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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와 익살과 풍자로 수필의 멋을 풍미하는 수필가 원종린 교수
2000. 9. 5. 최원현
디지털 시대라고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사회 체제와 의식에까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아날로그시대의 수직적 명령과 복종의 조직 관계에서 수평적 토론과 합의의 인간관계와 문화로 전환되고 있다. 따라서 문학도 화해의 신 장르를 개척해야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문학의 퓨전(Fusion)시대도 가능할까? 여하튼 우리 수필에도 참으로 많은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40대 이후의 문학으로 갈라놓고 작가층과 독자층까지 한정지어버리는 것은 수필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싶다. 아이들을 위하여 동화, 동시, 동요가 있듯이 우리 수필에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아동수필이 필요하고, 우리와 다른 먹을거리로 자라온 요즘 젊은 층들의 입맛에도 맞아 그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수필도 필요하다고 본다.
수필이 문학의 대중적 총아로서 보다 넓은 독자 및 작가층을 확보하는 것은 수필인이 감당해야 할 막중한 사명이기도 할 것이다. 수필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제는 더 그럴 수 있다. 자기 체험이라는 한정된 소재와 정감이 우선되던 수필에서 지식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작품도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할 만큼 인터넷 통신과 각종 동영상을 즐기고 있다. 그들에게 수필을 통하여 현실감 넘치는 인생의 이야기, 저들이 겪지 못한 시대와 삶의 진솔한 체험이 살아있는 글로써 전통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조화롭게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수필은 독자들이 가장 부담 없이 접근하는 문학 장르이다.
그러나 '아 그렇겠구나!' 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읽는 이와 하나가 되게 해 주어야 하는 문학이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문학 시대에서의 수필문학의 진로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독자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되 이젠 읽는 문학에서 보는 문학으로의 변화만큼 독자가 사는 시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수필을 써야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 <수필과 비평>은 아주 조용히 수필을 쓰시는 한 분을 찾았다. 평생을 교육자의 외길을 걸어오시며 수필만을 써오신 원종린 교수이시다. 수필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큼 삶이 곧 수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필가이다. 특히 교육자를 길러내는 교육자의 교육자로써 살아온 원종린 교수의 삶은 참으로 올곧은 선비요 시대의 스승으로 우리의 마음까지 경건케 하고 있다.
"나는 1923년 충남 공주 정안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현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휘문고보에 진학을 했는데 학제가 '중학'으로 바뀌어 1942년 휘문중학교(5년제)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도쿄의 쥬오(中央)대학 예과에 입학을 했지만 3년중 2년을 마치고 학도병으로 강제 징발되었는데 다음해에 3년 졸업증서는 보내왔더군요.
그 후 중경임시정부 망명을 모의하다 탄로되어 이태원의 육군구금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서 서울법대에 편입학을 했는데 학원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서울을 떠나 대전의 신설중학인 보문중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이것이 42년 교직생활의 첫 출발이 되어 공주농고, 공주사범을 거쳐 1989년 2월 공주교육대학에서 정년을 맞게 되었지요. 공주사범 재직중이던 59년 9월에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도미하여 테네시주 피바디 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 공주교대 재직중엔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어교육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만학으로 겸연쩍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원종린교수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 현장, 그 역사의 중심에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에 학교를 다녔고, 일제하에서 강제 징집되어 군대생활을 했고, 같은 동포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 등 곤욕을 치르는 파란만장한 시련기를 겪은 우리 민족의 서사시 같은 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문학이 그런 특별한 체험으로 인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원교수는 스물 세살 때인 1946년 12월 31일 장기순님과 결혼하여 54년을 해로하면서 슬하에 삼남매(맏딸, 두 아들)를 두셨는데, 이젠 손녀 둘에 손자를 여섯이나 둔 팔순 노인이시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 못지 않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것 같다. 원교수의 수필문학엔 긍지와 자부심이 넘친다. 아마 그것은 문학과 만나게 된 동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휘문중학을 다녔는데 당시로는 드물게 버젓한 도서관이 있었어요. 그곳엔 많은 장서가 있었는데 특히 김유정, 이태준, 박종화, 이무영, 홍사용, 김영랑 등은 휘문이 배출한 문인들로 은연중에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것 같고, 특히 이태준의 <제2의 운명>은 지금까지도 감명 깊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또 동기생인 정기섭(丁驥燮)은 나와 같은 일본 유학생이었는데 상민(常民)이란 호로 일찍부터 시단에 올라있던 자로 내게 문학적 영향을 가장 크게 주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6.25동란 전에 그는 월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든다면 공주농고 재직시 피난교사로 부임해온 김상억(金尙億) 선생인데 나와 책상을 나란히 한 사이로 문학에 대한 정열이 유별나서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같은 해에 청주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는데 주옥같은 시를 썼습니다."
