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교 시절
강헌모/수필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다닌 나는 3년동안 하숙을 하면서 생활했다.
첫 번째 하숙집은 같은 성씨姓氏를 가진 할아버님 댁에서 부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자와 함께 생활하는 곳에서 살았다. 처음 낯선 곳에서 생활해서인지 아버지께서 아는 사람 집을 알으셔서 하숙하게 된 것 같다. 아마 부모님이 내가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그득하신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이렇게 떨어져 생활하다보니 1주일에 1번씩 집에 가곤했다. 어울릴 사람도 없고 심심하기도 했지만, 나는 도시 생활에 그런대로 만족했다.
하숙집 앞에서 보면 기와집이 있는데, 그 곳에 사는 중학교 2학년쯤 돼 보이는 여학생을 좋아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 때의 내 성격으로는 말을 건넬 용기조차 없었다. 그래서 혼자 마음 애타는 짝사랑을 한 거다. 담너머 옆집의 한 학년 높은 누나도 좋아해서 교복입고 학교 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보기 좋았다. 한창 사춘기때라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솟구친건지,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에서 오는 현상 때문인지 모르겠다. 온순했던 나는 지금의 고등학생처럼 육체적으로 성숙하지도 못한 편이고, 남녀간에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남녀 공학없이 각각 남학교, 여학교를 다녔다. 어느때에는 모처럼 학교에서 타학교 남녀 학생들이 와서 교련복을 입고 행사를 위한 사열 훈련을 했는데, 교련복을 입은 모습은 너무 멋졌다. 대학교에서도 교련시간이 있었을 때다. 가난한 시절이라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은 모습이 더 유난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게다가 모자와 학교 뺏지에 카라까지 할때였고, 규율은 엄했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더 빛나 보였다.
두 번째 하숙을 한 곳은 충남기계공고 앞의 마을에서인데, 첫 번째 하숙했던 집과의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편이다. 그 주인 아저씨 되는 분도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연유로 그런대로 학교 잘 다녔다. 하지만, 등교하기 위해서 시내버스를 타려면, 한참 걸어야 했다. 한 때 등교하다가 기침이 나서 가래침을 뱉었는데, 피가 섞여서 나왔다. 놀랬다. 입에서 피가 나오다니….
아마 나는 기관지나 폐계통에 건강이 나빴던 것 같다. 그래서 시내에 있는 내과를 한동안 다녔다.
대전 시내에는 만인이 알아주는 거대한 두 건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다.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건물 안에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라서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나는 거기 한 번 들를때면 기분이 너무 좋은거다. 촌 사람이 큰 건물에오니 눈이 휘둥그래져서 신났던 모양이다.
학원엘 조금 다녔던 것 같은데, 학원가에는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부모님이 자식 잘 되라고 없는 형편에 꽤 신경 써 준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숙을 한 곳은 학교앞의 마을이라 편하게 등하교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숙방에 도둑이 들어서 즐겨듣던 라디오를 잃어버리고, 옷과 돈도 없어졌다. 기분이 나빴다.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생활하는 곳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고, 속상해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생각하면 무엇하랴.
고高 3 때였던가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나 감명을 받았다.
사춘기때라서 주인공이 교복입고 학교 다니는 모습이 비춰지고, 내가 좋아하는 진유영이라는 배우가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도 선명하게 남는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은주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자기와 꼭 닮은 영란을 발견한다. 영란과 은주는 일란성쌍둥이였다. 은주는 가난한 집안 사정때문에 남의 집에 보내졌었다. 그러나 은주는 어려운 생활가운데에서도 엄마와 오빠의 극진한 사랑으로 구김살없이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은주의 친아버지의 가방을 찾아줌으로 해서 서로를 알게 된다. 한편 영란은 자기와 닮은 은주의 얘기를 부모에게 한다. 은주의 친부모는 그동안 버렸던 자식을 끈질기게 찾으려하고 또한 은주의 양모도 행복과 장래를 위해 보내려하나 은주는 가난하지만 길러준 엄마의 고마움과 따뜻한 정을 찾아간다. 하나 은주를 반기는 양모는 계단에서 굴러 끝내는 죽고 만다. 공원 묘지에 모인 영란, 은철과 은주 가족의 머리위에 쌍무지개가 뜬다.
