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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우주문학론*
―환유와 은유의 우주시론
은유의 시대에는 시의 걸음이 느렸다. 환유의 시대에는 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를 뒤따라 가다 보면 놓치고 만다. 미끄러지고, 떠도는 환유의 특성상 그를 붙잡을 수도 없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미를 무의미화 하는 그의 뇌는, 좀체 들여다보기 힘들다. 시뮐라크르의 일상에 어린 숭고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더 어렵다.
시를 낳아준 어머니가 은유라면, 시를 길러주는 어머니가 환유, 지금 현대시는 두 분의 어머니를 두고 혼돈에 빠졌다. 우주의 중력과 척력처럼 두 분이 꼭 필요한 존재인가. 어느 분을 사랑하든 시인의 자유이지만, 우주는 인자하지 않아서, 자식들을 혹독하게 내친다.
2
이민하의 시집 네 권으로 글을 쓰던 나는 우연히, 몇 년째 생각해온 묵은 숙제를 하게 된다. 그 계기는 황현산의『모조숲』해설「의붓어머니의 사랑」을 보아서이다. 나는 그동안 환유와 은유의 문제를 풀어보려 했다. 예를 들어, 붙들어 매는 은유적 사유가 중력이고, 미끄러지고 떠돌면서 찢어발기는 환유적 사유가 척력이라면, 두 사유의 작동원리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것에 달라붙는 속성을 지닌 은유와 인접한 세계에 다가가 지만 결코 다가갈 수 없어 미끄러지는 환유는 중력과 척력처럼 언어의 우주에 동시에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되고, 기울어질 수도 없는 우주이다.
나는 시의 어머니를 은유, 시의 의붓어머니를 환유라 줄곧 생각해 왔다. 그것은 내 미완의 시집『검은 별』에 나오는 “우주 어머니 중력”과 “우주 아버지 척력” 때문인데, 우주 어머니면, 우주 의붓어머니면, 우주 아버지면, 우주 의붓아버지면 또 어떠랴.
가장 완벽한 어머니,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의붓어머니다. 이민하는 이 의붓어머니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이민하의 시가 편편마다 늘 독특한 매혹을 발휘하는 것은 그가 어머니의 은유로 의붓어머니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은유로 인공을 말하고, 행동의 은유로 시늉을 말하고, 숲과 구름의 은유로 그림에 관해 말한다. 강과 호수의 은유로 수족관에 관해 말하고, 사랑의 은유로 사랑의 풍경에 관해 말한다. 열광의 은유로 관찰과 분석에 관해 말한다.
황현산은 이 해설에서 은유에도 두 어머니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통적인 어머니와 현대적인 어머니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통적인 어머니를 현대적인 어머니로 화장을 하거나 모조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가 다를 수 있고, 낳아준 어머니보다 길러준 어머니가 내게 지배적인 대상이 된다. 혹은 비대상이 되더라도 무의식 속에서라도 나를 더 지배하게 된다. 그러니 어머니보다 의붓어머니를 그리고픈 욕망이 생기고, 라캉이 말한 대로, 의붓어머니는 수많은 타자일 수밖에 없다.그 의붓어머니는 의붓어머니의 의붓어머니일 수도 있고, 의붓어머니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호놀이에 갇혀서일까. 여러 겹의 기표와 기의가 가능하다면 여러 겹의 어머니가 나올 수 있다. 두 어머니만이 아니라 두 자식이, 현대판 친자의 서자 노래가 나올 수 있다. 정작 현실에 있는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의붓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모조화되고, 게임화된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게임화되다가 어머니 게임이 된다. 우리가 자연의 어머니를 인공의 어머니로, 인공의 어머니1로 인공의 어머니2나 3을 만들어 갈 때, 보드리야르가 말한, 복제된 어머니가 계속 생겨난다. 그리고 모노크롬 회화처럼 된다. 이 “단색화(…)모든 형태의 기이한 부재”는,다시 암흑물질 같은 ‘검은 어머니’로 게임화된다. 알 수 없는 우주의 어머니 놀이가 된다.
인공태양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인공바다도 만들어질지 모른다. 이민하의 시처럼, 호수를 수족관화 한다면, 바다도 수족관 하여, 이미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황현산의 말대로 “가장 완벽한 어머니,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의붓어머니다.” 그것은, 어머니는 죽지만(「가위잠」) 의붓어머니는 죽지 않기 때문인데 원본인 어머니는 죽지만 복제된 의붓어머니는 죽지 않아서이다.