원교수의 수필은 '한마디로 생기가 있고 한편에는 눈물과 인정과 가슴 설레임이 있다.'(이성교 시인) 그래서 '어떤 작품에서는 봄비 내리는 진달래 산천을 바라보는 느낌도 들고, 어떤 작품에선 여름 날 깊은 호수 속에서 바람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가을 날 가을걷이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겨울밤 묵을 썰어놓고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것 같기도 하다."(이성교)
원교수는 1977년 7인 수필집 <한 잔 차에 잠긴 세월>을 낸 이후 네 권의 수필집을 내었다. <하늘높이 차올리는 구두>('83), <사랑과 미움>('89), <녹음일기>('93)와 선집 <태양의 계절>('99)이다. 그리고 금년에 한 권을 더 낼 예정이시란다. 그는 1965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광복 후 교직의 길에 들어서서 맡은 과목은 영어였지만 늘 문학도서를 탐독했고, 정기 간행물 문예지는 빠짐없이 구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껏 4-5종류였고, 수필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50년대 중반부터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현대문학>에 단편소설을 투고했더니 어느 날 김동리 선생이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초대면을 했는데 내 작품 수준이 추천수준이라며 한 편만 더 보내주면 추천을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미유학 관계로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후에도 읽는 쪽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마침 <현대문학> 10년 독자난에 원고청탁을 받게 되어 '연공상을 받으며'란 글을 쓰게 되었고, 그 글 속에서 내가 <文藝> 때부터의 독자임을 밝혔더니 폐간된 문예의 편집인이었으며, 당시 <현대문학>의 주간인 조연현 선생이 이 글을 보고는 격려하는 서장과 함께 '老文學靑年'이란 제목으로 원고청탁서를 보내 왔어요. 그 때 내 나이 43세였기애 그런 제목을 붙인 듯 합니다. 하여튼 그때는 현대문학에 수필부문의 추천제는 없었지만 특별히 '연공상을 받으며'와 '노문학청년' 두 편의 글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조주간님을 뵈었는데 '선경린(국악인), 서임수(정치인)에 이어 원교수를 세 번째로 수필가로 발굴했으니 기대가 자못 크다고 하셨고, 당시 현대문학 김수명 편집장도 나의 글에 관심과 과분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원종린 교수의 삶은 교육자의 일생이다. 그래서 지난 시절을 회고해도 역시 교육자로서의 기억이 가장 깊이 남아있는 것 같다.
"내가 1946년 처음 교직에 들어섰을 때는 미군정시대였지요. 그때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적자원이 부족한 때라 마음먹기에 따라서 활동분야가 넓었는데 나의 학창시절 특히 중학교 때 훌륭한 선생님이 여러분 계셔서 스승님들을 동경했던 것이 교직을 지망케 된 동기가 된 것 같아요. 당시는 대부분 건국의 역군을 양성한다는 순수한 뜻이었으며, 가르치는 마음과 배우는 마음이 의기투합했던 때였어요.
특히 공주농고 재직중인 50년대 중반에 내가 주창해서 탁구부를 창설하여 직접 지도한 학생들이 전국대회에서 서울과 지방의 명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했을 때 그들과 나눈 기쁨은 잊을 수가 없는데 그때의 선수들이 뒷날 우리 나라의 탁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요. 공주농고시절의 기억 속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문학에 영향을 준 김상억 선생도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공주사범학교에 재직중인 59년 9월에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유학길에 오른 일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그때만 해도 도미 유학은 신기루처럼 느껴지던 때였지요."
원교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모두 수필의 글감들이 되어 아름다운 수필문학 작품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수필론에서 "역사를 말하지 않고 역사가 표현되고, 철학을 말하지 않고 철학이 우러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수필작법의 요체가 아닌가 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곧 그의 수필은 그러한 사실과 진실이 수필 속에서 녹아 흐르게 한다는 말로써 체험이 문학이 되는 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 교수는 수필을 말로 짜는 옷감이라고 했다.
