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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蝟島)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면적 : 11.72㎢,
해안선 길이 : 66.0㎞
위치 : 변산반도에서 서쪽으로 14.6㎞ 지점 (동경 126°20′, 북위 35°35′)
섬의 형성
위도는 변산반도 서쪽 끝인 격포에서 14㎞ 떨어진 위도와 주변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도와 주변의 섬들은 모두 육지의 지각이 바다에 잠기게 되어 섬이 형성된 것으로 육도(陸島)이며, 유인도 6개와 무인도 24개 등 총 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의 중심인 위도는 길이 7㎞, 폭이 3㎞로 만과 곶이 돌출되어 고슴도치 모양을 하고 있는 섬으로, 면적이 11.144㎢로 전라북도에서 제일 넓은 섬이다. 섬의 구성은 본섬인 위도를 비롯하여 식도, 거륜도, 정금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의 유인도와 임수도, 형제도, 큰딴치도, 작은딴치도, 내조도, 중조도, 외조도, 딴달래섬 등 무인도를 합쳐 30여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섬마을의 구성
위도면의 행정구역은 진리, 대리, 치도리, 정금리, 식도리, 거륜리, 상왕등리, 하왕등리인 8리 11분리 26반으로 편성되어 있고 1563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다. 위도는 위도면의 소재지로 각종 행정기관과 초,중,고등학교가 있으며, 마을버스도 운행한다. 위도에는 파장금, 딴시름, 시름, 진리, 벌금, 도장금, 깊은금, 미영금, 논금, 전막, 살막금, 석금, 대리, 소리, 치도 마을이 있다. 마을의 이름을 살펴보면 ‘금(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서해의 고기떼들이 몰려들어 황금어장을 이루어 파시를 형성하면서 마을 포구마다 돈이 들어온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니 위도의 풍요로운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아름다운 위도 : http://www.beautifulwido.com/file/content.php?cs_ancestor=1&cs_mkey=14
망월봉
위도(蝟島)는 그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섬 최고봉인 망월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작은 섬들은 고슴도치 무리가 바다위에서 자맥질을 하는 듯하다. 섬주위에는 크고 작은 네 개의 해수욕장(위도, 미영금, 깊은금, 논금)이 있어 삼림욕과 해수욕을 동시에 즐길수 있다.
산행코스는 전막리에서 망금봉, 도제봉(152m: 봉수산), 망월봉, 파장봉(162m)으로 이어지는 종주코스가 12km에 이르며 약 5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종주를 하지 않으려면 곳곳에 주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어 다양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망금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하늘을 가린 원시림으로 산악인들 가슴속까지 초록으로 물들이며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들은 천상화원을 연상하게 한다. 인동초 군락과 오솔길을 지나 전망 터에서의 조망은 해식단애의 비경을 끼고 도는 일주도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는 깊은금과 내원암이 한눈에 보인다. 아침저녁으로 울려퍼지는 내원암의 종소리(내원모종:內院暮鍾)는 위도 8경중 하나로 친다. 깊은금은 위도를 고슴도치형상으로 보았을때 음부에 해당하는 곳이라 해서 심구미(深口味)라 했던 것을 지금은 깊은금(지풍금)이라고 부른다.
망월봉에 뜨는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맑고 깨끗해진다 하여 망봉제월(望峰霽月)이라 하는데 이 또한 위도 8경중 하나로 꼽는다. 지금은 이 망월봉에 팔각정이 지어져서 산악인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멋진 조망을 선사한다. 망금봉에서 망월봉까지 주 등산로에는 잡목 숲, 울창한 숲, 오솔길, 안부, 임도, 포장 도로 등 다양한 형태의 길과 곳곳에서의 막힘없는 시원한 조망을 경험할 수 있고, 해안선의 절경, 자연스레 놓여진 섬들과 어우러진 바다의 풍경까지.
GPS 트랙
위도의 유래
진 리
위도에서 삼람이 가장 먼저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해지나 확인 작업이 이뤄진 적은 없다. 가리포라는 원래의 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의 진이 들어서면서 ‘진말`,‘진마을`로 불리워진 것이 유래라고 한다.