당신이 민하씨, 하고 부를 때 나도 함께 그녀를 부르는 느낌이야. 그녀의 뒤척이는 이불이 왼쪽 끝자락부터 걷히는지 오른쪽부터 걷히는지,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부르면 뒤돌아보는지 나도 궁금해지는 느낌이야. 당신이 우리, 하고 입술을 내밀 때 나도 두근두근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 혹시라도 들킬까 봐 테이블 밑에라도 숨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여의치 않으면 눈이라도 질끈 감아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손이 떨려 땀을 닦던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당신이 이런, 하며 바닥까지 내려가 동그란 등을 섬처럼 밀어 올릴 때 도벽처럼 몰래 쓸어 보고 싶은 느낌. 당신이 여기, 하며 손수건을 훨훨 털어 건널 때 그녀의 손에 내 손을 얹어 당신 손끝을 스치는 두 겹의 느낌. 손수건이 해처럼 가볍게 떨어지고, 그래서 손과 손 사이 지평선처럼 갈라질 때 허공에 뜬 내 손은 양 날개가 찢어지는 느낌.
장난꾸러기 당신이 안녕, 하고는 그녀가 입가에 매달려 지켜보는 이빨들을 베란다 창문처럼 꽉 닫을 때 그녀를 안고 구천지하로 함께 떨어지는 느낌. 당신이 아뿔싸, 하고는 달려와 그녀를 어깨에 떠메고 기어올라 갈 때 밑도 끝도 없는 계단이 되어 두 사람을 끌어올리는 천근만근의 느낌. 당신이 그녀의 허파에 깊숙이 혀를 찌르고 인공호흡을 할 때 아아 그녀의 입술에 벤다이어그램처럼 내 입술을 이리저리 포개는 느낌. 그렇게 입을 맞추는 당신의 등 위로 올라가 먹지처럼 당신을 문지르면 그녀의 내장까지 고스란히 내 몸에 복사되는 느낌.
―이민하, 「세 사람의 산책」 부분 (『모조숲』)
그럼에도 은유, 혹은 은유의 은유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은유로 의붓어머니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황현산의 지적은 옳은 듯 보인다. 위의 산문시 「세 사람의 산책」에서 “이 기이한 삼각관계가 은유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닌지, 눈사람 같던 남자가 누구를 향해 이제 표정을 풀려하는지, 새삼스럽고도 진지하게 묻게 된다.”라는 말에 동의하게 되며, 또 예정된 답을 듣게 되지만, 의문은 남는다. “이 완벽한 사랑은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 ‘의붓사랑’일 것이다. 모조된 사랑, 또는 사랑의 모조라는 뜻이다”에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은유를 편애하거나 혹은 편견을 가진, 내가 느끼는 은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3
내 최근작 「소년원」전문을 보자.
내 검은 노트에 반듯한 글씨가 써진다
별이 과도하게 무거워지면
빛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는 법무부 시치료사
나는 죄수복을 입고 시를 읽는다
소년원 건물― “우리의 희망, 청소년 보호”
‘사진을 찍을 때 뒤통수만 찍으세요’
환유의 소년― 달라붙는 은유와 도망 다니는 환유사이
한 죄수가 있다
나는 죄수에게 갈 수 있을까, ㅁ자 감방
검은 노트에 쓰다만 시가 휘갈겨져 있다
감옥― 나를 가두고 나서야,
세상이 넓게 보인다
얼굴― 시커멀수록 전과가 높다,
어머니― 종언의 시
<은유, 환유, 폭행, 아동강간, 은유 무기수, 환유 사형수> 낱말의 감옥
문신 지우는 방에는,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은유의 감옥, 환유를 낳은 어머니 문신
소년은 은유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환유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몇 쪽이 뜯겨져 나갈지 모르는,
검은 노트에는 별들이 박혀 있다
*존 리첼의 블랙홀에 관한 최초의 논문에 나옴. 150년이 지난 후에 아인슈타인에 의해 블랙홀 이 현실성을 띠기 시작함.
황현산이「세 사람의 산책」에서 말한 “은유의 범주를 넘어”선 것을 “모조된” ‘그 무엇’ 혹은 ‘은유의 의붓어머니’라 할 때, 나(‘나’=나)는「소년원」에서 “환유 어머니”라 부른다.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 묻기 전에, 이미 은유적 사유 속에 환유가, 환유적 사유 속에 은유가 들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은유의 은유, 은유의 환유, 환유의 환유, 환유의 은유.
