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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마오」“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 딜런 토마스(Dylan Thomas, 1914-1953)
여국현 (시인, 영문학박사)
한 해를 마감하는 달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끝을, 끝은 또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합니다. 달력 위의 시간만 그럴까요. 그 시간이 모여 이루는 우리의 삶 또한 그렇지요. 삶의 시작되는 그 순간 이후 우리에게는 언젠가 알 수 없는, 짐작도 예견도 할 수 없는 그 마지막 순간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 누구도 그 필멸의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햇살 가득한 이 세상의 삶을 영원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우리는 빛나는 생명의 순간을 더욱 간절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많은 시인들이 죽음을 두고 읊었지만, 죽음을 이야기 할 때 공통점은 죽음의 영원한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지요. 존 던John Donne은 죽음을 “한 순간의 잠”이라 부르며 뽐내지 말라 했지요.
One short sleep past, w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 Death, thou shalt die.
한 순간의 잠 뒤에 우리는 영원히 깨어있으리니
죽음은 더이상 없으리.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니.
-「성 소넷」“Holy Sonnets 10” 부분
셰익스피어는 예술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했고요.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죽음은 그대가 죽음의 그늘에서 방황한다 뽐내지 못하리라,
이 영원한 시 속에서 그대가 세월과 함께 성장해갈 때.
사람들이 숨 쉬고 눈이 볼 수 있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
-「소넷 18」“Sonnets 8” 부분
기독교 혹은 내세관을 지닌 종교적 믿음이 강고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이처럼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애쓰)며, 오히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희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의 힘이 강하고, 그 믿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더라도 죽음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 우리의 삶과 이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요, 힘써 거부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죽음을 대면한 본인이건 그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이건 말이지요.
딜런 토마스의「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마오」(“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는 이런 평범한 인간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죽음에 순순히 굴복하지 말라고, 끝까지 죽음에 맞서라고 애원하는 화자(시인)의 마음은 달리 무엇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이의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이라면 압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지를.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가 조금 더 버텨주기를,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기를 바라며, 그 순간만은 믿지 않는 신에게라도 매달려 기도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요. 이 시에 나타난 시인 딜런 토마스의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그는 현명한 이도, 선한 이도, 거친 삶을 살아온 이도,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근엄한 이들조차 다가오는 죽음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그들처럼 죽음에 저항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순순히 죽음에 굴복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이니 말입니다. 시를 보겠습니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마시오
노년은 날이 저물 때 불타오르며 고함을 질러야한다오.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서시오.
죽음은 “평안한 밤”처럼 다가옵니다. 이 순간의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없애줄 고요하고 평온한 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평온한 밤의 늪 속으로 항복하듯 무작정 걸어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다가가는 “노년의 날”은 “불타오르며 고함을 질러야합니다.” “격노하며, 격노”해야 합니다. 삶의 빛이, 빛인 우리 영혼이 꺼져가는 것에 맞서야합니다.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현자들은 죽음을 앞두고 어둠이 옳음을 알지라도
자신의 말이 번개불 하나 던지지 못했음을 알기에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않는다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의 “어둠이 옳”다는 것을 아는 현명한 이들조차 순순히 죽음속으로 걸어들어가지는 않는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김없이 찾아오니 죽음은 “옳은 것”이겠지요. 자신이 했던 그 많은 지혜의 말들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깨달음의 빛도 주지 못했음을 아니까요. 현자들이 그러할진대 평범한 우리들이야!
“자신의 말이 번개불 하나 던지지 못했음”이라는 표현은, 기독교에서 목회자의 감동적인 설교의 능력을 ‘불의 혀the tongue of flame’라고 하고, 그런 설교에 감화 되는 것을 ‘화인이 찍힌다’는 비유를 쓰기도 한다는 점을 떠오르게 합니다.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선한 이들은 마지막 파도 곁에서 울부짖으며 외치다오
자신의 나약한 행동들이 초록 만에서 얼마나 찬란하게 춤출 수 있었을까를,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선다오.
선한 이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파도 곁”에서 그들은 울부짖습니다. 마지막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푸른 (생명의) 만”에 남아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춤출 수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춤추기 위하여 그들은 “사라지는 빛”에 저항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이라는 아쉬움은 죽음에 면해서만 간절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죽음에 임박한 그때의 간절함과 강렬함에 비할 순간은 없겠지요.
이 연에서 “초록 만a green bay”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 될 수도 있는데요, 우선 현재 여기의 인간 세상을 의미하는 비유로, 그리고 월계수 관을 비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딜런 토마스가 어린 시절을 스완지Swansea에서 보내면서 즐겨 찾았던 그곳의 바다, 만의 이미지를 시에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이는 현재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 ‘bay tree’가 월계수나무이니 월계수 관을 쓴 것으로, 다시 말해 ‘승리의 관을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관을 쓴’ 것은 바로 죽음에 굴하지 않고 여기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도망가는 태양을 붙들고 노래했던 거친 이들도
슬프게도 태양은 제 갈길 가고 있음을 너무 늦게 깨닫고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는다오.