벌금리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벌이라서 ‘벌금’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데 벌금은 고슴도치 해수욕장이 위치하고 있어 위도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대 리
무형문화제 제82-3호인 위도 띠뱃놀이가 전해져 오는 마을로 큰 돼지의 목이라는 의미의 ‘대저목`을 `대리’로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깊은금
마을에 자리한 유형이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이 깊숙이 들어와 있어 심구미(深口美)라고도 불리워지는데 여자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년내내 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위도 팔경의 하나인 내원모종(內院暮鐘)의 발원지이다.
미영금
바다에 비친 달의 모습이 예쁘다 하여 붙여졌다는 미영금 마을은 이름 만큼이나 찬사를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빼어난 주변 풍광을 자랑하고 있어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논 금
섬마을 치고는 흔치 않게 논을 경작한다 하여 논금이라 불리웠으며 조약돌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해변 앞에 펼쳐진 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많은 화가들이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살막금(전막리)
개펄에 원시적인 방법인 대나뭇살을 엮어 고기들이 썰물 때 이 살에 걸리게 되어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살을 쳐서 고기를 잡았다하여 ‘살막금’이라 불리웠는데 일제 강점기에 ‘전막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개들넘
개펄 너머에 마을이 있어서 개들넘이라고 한다.
치 도
마을의 형상이 꿩모양 같다하여 치도라 불리우며 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에 큰 딴치도와 작은 딴치도가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갯벌 체험장소로 이용하고 있으며 자연산 굴이 많이 나온다.
식 도
고슴도치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의 앞쪽에 위치한 위도의 부속 섬중에서 가장 큰 섬으로 고슴도치의 밥에 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식수가 부족하여 본섬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하였지만 해저관로를 통해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파장금
위도선착정이 있는 곳으로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유명한 ‘영광굴비’의 본산지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정금
형태가 솥뚜껑 같다하여 솥 정(鼎)자와 금이 나왔다하여 금자를 붙여 정금이라 하였으나 마을에 물이 많다하여 우물 정(井)자로 바뀌었으며 위도팔경의 하나인 정금취연(井金炊煙)의 발원지이다.
딴치도
치도리 마을 맞은편에 있는 섬으로 좌측이 큰딴치도, 우측이 작은딴치도다. 썰물이 되면 바닷길이 열려 갯벌체험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딴’이란 순수우리말로 ‘조금 떨어진’이란 뜻이다.
워도의 전설
내원암
조선 숙종 당시 ‘소지부인’ 이름을 가진 부인이 잉태를 하자 귀동자를 얻을 양으로 숙종 임금에게 진언하여 내원암을 지었다고 한다. 절터가 여인의 자궁을 닯아 이곳에서 아들을 기원하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형제섬
위도 대리 마을에는 쌍둥이가 끊이지 않고 태어났는데 쌍둥이를 낳으면 반드시 한 아이는 바다에 버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씨부인은 쌍둥이를 낳고도 한 아이를 버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고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백발이 허연 신령님이 나타나 ‘너의 아이 둘을 다 데려다가 저 동쪽 바다에 섬 두 개를 만들어
뱃길을 인도하는 표적으로 삼을 것이로다.’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양 옆에서 자고 있던 형제는 간
곳이 없고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르는 동쪽에 섬 두 개가 형제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홍길동전의 ‘율도국’
초립을 쓴 홍길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만민평등의 정의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만인이 평등한 이상국가를 꿈꾸며 활빈당을 이끌고 ‘율도국’을 세우게 되는데, 허균은 위도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관직에 있던 허균은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로 공주 목사에서 파직되고, 부안의 우반동에 있는 정암사에 와서 쉬면서 ‘홍길동전’을 지었다 한다. 소설의 마지막 후반부에 나오는 ‘율도국’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섬’ 위도를 보고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심청전의 ‘인당수’