"나 역시 수필을 쓸 때 소재와 문장에 치중합니다. 소재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내용보다는 개성적이고 체험적인 면에 관심을 더 기울입니다. 그리고 문장은 표현력이라는 말로 바꿔도 되겠지요. 나는 수필을 말로 짜는 옷감에 비유합니다. 말에 따라서 무명 수필도 되고, 비단 수필도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비단수필'이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미문(美文)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절제된 표현, 세련되고 구수한 표현, 기지와 해학이 돋보이는 표현 등이 매력 있는 명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곧 글쓰는 이는 사전(辭典)의 애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원교수의 수필을 읽으면 우리 역사를 눈에 보듯 알게 된다. 두 번째 수필집 <사랑과 미움>에는 8.15해방기의 아픔과 안타까움들이 실려있다. 특히 '조선 제22부대 학병사건수기'를 읽으면서는 묻혀있던 우리 역사의 순간들을 다시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온다. 하물며 당사자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들이 글이 되어 활자가 될 때마다 느껴지는 감회는 어떠실까. 원교수는 과작을 않는 분이시다. 35년 동안 네 권의 수필집은 많은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나 대표작을 고르라면 쉽지가 않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대표작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작품에는 하나 하나 다 애정이 가기 때문이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님과 가족들을 소재로 한 글에 애착이 갑니다. <歸路에서> <초여름 밤> <回想曲> <殘雪> 등인데 이 외에 재생의 기쁨을 적은 <解冬무렵>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다 지금까지 나온 수필집 가운데서 고른 것들입니다."
원종린 교수의 수필에는 삶의 여과와 침잠이 고르게 나타난다. 대표작으로 고른 다섯 편도 마찬가지지만 삶의 순간 순간들에서 삶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좋은 수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를 받침 한다.
"수필에는 개성적인 산문 양식인 소설의 개념과 비평적 산문 양식인 평론의 개념이 교차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수필, 중수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나는 개인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경수필을 선호하는데 이는 독자에게 더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이거나 감상에 치우치는 글보다는 사상(事象)이나 사건을 다룬 수필이 독자들에게 더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난삽은 금물이며, 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문학성이 높은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은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문학이니까요."
문학 속에서의 수필문학의 비중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으신다.
"일반 대중의 기호에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는 수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이 짧고, 내용이 알차며, 해학과 재치까지 가미되면 읽는 재미도 배가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문학 수필보단 인기 연예인이나 저명인사의 신변 잡기류가 베스트셀러에 끼는 것을 봅니다. 독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수필가들이 질적으로 탁월한 작품을 쓰는 데 힘을 기울여야 독자의 관심도 기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운동경기에도 인기종목에서 부진한 선수보다 비 인기 종목이라도 뛰어난 선수가 대중의 박수를 많이 받는 것처럼 수필가들의 자세 여하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의 장래성을 기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모든 문학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수필은 자기 체험이 작품이 되기 때문에 작품이 될 때는 잘 익은 술처럼 충분히 익고, 여과가 되고, 용해되고, 때로는 농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인데 구태의 해묵은 체험만을 문자화 한다 해서 이 바쁘고 빠른 시대에 누가 눈여겨봐 줄 수 있겠는가. 어쩌면 독자가 다가오던 시대는 가고, 독자에게 작가가 다가가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문인이면 누구나 문학성 높은 글을 남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튼튼한 기초 위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하고, 계속해서 정진한다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학창시절에 읽은 책에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간 세월이 흘렀을 때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을 때 한 은장(銀匠)은 오로지 은세공에만 몰입을 하더랍니다. 뒷날 신학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은 논전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던 은장이었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답니다. 나도 그 은장같은 수필가이고 싶습니다. 우리 수필 문단에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입니다."
작품의 질로써가 아니라 문명이나 경력이 작품보다 우선되는 것 같은 인상이 짙은 오늘의 문학계에 참으로 필요한 말씀인 것 같다. 1989년 2월 국민훈장 모란장, 1991년 제1회 월간수필문학상을 수상하셨으며, 문학분야는 아니지만 지금도 테니스는 고희부 현역 선수로 각종 전국대회를 석권하는 노익장, 원종린 교수의 이러한 삶의 태도, 삶의 정신이야말로 그의 수필이 독자에게 늘 건강한 모습으로 힘과 용기와 재미를 주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태양이 작열하는 7.8월의 성하(盛夏)의 두 달을 우리는 유독 태양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어찌 7.8월뿐이랴. 밝고 바르고 굳세며 끊임없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면 1년 4계절 모두가 다 태양의 계절일는지도 모른다'(태양의 계절 중) 그렇게 태양의 계절을 사시는 수필가 원종린 교수에게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새로운 화두(話頭) 하나를 가슴에 받아 안는다. 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출처 : 수필과 비평. 2000. 9. 원로 수필가 초대석)
첫댓글 이득주 선생님!
애 많이 쓰셨습니다.
아님니다. 우연히 발견해서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