황현산 | 어머니 은유 | 의붓어머니(은유) | 은유의 범주를 넘어섬 | 환유화 |
환유의 욕망 = 의붓어머니 욕망 | ||||
나 | 어머니 은유 | 의붓어머니(환유) | 환유를 죽이고 도망가려 함 | 은유화 |
은유의 욕망 = 어머니 욕망 |
은유와 환유, 둘은 순환의 고리를 가졌는가. 환유의 치유는, 다시 은유밖에 없는가, 이런 의문을 나는 갖는다. “은유와 환유 모두 어떤 부재, 곧 일종의 상실 또는 결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대안은 못된다. 어머니 은유든 의붓어머니 은유, 혹은 의붓어머니 환유든 “환유의 소년”이 “소년원”을 탈출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수많은 세상의 카메라, 언어의 눈들은 소년의 “뒤통수만 찍”을 것이고, 소년 또한 제 얼굴이 찍혀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신 지우는 방”의 문신은 말 그대로 문신(文身)인 것이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제 문신을 누구나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어머니란 은유와 어머니란 환유를 물려받아서인지도 모른다. 만약 소년이 전우주가 어머니란 걸 느낀다고 해도 감옥을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은유와 환유의 어머니, 혹은 은유와 환유의 아버지들이 소년을 석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 분의 어머니가 문신을 새겼지만 문신은 증식하여 둘로 셋으로 새겨지고, 지워도 나타나기에 결코 지을 수 없는 문신인 것이다.(여기 “시치료사” 얘기는 텍스트일 뿐이고, 시치료의 효과는 다른 문제다).
4
환유적 사유에서는 선도 악도 미끄러지는가. 선악이 본래 없다거나, 있다거나 가 아니라 중력 척력처럼, 은유와 환유가 서로 싸우며 돌보는가. 그 사이사이에 암흑물질 같은 것이 있어서 웃고 있는가. ‘알 수 없는 웃음’ 암흑물질이 있어서, 물질인지 반물질인지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암흑물질, 나는 내 산문집『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도서출판 b)에서 ‘인간=암흑물질’이라는 공식을 만들려 했다. 그 공식이 실패했을지라도 나는 폐기할 생각은 없다.나는 2009년에『詩魔』(천년의시작)란 시집을 냈고, 또 2013년에『하얀 별』(문학과지성)이란 시집을 냈지만, 알고 보면 지난 십 년을『검은 별』한 권을 쓰느라 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검은 별은 암흑물질인가.
은유의 우주 | 어머니 우주 | 하얀 별 | 어머니 사랑 | 우주 중력 |
환유의 우주 | 의붓어머니 우주 | 검은 별 | 의붓어머니 사랑 | 우주 척력 |
암흑물질의 우주 = 인간 |
물론 나도 오규원처럼, 수사법이 아니라 환유적 사유를 말하는 것이지만 축이 다르다. 그것은 환유를 중심에 두지는 않는다. 또 그가 비판한, 은유를 중심에도 두지 않는다. 오규원이 “진리는 동사로 발견되고 서술되기도 한다.”라고 했을 때, 이미 언어 속에 ‘움직이는 우주’가 있음을 발견하고, 환유 우주의 감식자인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환유와 은유 둘을 동시에 중심에 둔다.(빅뱅 우주, 인플레이션 우주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없지만, 또한 모두 움직인다고 단정하면, 고정되는 언어의 모순에 빠지기에) 이제 환유의 척력과 은유의 중력을 동시에 중심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단순한 시의 표현, 방법론, 시의 생명만이 아니라 시의 죽음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은유의 죽음(소멸)은 환유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환유의 죽음(환멸)은 은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모두 연쇄적인 죽음이다. 내가 하얀 별에서 그리려 했던 것이 결국 시의 죽음이었는지 모른다. 고향의 장례는 지구의 장례로 이어지고, 지구의 장례는 우주의 장례로 이어지고, 우주의 장례는 시의 장례로 이어진다.