효녀 심청은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만경창파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의 소설 ‘심청전’에서 ‘인당수’는 격포와 위도 사이에 있는 섬 ‘임수도’의 부근 해역이라고 한다. 무인도인 임수도 해역은 한반도와 남중국을 오가던 조공선과 교역선이 주로 이용한 해상로 상의 요충지로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하는데 곳곳에 암초가 솟아 있어 항해에 곤욕을 치르는 지역이라고 한다. 남경상인에게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온 심청은 이곳 임수도 부근인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칠산바다
칠산바다는 원래 일곱 고을이 있던 육지였다. 이곳에 서씨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지사 한분이 찾아들자 그를 후히 대접하였다. 지사는 떠나면서 서노인에게 후대받은 공을 갚기 위해 한 마디 일러주었다.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될 것이니 떠나라는 것이었다. 저 앞에 있는 큰 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하고는 지사는 가버렸다. 그날부터 서노인은 날마다 부처의 귀를 보러 다녔다. 하도 지성스럽게 부처를 보러다니자 왜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부처를 보러 다니냐고 동네사람들이 물었다. 서노인은 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바닷물이 들어와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된다며 지사가 남기고 간 말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영감이 미쳤다고 조롱했다. 그중에 개백정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개잡던 피묻은 손으로 가만히 밤에가서 부처의 귀에 피를 바르고 왔다. 이튿날 아침 이를 본 서노인은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여기가 곧 바다가 될 것이니 어서 피해라’고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서노인의 말을 듣고 따라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노인이 산으로 올라 한참을 가는데 어디만큼 오니 소금장수가 소금지게를 작대기에 받쳐놓고 앉아 쉬고 있었다. 소금장수는 서노인에게 어찌 그리 급하게 오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여기가 곧 바다가 될 것이기에 급히 피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소금장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바다가 된다해도 이 지게 작대기 밑까지만 물이 찰 것이니 더 이상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땅이 요동을 치며 가라앉더니 칠산고을은 물에 잠기고 바닷물은 소금장수가 말한대로 소금짐 밑에 까지만 찼다고 한다.
대룡샘
옛날 대리마을에 살던 절세미인인 이씨부인을 연모한 서해 용왕의 아들 대룡이 물장사로 생계를 꾸리던 이씨부인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격자,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옹달샘을 만들어 이씨부인에게 선물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대룡샘은 한 바가지를 떠내면 한 바가지가 나오는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신비의 약수터로 무병장수하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풍어기원 행사인 '위도 띠뱃놀이'에 성수(聖水)로 사용되고 있다.
피동지 구멍과 구렁이
대리에는 ‘피동지 구멍’이라는 조그만 바위굴이 있다. 옛날에 성은 피씨이고 동지(同知) 벼슬을 했다고 해서 ‘피동지’라고 하는 마음씨 고약한 사람이 대장리에 살았는데, 어찌나 마음씨가 고약하고 욕심이 많던지 칠산어장의 세금을 혹독하게 받아내어 자기의 욕심을 채우곤 하였다. 대리로 세금을 받으러 오고 갈 때는 네 사람이 메는 가마인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이 사인교를 메는 하인들이 서로 앞에서 메지 않고 뒤에서만 메려고 했다. 그 이유는 가마가 조금만 기우뚱해도 담뱃대 댓통으로 앞에서 메고 가는 가마꾼의 머리통을 때리고 또 담배를 피우고는 담뱃재를 가마꾼 머리통에 탕탕 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역시 사인교를 탄 피동지가 대리로 어장세를 받으러 가는데 길은 좁고 가파르며 자갈이 많아 가마꾼들이 조심조심 가다가 이곳 절벽 옆에서 발이 미끄러져 사인교가 기우뚱하여 흔들리니 피동지가 담배 피던 댓통으로 앞 가마꾼 머리통을 힘껏 내리쳤다. 가마꾼이 어찌나 뜨겁고 아프던지 사인교를 놓치고 쓰러졌으며 그 바람에 피동지는 튕겨져 나와 시퍼런 바다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가마꾼들이 정신을 차려서 내려가 보니 피동지는 간 곳 없고 피동지가 떨어진 그 자리에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눈물을 흘리며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 옆 바위에 뚫린 구멍으로 스르르 들어가 버렸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 구멍을 ‘피동지 구멍’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일대 바닥의 돌이 모두 붉은 빛으로 변한 것은 피동지의 피가 흘러서 그리 된 것이라 한다. 