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1.12.20
07:00의신-07:30삼정마을-08:00이현상아지트 갈림길-08:30합수골갈림길-09:05샘터-09:10벽소령산장-10:30벽소령산장출발-10:40음정갈림길-11:05선비샘-11:30무명봉(1576봉)-11:45칠선봉-12:30영신봉-12:40세석산장-13::40세석산장출발-14:00음양수-14:00삼거리-14:50큰세개골 입구-15:10작은세개골 입구-15:20원대성 마을-15:50대성동-16:10대성교/의신갈림길-16:30의신
오늘을 송년 산행으로 한다. 모두 한해를 정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올겨울도 교육이 있어 한동안 지리산행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주중에 짬을 내었다. 어젯밤에 마신 술에 위가 쓰려온다. 오늘의 산행은 고생 좀 하겠군. 새벽 시간에 광주에서 출발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도착한 시간이 6시 30분.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며 해장국을 먹으려 식당을 찾았으나 모두 문이 닫혀 포기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화개동천을 따라 올라간다. 까만 하늘이 차츰 검푸르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겨울 지리산의 아침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느낀다. 지리산의 심장 깊고 깊은 의신 마을은 고요하다. 계곡 물소리가 서늘하다.
아직 컴컴한 산판 길을 따라 벽소령을 향해 오른다. 삼정마을에 도착하니 머리와 이마에 땀방울이 수북이 맺힌다. 사납게 생긴 큰 개가 목줄을 끊고 달려들 듯이 격렬하게 짖어댄다. 우회 길이 있으나 개 짖는 소리를 무시하며 지름길인 마을을 올라 찬다. 이현상 아지트 갈림길까지는 힘든 된비알. 이 길은 삼십여 분간 죽여 주는데, 천천히 느긋한 걸음이 상책이다.
오늘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아 속내의를 적신다. 그리고 무심히 이십여 분 오르다 길을 놓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세를 살피니 잡목과 너덜지대 위로 희미하게 벽소령 옛길 축석이 보인다. 능선 사면을 어렵게 치고 올라 삼정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좌측의 길은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 합수 내로 가는 길이다. 남부 능선 위로 붉은 기운의 아침 해가 솟는다. 벽소령 옛길의 끝자락에는 좌·우측으로 계곡이 갈리는데, 왼쪽의 경사 가파른 작은 너덜을 올라야 벽소령 산장에 이른다. 반대편 계곡 건너를 바라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옛 군작전 도로의 벽소령 길이 흰 눈을 맞아 선명하게 보인다. 내 언제 한번 저 길을 따라 한번 오르리라.
합수골은 그동안 강한 추위에 꽁꽁 얼었다. 산행 안내판이 붙어있는 줄을 따라 크고 작은 돌 바위를 건너뛰며 계속 오름길을 이어 간다. 뒤를 바라보니 남부 능선의 지능선들이 능파가 되어 펼쳐져 있다. 주능선 위로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이 열려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벽소령 안부가 보인다. 벽소령 산장 아래 샘에서 가늘게 흐르는 물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물통에 받는다. 아침도 거른 터라 심한 허기를 느낀다. 온몸에서 흐르는 그것이 땀인지 술인지 모르겠다. 벽소령 산장에 올라 텅 빈 취사장에 배낭을 내려놓고 퍼질러 앉는다. 지금의 시각이 9시. 의신마을에서 이곳까지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지리산 산장 중에서 벽소령 산장의 취사장은 단연 돋보인다. 유리 온실로 남향의 햇빛을 받아 따사롭고, 확 트인 시야에 화개동천의 끝자락과 남부 능선, 왕시루봉을 볼 수 있으며, 광양의 백운산과 광주의 무등산도 보인다. 오늘은 날이 맑아 남쪽 바다까지 훤히 보인다. 더없이 전망 좋은 곳에 취사장을 지은 것이다. 어묵 국물에 사리를 넣고, 햇반을 데워 게걸스럽게 먹는다. 김치 맛이 끝내준다.
산장 앞으로 올라오니 산님 3명이 쉬고 있다. 어제 연하천 산장에서 밤을 보냈는데 너무 추워 한숨도 못 자고 떨었다 한다. 수면 부족과 추위로 상당히 지친 모습이다. 한겨울 지리산의 밤은 혹독하다. 특히 연하천 산장에서는 산장지기와 숙박자 사이에 난방 문제로 커다란 마찰을 빚기도 하는데 따뜻하게 밤을 보내려면 난방비를 별도로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리 함량 높은 거위 털 침낭 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전쟁 당시 파르티잔 들은 다 떨어진 옷에 헝겊 발싸개로 흰 눈과 얼음 속의 지리산을 군경을 피해 이리저리 쫓겼을 것이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과 손가락도 잃은 채 얼어 죽었고, 굶어 죽기도 했으며, 총 맞아 죽었다. 역사는 지배 세력과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것.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대부분 파르티잔 들은 남과 북에 의해 철저히 고립당했으며, 김일성의 소모품이었다. 그것은 휴전 협정안에 남한의 파르티잔 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남로당수이며 부수상인 박헌영은 미국 스파이로 처형을 하고, 이현상은 선전용으로 평양 열사 능에 가묘를 만들어 놓고 공화국의 영웅이라고 칭송을 한다. 어이없는 일이다.