우리가 언어의 혼례를 치르려면 시의 혼례가 필요하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고, 언어의 우주에도 중심이 없다. 은유와 환유의 동시 작용이 없는 언어의 우주는 종이가 찢겨 지고 만다. 검은 노트처럼, 글을 쓸 수가 없다. 중력만 있고 척력이 없는 우주가 되거나, 척력만 있고 중력이 없는 우주가 되고 만다. 어머니도 의붓어머니도, 아버지도 의붓아버지도 필요하다. 은유적 사유가 과해서 인간 중심적 사유에 붙들렸다면, 환유적 사유가 과해서 또, 한 사유로 치우친다. 사물 중심적 사유로 물질화된 사유는 현대적이다. 물질은 더 현대적이다. 인간보다 더 현대적인 물질이 있는가. 인간은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품고 있다. “암흑물질=인간”이란 사유가 가능하다면 다시 환유의 폭력을 알아야 한다. 은유의 폭력을 알아야 하듯, 의붓어머니를 사랑해야 하듯, 의붓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듯. 그래서 어머니를 사랑해야 하듯. 여전히 환유와 은유 어머니를 버릴 수 없는 시인에겐 암흑물질인 언어가 숙제이다.
5
광녀여 우주의 광녀여 별이여 하얀 별이여
내 시설(詩說)을 들어라
내 시집『하얀 별』의 후렴구 가락이다. 시(詩)의 가락이면서 설(說)의 가락이다.
내 산문집『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에도 나오듯이, 고려 가요의 후렴구의 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나, 처음부터 후렴구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 민족의 이천 년 시사의 꽃인 고려 가요에 이르기까지, ― 고려 가요의 후렴구는 아주 중요하다, 시설의 후렴구도 중요하다! ― 잃어버린 왕국, 가사에 이어 현대 시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시의 꽃이 시들었는데 유독 한국에만 망국을 면하고 있으니 무슨 시의 과업이 주어 젖는가. 이 끝나지 않는 노래는 시설의 후렴구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고려 가요의 무의미해 보이는 후렴구 가락에서 이상한 율동이 느껴진다. 여기, 무슨 비밀이 들어있지 않은가. 의미도 무의미도 아닌 것, 은유도 환유도 아닌 것, 타자들의 광기, 개인이며 집단인, 떠도는 환유의 노래,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에게도 고려 가요 후렴구의 핏줄이 만져지는 것이다. 무의미의 확장, 반복, 우주의 무의미의 확장, 반복, 일탈, 이 무수한 후렴구의 반복, 세계의 율동으로, 우주적 율동으로, 우주음의 무한한 반복이 시설의 후렴구 아닌가. (언제부터)내 귓가에 무슨 소리가 울린다. 우주음의 전파 소리만이 아니라, 아리랑의 후렴구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릴 적 수없이 들었던, 상여 나가는 소리, 상엿소리, “허널 어화널 어나리 넘자 어화널”상엿소리 뒷소리 후렴구!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후렴구! 무의미도 의미도 아닌 후렴구! 우리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후렴구(은유도 환유도 아닌 후렴구)! 우리 후렴구의 무한한 반복, 우주의 음악이. 우주 가락, 흥에 겨운 후렴구는 한국시의 유전인가? 시의 진화? 시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가락이 문제인 것이다. 서구적 사유도 우리 사유도 가락이 있을 터, 요즘 한국시의 장형화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상엿소리 후렴구에서, 이미 우리 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꼬리가 잘리고 끊기는, 보이지 않는 꼬리가 생겨난, 이 꼬리들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이 얼굴 많은 시대 또 다른 얼굴, 얼굴 없는 얼굴, 진화와 역진화의 몸통(얼굴=꼬리 잘림), 보이지 않는 꼬리 생겨남의 반복, 무수한 보이지 않는 가락의 반복.
모든 풍경은 유전되는지 모른다.
모든 언어는 유전되는지 모른다.
우주에 복제만이 있으랴만, 그때부터 내 손가락은 요동을 친다. 그 긴 시설이 “검은 광인(검은 별 1)”의 “무음곡”처럼 광기로 써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잃어버린 원본을 찾으려는 게임이 복제이다. 원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에 게임은 계속 된다. 그래서 시의 복제가 시설인지 모른다. 시설의 복제는 죽음의 복제, 숱한 묘비들의 복제로 이어진다. 묘비의 게임으로, 게임의 묘비로, 묘비의 빌딩으로, 빌딩의 게임으로, 모든 건물을 우주선으로 그리고, 우주 게임으로…….