예부터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바다에서도 주벅어장이 조기 잘 잡히기로 유명한 어장인데 조기가 한창 잡힐라하면 피동지 구렁이 내외 두 마리가 가끔 나타나 훼방을 놓곤 하여 어부들이 쌀밥을 뿌려주면 먹고 돌아가곤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피동지 구렁이를 보려고 그 절벽 밑으로 가 보면 구멍 속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볼 수는 없으나 피동지 구멍 주변에서 넓적넓적한 구렁이 비늘을 가끔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정금다리와 인동장씨
벌금리의 조금치와 정금 사이에는 잠수교가 놓여 있다. 많은 돈을 모은 인동장씨는 벌금에서 정금으로 넘어가는 그 돌다리를 엽전으로 놓으려 했다고 한다. 정금 다리를 엽전으로 놓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결코 그 소리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 듯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면 장희빈의 숙부인 장찬은 역관 출신으로 한성부윤 벼슬을 하다 위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정금에 정착하게 된 장찬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땅을 자기 재산으로 불하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장찬이 그랬는지 아니면 후손들이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금마을에 정착하게 된 인동장씨는 청어의 산지이기도 한 위도에서 청어를 잡아 큰돈을 모았다고 한다. 인심 좋은 인동장씨는 부안고을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쌀 천석을 기부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던 인동장씨가 몰락하게 되는데, 파장금쪽 고개에서 왕등도를 바라보면 노을이 질 때 왕등의 한 계곡에서 반짝이는 금빛이 보였다고 하며 배를 짓고 인부들을 모아 왕등으로 금을 캐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일순간에 망했다고 한다. 정금 다리를 엽전으로 놓겠다고 한 인동장씨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생을 마감하게 됐다고 한다.
위도의 문화제
위도 띠뱃놀이(중요 무형문화재 제82호)
위도 띠뱃놀이는 지난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귀중한 민속유산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정월 초사흘에는 한 해의 액을 모두 담은 ‘띠배’를 만들어 서해바다 멀리 띄어 보내는 ‘띠뱃놀이’를 한다. 위도 띠뱃놀이는 산의 중턱에 있는 당집에 지내는 당굿과 바다가에서의 용왕굿이 주를 이루는 풍어제이다. 마을의 태평성대와 풍어를 기리며 온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의식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연례적으로 행하는 토속적인 신앙굿, 당제, 위령제 및 풍어제, 띠뱃놀이로 전체 주민이 한데 어우러져 풍어의 기원과 함께 온 섬이 축제 분위기로 무르익는다.
위도관아(시도유형문화재 제101호)
위도관아는 섬중앙의 진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당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개보수를 통해 원형은 사라지고 형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위도는 남해안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가로막는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는 섬으로 조선시대 숙종 8년(1682년)에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세워진 관아의 건물이다. 위도진의 첨사 종3품 수군첨제절사가 주재하여 사법행정권까지 업무를 관장했던 곳으로, 섬 지방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이다. 조선 선조때 관아의 본군은 왜군의 침략으로 불에 타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순조 14년(1834년)에 건립되어 동헌으로 사용되었던 목조건물만 남아있다.
위도팔경
위도 해수욕장
위도 관광지
출처 : 아름다운 위도 : http://www.beautifulwido.com/file/index_map3.php
교통편
- 작성일 : 2018년 3월 13일
- 출처 : 아름다운 위도 http://www.beautifulwido.com/file/ship_reserve_list.php?cs_ancestor=8&cs_mkey=39
- 반드시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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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 잘 쓰겠습니다..ㅎ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