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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朴景利 | Pak KyongNi | |
본명 | 박금이 (朴今伊) |
출생 | 1926년 12월 2일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 328 (현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328-1)[1] | |
사망 | 2008년 5월 5일 (향년 81세) |
서울특별시 서울아산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소설가 |
수훈 | 금관문화훈장 (2008년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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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문화에 대한 비판5. 여담6. 수상 이력7. 관련 문서8. 외부 링크
대한민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사회와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성과 생명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현 통영시 문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으며 홀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3]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에 대한 분노는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렇다 보니 이후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었다. 소박 맞은 모친이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 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 학창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고등여학교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 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거제 출신의 김행도와 중매 결혼하고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경리는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한 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정식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경리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 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고등여학교 선배였던 김동리의 부인네 집에 친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말해버리면서 본의 아니게 박경리의 글이 김동리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 당시 박경리는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상(想)은 좋지만 아직 (완성은) 안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당시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며 친구를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계속 작품을 가져와 보라고 말했고, 이후에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던 시기였는데, 습작을 들고 문예 살롱을 찾아오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경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고,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살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일어나고 부터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안 하겠으니 자신이 제출한 원고를 모두 돌려 달라고 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김동리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 문학' 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는다. 박경리가 제출했던 습작들 중 '불안지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원고를 김동리가 가지고 있다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수록된 '현대 문학' 지를 우연히 자기 작품이 수록된 줄도 모르고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못 알아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추천을 두 번 받아야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첫 추천을 받고 부터 비교적 늦은 편인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다시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박경리는 이후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밝히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불신시대'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6,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장편 소설을 많이 썼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 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 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박경리는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해왔던 당대의 한국 작가들과는 다르게 예외적으로 장편을 많이 쓴 작가로서, 그가 쓴 장편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20여 편에 이르고, 특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은 명작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표류도,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등을 썼는데, 나머지 장편 소설들의 경우는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박경리는 1958년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한 다음 다음날 또다시 화재라는 액운을 만나 사과 궤짝의 살림 살이나마 다 날려버렸다. 그때 마침 딸아이는 중학교 입시의 시기였으므로 울었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박경리는 글을 쓰고 또 써서 “영화 원작료다, 인세다, 원고료다 하며” 돈을 벌었다. 박경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구러 하는 동안 나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디다 쓴 일도 있지만 소설가란 내게 천직이었던 모양으로 나는 어떤 직장이든 붙어있질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박경리를 걱정했다. “김말봉 선생님께서도 신문사를 그만둔 일을 꾸중 하셨고 내 자신도 어쩔 참인지 다만 막막하기만 했다.” 박경리는 이른바 ‘인기’나 ‘출세’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학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의심과 자문자답은 나를 허황하게 흩뜨려 놓고 보다 깊은 고독과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는 경향을 짙게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 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 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 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 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1969년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써냈다. 사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집필에만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 장편 소설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토지를 집필하던 중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딸이 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15일 밤 9시 40분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는데, 김훈의 수필 중에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제목으로, 김지하 시인이 풀려났던 그날 추운 겨울 바람 속에 생후 10개월 된 손자를 업고 나와 택시를 대절해 놓고 사위를 기다리던 박경리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글로 담아낸 소품이 있다. 하지만 김지하는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 온 차를 타고 가버려 길이 엇갈렸다고. 김지하가 석방된 2월 15일은 백기완 시인도 함께 석방되었는데, 교도소에서 백기완이 6년 전에 국민투표 법 위반으로 벌금 10만원 형을 선고 받은 전과가 있는데 그걸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고 하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금 모금을 하는 와중에 교도소 정문 앞 광장까지 와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내서 옆에 있던 대학생에게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며 준 다음 대절해온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2003년 토지에 이어지는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현직 대통령인 이명박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 문화 훈장을 직접 추서 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이었다. 5월 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랜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 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박경리는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는데, 그 때 박경리가 살던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그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미래캠퍼스 내의 청송관(인문예술대학 건물) 옆에는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청송관 내부에는 북카페 토지 라는 공간이 생겼다 북카페 안에는 박경리의 유품 일부도 전시되어있다.
사후인 2011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1회 수상자인 최인훈을 시작으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응구기 와 티옹오(케냐) 등이 수상했다.
박경리는 반일주의자였고 일본 문예지의 편집장과의 인터뷰 당시에 자신을 '반일 작가'라고 하였다. [12]
일본의 문화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유고집 중에 《일본산고(日本散考)》라고 하여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는 서적이 나온 바가 있다. 1편 '증오의 근원'과 2편 '신국의 허상'은 각각 200자 원고지 25장 안팎으로 완성본이나 3편 '동경 까마귀'는 13장으로 미완인데 딸 김영주에 의해 정리되어 2013년에 발간되었다. 당시는 한일 관계가 냉각되어 있던 시점이어서 김영주 씨가 공개를 결심했다고 한다. 발간 시점에서 15년 전 글로 추정된다고 한다. 박경리는 일본산고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 외에도 전쟁에 대한 일본의 양심에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박경리는 김용옥과 나눈 대화에서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김용옥에게 '일본은 야만'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담에서 박경리는 일본문화를 야만적이고 가냘픈 센티맨탈리즘에 불과한 로맨티시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자살밖에 답을 찾지 못한다면서 노골적으로 일본문화를 비판했다. 다음은 그 일문일답의 일부를 적은 것이다.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그녀의 소설 토지가 일본에서 반일문학으로 치부된다는' 답변으로 왜 자신이 반일인지 말하였다.
일본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 저서 <일본산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일본인의 주장을 반박했다.
한편 산문집 '생명의 아픔'에서 일본인을 그동안의 일본의 행적에 비하여 단순하고 소심하며 범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 간에 일본과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평했다.
**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