줄리아크리스테바가『공포의 권력』에서 말한 “무(無)에 대한 환각”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 열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글을 쓴 건 사실이다. 「흑비」나 「백비」를 쓸 때 곡성 같은 울음이 빠져나오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는 환희의 음악이 흘러나와, 공간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순식간의 글쓰기에 오 분 정도 흘러간 줄 알았던 시간이 다섯 시간이나 흘러있었다. 나는 십 년을 시설에 미쳐, 시의 반동으로 살았다. 시설의 게임에서 시의 게임을 찾으려, 시와 시설의 순환 고리를 찾으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시설 → 비설 → 우주설 ’의 순환 고리를 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순환 고리가 이어진다면,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를 이으려 했던 릴케의『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계속 들여다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은 하나라는 것이『비가』안에서 입증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저기, 그들이 사는 골짜기 안에서는 좀 나이든 탄식이
젊은이의 질문을 떠맡는다. 우리는,
그녀가 말한다, 위대한 종족이었다네, 한때, 우리들 탄식은. 조상들은
저기 큰 산속에서 광산일을 했다네. 인간 세계에서
그대는 때때로 갈고 닦이운 한 조각의 근원-고통을 찾아내지,
아니면, 옛 화산에서 나온, 화석이 되어 번쩍이는 분노를.
그렇다네, 그것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라네. 한때 우리는 부자였다네.―
―「제10비가」, 『두이노의 비가』부분
얻은 모든 것을 기계는 위협한다, 기계가
복종보다는 정신 속에서 존재하려고 설치는 한.
훌륭한 손의 아름다운 머뭇거림이 더는 뽐내지 못하도록
기계는 더욱 단호한 건축을 위하여 더 고집스럽게 돌을 자른다.
어디에서도 기계는 뒤처지지 않으니, 우리는 한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기계는 조용한 공장에서 기름칠하며 스스로의 존재가 되지 않는다.
기계가 생명이라고,―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계는
똑같은 결단으로 정돈하고 만들어내고 파괴한다.
―「제2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부분
19세기와 20세기의 릴케는 기술 문명 시대를 살았지만 이렇듯 인공지능시대를 예견했다. “복종보다는 정신 속에서 존재하려고 설치는” 기계들의 본성을 감지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더 문제가 심각하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기 때문이다. 아직은 기계의 작동원리를 인간만이 알고 있다. 릴케는 기계가 작동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릴케는 “위대한 종족”들이 “광산”에서 캐내던 “근원-고통을 찾아내”라고 말한다. “번쩍이는 분노”가 “거기에서 나온 것”이고, “한때 우리는 부자였다”고. 그가 말한 ‘근원’은「제10비가」에 나오듯 “젖떼기의 처음 상태”와 “고통의 진주알”과 “인내의 면사포”를 요구한다. 그래서 ‘고통’없는 ‘근원’은 없다. 릴케의 시어가 ‘사물시(事物詩)’이지만, “상상의 영역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옛날이나 지금의 ‘신 중독’처럼, ‘게임 중독’ ‘악마 중독’이 가능한 시대이다― 우주는 게임화되어간다. 과학이 그걸 부추긴다. 지금은 우주의 중력파 시대이고 “우주의 피부가 공허한 마네킹의 피부처럼 느껴지던 것을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지게 하여 ‘육체의 우주’가 감지되는 시대”이다.내 시집『詩魔』에서도 광인 과학자의 얘기가 나오는데, 우주 시공이 찢어지면, 그는 바늘로 깁는다. 이것이 실재 가능한 일이라면, 라캉의 말처럼, “실재계에 나타나는 틈새”와 “구멍”은 은유와 환유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다. 이미 상징계의 구멍이 숭숭 뚫려, 우리가 돌아갈 상상계의 어머니는 없는 것이다. 은유의 어머니는 사라지고, 환유의 어머니가 등장하지만,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의붓어머니이고, 우리는 아버지나 의붓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우주의 척력처럼 붙잡을 수 없다. 우주 어머니 중력, 시를 낳아준 은유의 어머니. 시를 길러준 환유의 어머니. 우리 인류는 은유의 죽음만 감지한 것이다. 우주에서, 우리는 영원히 떠돌 것이므로 은유의 죽음만 있을 뿐, 환유의 죽음은 모르는 것이다.
*원제가 ‘우주시설론’이었으나 그냥 우주문학론으로 가기로 했다. ‘우주시문학론’으로도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내가 매일 걸으면, 걷는 만큼 지구도 걷고 우주도 걷기에, 그냥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