종주하는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세석평전을 향한다. 음정의 광대골 갈림길을 지나 선비샘에 이른다. 한겨울의 추위에도 얼지 않고 산님을 맞으니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다. 1576m의 무명봉에 섰다. 바람은 한 점 없다. 화개면 쪽의 전망은 특히나 좋다. 한참을 머무르며 땀을 식힌다. 칠선봉에 올라 잠시 조망을 취하다가 천왕봉을 출발하여 오는 젊은 종주팀을 만난다. 배낭의 크기가 자신의 몸처럼 크다. 힘찬 패기로 지리산 종주에 나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삼신봉의 끝자락에서는 산불이 났는지 검은 연기로 가득하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은 무전기를 켜고 심각하게 교신 중이다. 칠선봉에서 영신봉으로 오르는 길은 지리산 종주 길에서 가장 힘든 길. 급한 오르막의 눈 덮인 바윗길을 따라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며 숨 가쁘게 오른다. 영신봉에 올랐다. 함양의 마천면과 천왕봉과 하봉 능선을 바라본다. 천왕봉 산정엔 흰 눈이 가득하다. 제석봉은 오늘도 춥게 헐벗은 모습이다.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제석봉은 숲에 들어가면 울울창창한 수목들로 하늘을 볼 수가 없을 정도라 들었는데, 자유당 시절에 권력과 가까운 개인이 영달을 위해 도벌과 방화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모두 떠나간 세석산장에서 홀로 점심을 먹고 있는 김O기 님을 또 만났는데, 예전과 달리 단정한 스타일이다. 얼마 전 여름 휴가철 때 빗점골 산행 후, 벽소령 산장에서 만났었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벽소령 산장에 도착해 지금까지 산장 일을 돕고 있었고, 올겨울이 다 가도록 머물 예정이라 한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다. 겨울의 지리산을 가장 사랑한다는 김O기 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며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는다. 김O기 님께 커피 한잔을 대접받으며 대화를 나눈다.
세석고원 위에 핀 설화와 하얀 촛대봉이 장관이다. 남쪽으로 멀리 다도해상의 섬들도 선명히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벽소령으로 향하는 김O기 님을 전송하며,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또 만날 것을 기약한다.
지금의 시각이 오후 1시 30분. 대성골을 거쳐 의신마을까지는 3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거림골에서 올라오는 삼거리를 지나 음양수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눈이 없어 아이젠을 분리하여 고어 재킷과 배낭에 매달았다. 삼신봉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의 대성골 길로 접어든다. 곧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무속 신앙지로 명성을 떨쳤던 대성골. 칠선골 다음으로 험난한 코스이다. 한국 전쟁 때 백야전사의 동계토벌 때 파르티잔이 거의 몰살 당한 죽음의 골이다. 최근에 이곳에서 파르티잔 간부의 유해와 떼떼 권총과 유품도 발견했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파르티잔의 뼛조각 하나쯤은 간혹 발견될 수 있는 곳이다.
큰 세개골 입구를 지난다. 대성 폭포와 영신대로 가는 길은 통제구역으로 막아 놓았다. 그 끝은 칠선봉이다. 철 다리를 지나 계곡을 건넌다. 작은 세개골 입구다. 역시 통제구역이다. 작은 세개골에서 까마득한 주능선을 바라본다. 그동안 지나쳤던 원대성 마을도 올라본다. 과거 수십여 채의 산골 마을을 구성하고 있던 원대성 마을. 1960년대 말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극성스러울 때 소개되었던 마을이다. 아직도 반듯하게 남아있는 집터와 텃밭이 있었고, 그 끝자락엔 집 2채가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저녁 준비를 하는지 낮은 굴뚝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대성 마을 좌측의 멀어진 대성골 본류를 옆에 끼고 능선 사면을 걸으니 이윽고 대성교와 의신마을 갈림길이다. 대성교에서 오르는 길은 얼마 전에 폐쇄되었다. 언덕을 가볍게 차고 오르자 곧 의신마을. 의신마을에서 바라보니 토끼봉에서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이 까마득하다. 홀로 산행 때는 먹는 것이 귀찮아 굶기가 일쑤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 언저리가 얼어붙은 섬진강 변을 따라 구례로 나간다. 무조건 길가의 식당에 들어가 장어구이를 정신없이 주워 먹었다. 장어탕 국에 밥 한 공기를 먹고 나서야 눈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수석 창문 밖으로 종석대와 노고단이 어둠 속에서 사라져간다. 오늘 송년 산행으로 한다.
첫댓글 멋진 산꾼!!~
애즈삿갓홍길동님!!~
자나깨나 코로나 조심하시고
뵙는날 건강하게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