‘Carpe diem’, 즉 ‘오늘을 즐기자seize the day’라는 모토 아래 시간을 놓치지 않고 즐기던 이들조차, 그들이 아무리 시간을 앞서 달려가는 것 같아도 “태양(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결국 시간을 이기는 이들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왔던 이도 자신 앞에 다가온 죽음을 온 힘을 다해 거부하며 “순순히 (끌려)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근엄한 이들도 죽음에 이르러
멀었던 눈이 유성처럼 불타오르고 즐거울 수 있기에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선다오.
여기서 “blinding sight”라는 이미지는 대체로 육신의 눈멂이 정신의 지혜를 의미하는 비유로 많이 사용되는 것을 연상시키지요. 저 위대한 그리스의 눈 먼 시인 호머Homer와 말년에 눈이 먼 상태로 「실낙원」“Paradise Lost”을 구술한 시인 밀턴John Milton을 떠올려보시길. 그렇지만 시인 딜런 토마스의 부친이 임종 전에 눈이 멀었다고 하니 이 비유의 직접적인 까닭이 짐작이 되는군요.
“Grave men”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듯 합니다. 우선, 글자 그대로 “위독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아버지처럼 “죽음을 앞둔 위독한 이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근엄한 이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삶을 근엄한 태도로 살아온 이들도 죽음이 임박하면 그동안 찾지 않던 (삶의) 즐거움을 찾으려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후자로 보는 것이 낫다는 입장입니다. 화자는 죽음을 앞둔 자신의 아버지가 이 모든 이들처럼 죽음에 맞서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그러니 그대, 나의 아버지시여, 저 슬픈 언덕에서도,
간청하오니 격한 눈물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해주시고.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이 걸어가지 마오.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서주오.
“슬픈 언덕”은 죽음을 예견한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던 언덕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있지요. 그럼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를 “저주하며” 남은 나를 위해 “축복해 줄” 것을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죽음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말고 “격노하며 맞서줄 것”을 간청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지요. 어느 순간에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그 순간. 예상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을 미리 걱정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의 순간, 우리는 그저 담담할 수만은 없지요.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죽음에 맞서 줄 것을 바라는 시인 딜런 토마스처럼 그 순간 바로 그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청하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이 시는 이전에 봤던 시들과는 조금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빌라넬레villanelle’ 형식의 대표적 시인데요, 이 형식은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체 19행으로 되어 있으며, 5개의 3행연구tercet와 마지막 하나의 4행연구quatrain로 이루어지며, 각 연에서 1행과 3행이 각운(rhyme)을 이루는 독특한 정형률을 갖추고 있지요. 딜런 토마스의 이 시는 정확하게 그 형식을 지키고 있고요. age, rave, gay 등에서 반복되는 모음운assonance이나 죽음을 “that good night”, “the dying of light”, “clise of day”등으로 비유하는 완곡어법euphemism 등도 인상적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극복 불가능한 일들 가운데 으뜸은 죽음 아닐까요. 죽음 앞에 자유로운 이 없으니 죽음은 삶만큼이나 모든 이에게 평등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고요. 한편 죽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누구도 다녀온 적 없는 미지의 세계라 그만큼 불가사의 하기도 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종교적 차원의 해결책을 갈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두렵고 의심스러운 존재, 저항하고 저항하고 싶은 존재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요.
시인의 반복되는 호소와 간청, 그리고 마지막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호소는 죽음 앞에 나약하고 무기력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반증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분노하고 소리지르며 죽음에 맞서려 해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시인이 모를까요. 또 우리는 모를까요. 죽음이 데려간 가까운 이들과 아픈 이별을 경험한 우리의 시간들이 시인의 저 반복되는 외침 속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이 시를 올해의 마지막 <영시해설>로 선택한 것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함께 생각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한 해 동안 <영시해설>을 함께 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딜런 토마스의「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마오」“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입니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마시오
노년은 날이 저물 때 불타오르며 고함을 질러야한다오.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서시오.
현자들은 죽음을 앞두고 어둠이 옳음을 알지라도
자신의 말이 번개불 하나 던지지 못했음을 알기에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걸어가지 않는다오.
선한 이들은 마지막 파도 곁에서 울부짖으며 외치다오
자신의 나약한 행동들이 초록 만에서 얼마나 찬란하게 춤출 수 있었을까를,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선다오.
도망가는 태양을 붙들고 노래했던 거친 이들도
슬프게도 태양은 제 갈길 가고 있음을 너무 늦게 깨닫고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는다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근엄한 이들도 죽음에 이르러
멀었던 눈이 유성처럼 불타오르고 즐거울 수 있기에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선다오.
그러니 그대, 나의 아버지시여, 저 슬픈 언덕에서도,
간청하오니 격한 눈물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해주시고.
저 평안한 밤으로 순순이 걸어가지 마오.
격노하고 격노하며 사라지는 빛에 맞서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