영화를 보고 하숙집에 늦게 들어올때면 저녁을 못 먹었을 때가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저녁 먹었느냐고 물으면, 먹었다고 대답했다. 활달했더라면, 저녁을 안 먹었으니 밥좀 주세요 하면서 말했을텐데, 새색시같이 얌전한 채 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1, 2학년 후배들은 전국체전이 대전에서 열리는 관계로 공설운동장으로 가서 마스게임 연습을 하곤했다. 마치 군인들이 국군의 날에 시가행진을 멋지게 하기위한 준비로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안쓰럽다. 지금은 고 3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위해 쉬는 휴일에도 나와서 스스로 공부하곤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학을 향한 길은 같은데, 왜 유독 요즘 학생들이 공부에 지치도록 시달릴까. 참 안쓰럽다.
하숙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올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인삼을 꿀에 재워서 가져왔다. 그 정성이 대단하시다. 늘 자상하게 대해 주신 것 같아 천사같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어머니가 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참 좋았다. 그러나 그 사진은 주인을 찾지 못했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섭섭하다. 기념이 될 보물같은 값진 것을 얻지 못했으니 어떻하나.
어머니는 내 기억으로 졸업식 날 우셨던 것 같다. 아마 3년동안 뒷바라지하느라고 힘에 겨우셨던건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은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정말 어머니는 내게 잘 대해 주셨다. 화 한번 안내시고 싫은 소리도 안하신 것 같다. 인품 있으시고, 해맑은 모습을 지니신 성모님 같은 분이 아닐는지.
우리집은 음식점을 하고, 식품점도 해서 그런대로 넉넉하게 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은 그것이 다 남의 집 세 들어사는 것이라 가난한 살림살이를 산 거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나는 자세히 몰랐지만, 세월이 흘러 자연적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어린 청소년 시절에 대전에서 생활한 것을 내 어찌 잊으랴. 낯선 곳에서 일탈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었음에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에 맞는 공부를 했으면, 또 미래 10년을 내다 보며 인기있고 전망있는 학과를 택하여 공부하면 좋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수학을 못했던 나는 이과를 택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나 향후 미래에는 이과를 공부한 사람과 문과를 공부한 사람의 취업률은 8:2로 이과중심일거란다. 내가 고등학교 다녔을 때는 대기업에서 문과출신이 높아서 7:3의 비율이었다. 수학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외국 사람들도 싫어하는 공부이기는 하다. 아무튼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해야 뿌듯하리라 본다.
대전은 한창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있을 때 있었던 곳이라 너무 좋다. 내가 고등학교 다녔던 대전은 살만한 아름다운 도시이리라.
언제 어느 때라도 가까운 이웃 동네처럼 생각하여 왕래하기 편안한 곳이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2013. 6. 22)
첫댓글
[평온님 방]을 지었습니다.
주옥같은 글을 탑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온님 방에 좋은 글 많이 탑재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평온님이 누구실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ㅎ ㅎ)
저는 청주에 살고 만62세입니다. 수필등단했고요
저번에 한국가톨릭문인협회에서 어느 시인이 한반도문학에 카톡에 무슨상을 타서 한반도문학카페를 조회해서 몇 글을 올렸습니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선생님, 부족한 제게 글방을 마련해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수필을 잘 쓰는 편이 아니지만 청주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 받아 적지 않은 독서를 해서 그 힘으로 수필을 쓸때가 있으니 양해 해주시고 배우는 마음으로 임하겠습니다.
2014년 한국문학세상 수필 신인상 등단했습니다.
평온 님!
장담컨대 독서의 힘이 위대합니다.
감히 기교로 따라잡을 수 없는 깊이가 있지요.
님의 방에 글로 가득 채우소서.
늘 응원하겠습니다.
보석을 발견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영원 김인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