽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Every thing seems hostile, and he would be glad to fly to some inhospitable desert, where he might never more behold the face of a human creature, nor read in the countenance of mankind the condemnation of his crimes).39)

여기서 서술자는 범죄자와 공감적 일체가 되어 범죄자의 마음 속 염원을 마치 자신의 염원처럼 투명하게 읽어내고 있다. 서술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서술자를 통해 우리는 범죄자를 이해하게 된다. 서술자와 범죄자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서술자는 상상력을 통하여 범죄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벤더의 해석은 소설의 서술기법 안에 내제된 공감의 원리를 밝히는 동시에 공감의 근대성과 내면성을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하다. 스미스는 공감을 응시, 관망 등의 연극적 은유로 설명했지만, 공감의 진정한 장은 우리의 내면이다. 공감과 소설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이끌어낸다. 동일시란, 나와 타자의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잠정적이며 임시적인, 시험적인 관계맺기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유간접화법에서 서술자가 분명 사라지지 않듯이,40) 공감함에 있어서도 ‘나’라는 중심은 보존될 수밖에 없다. 공감의 동일시는 그 만큼 한계를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잘 보여주고 있듯, ‘나’의 ‘자기애’와 ‘자기이해’ 자체도 다른 한편으로 타인과의 교감과 공감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성체다.
스미스의 공감론은 우리의 내면적 공간에 대한 분석인 동시에 근대적 사회관계에 대한 보고서이다. 아울러 윤리적 판단에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미학적, 텍스트적 요소들에 대한 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우리는 내러티브를 마음 속에 떠올린다.
죽은 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우리가 우리 마음에 써내려가는 소설은 그에 대한 공감과 기억과 경외를 가능케 한다. 마음의 극장, 마음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응시한다. 죽은 자가 뒤돌아보고 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우리 마음 안에서—잠시나마—존재한다.



[사진출처: U.S. National Archives]


34) 『사진론』에서 손탁은 사진매체를 관음증과 폭력과 연결지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비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는 보다 다차원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35)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10-11쪽.
36)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99쪽.

37)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17쪽.
38) “He [Adam Smith] considers spectatordom as the fundamental condition ordering social life, but the state of being he characterizes as theatrical must always be staged in a nontheatrical mental field that much more closely resembles the transparency of the realist novel than the non-narrative fictions of theater. The act of imaginative constrution in Smith’s version of consciousness is not that of theater but of third-person narrative—an unenactable kind of drama that has shed every trace of the histrionic and has become novelistic.” Bender, Imagining the Penitentiary, 227쪽. 자유간접화법에 관한 논문으로는 Michael McKeon이 편집한 Theory of the Novel: A Historical Approach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0)에 수록된 Dorrit Cohn과 Ann Banfield의 글을 추천한다.

39)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s, 84쪽.
40) “In narrated monologues, as in figural narration generally, the continued employment of third-person references indicates, no matter how unobtrusively, the continued presence of a narrator.

And it is his identification—but not his identity—with the character’s mentality that is supremely enhanced by this technique.” Dorrit Cohn, “Transparent Minds: Narrative Modes for Presenting Consciousness in Fiction,” Theory of the Novel, 5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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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tag, Susan.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03.



ABSTRACT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War Photography and the Production of Sympathy


Min, Eun-Kyung


This article overviews the central arguments of Susan Sontag’s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 in light of Adam Smith’s theory of sympathy in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 Sontag and Smith share a common concern with the modern culture of spectatorship. For Sontag, war photography shows that the multiplication of violent images in the current cultural milieu makes sympathy an increasingly problematic and improbable proposition. Smith’s theatrical analysis of the modern individual as a sympathetic and ‘impartial spectator’ of others, however, helps us complicate Sontag’s notion of the spectator as impotent and even impertinent before the overwhelming pain of others. The observant, sympathetic Smithian self is a self-loving but also crucially guilty consciousness who, like Freud’s superego, is self-controlling and self-punishing. The limits of sympathy for the pain of others, in other words, does not automatically translate into an unlimited partiality for the self. The article ends by examining the historical and aesthetic conditions that help us contextualize Smith’s discussion of sympathy. Smith’s Theory of Moral Sentiments should be read as an analysis of the production of both social relations and individual conscience in civil society; sympathy is a moral as well as aesthetic experience. This is why Sontag’s discussion of war photography serves as a useful contemporary entryway to the central questions raised in Smith’s treatise.



Keywords: sympathy, spectator, civil society, guilt, war photography, free indirect discourse, Susan Sontag, Adam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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