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은 어부가서(漁父歌序)에서 “(아이가) 노래를 얻어 보이기에 내가 살펴보니 그 가사가 한적하며 의미가 깊고 멀어,
읊고 노래함을 여유롭게 할수록 세상 공명(功名)에서 벗어나고 다스리며, 표표하게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하는
드러나지 않는 뜻이 이었다.
이를 얻은 후에는 전에 즐겨 노래하던 가사(歌詞)는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에 뜻을 두었다” 라고
적고 있다.
농암은 향년 83세에 어부가를 지어 불렀다. 당시의 평균연령을 계산할 때 그가 매우 장수하 였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세월을 격하여서 어부가만을 애창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 무엇이 농암에게 그 전에 전해오던 어부가를 접하고는 한시나 가사 등을 즐기 던 것은 잊고 어부가 심취하게 하였을까. 당대의 많은 명현거유들은 모두가 한시에 주력하 였던 점에 비추어 이러한 농암의 자족어린 문구는 청량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문이다.
농암은 전해오던 어부가 중 단가 10장은 5장으로 장가 12장은 9장으로 개작한다.
단가 5장의 첫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자연은 시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마음의 파도와 물결이 일어 늘 걱정의 배를 띄워두고 이리저리 고민 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어부의 생애는 그렇지 않다. 파도와 물결은 늘 일지만 그것이 시름으 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물결로 인하여 더욱 어부를 어부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둘째수에는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언매나 가렸는가/ 강호에 달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하였다.
먼지에 가려진 세상, 티끌과 같은 세상이 나를 얼마나 가렸던가? 세상의 모든 풍진 은 사실 그 자체로 떠 다니는 먼지와 같다. 털면 다른 곳에 떨어지고 때로 합쳐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털어낼 때 세상을 밝아오고 그것에 무심함이 오히려 깨끗하다. 농암은 단가 5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두어라 내 시름 아니며 세상을 구제한 현인이 없 으랴/ 어쩌면 세상은 개인의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주장에 의하여 더욱 혼탁하여 질 수
있다. 농암은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부가를 노래로 불렀다는 것은 또하나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농암은 어부가를 지 을 때 한시로만 지을 경우 노래로 부를 수 없어 한자와 국어를 함께 사용하여 사람들이 노 래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실 어부가는 노래로 전해왔으나 농암에게 전해 질 때는 가사만 전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농암은 노래로 이를 복원하고자 하였을 지 모른다. 그러나 농암이 노래로 불렀다는 중요성은 단순히 노래방식이 끊어진 것을 이었다는 의미보 다는 당시로서는 천시받던 국어를 함께 사용하여 의미론적 전달과 노래의 흥취를 동시에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농암의 풍류와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농암은 어부가를 주로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면서 불렀는데 이는 농암이 흥취와 멋을 한 껏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농암은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낙동 강, 분강에 대한 수려한 경치를 만끽한 뒤 바위에 배를 대고 동승한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어부가를 부르고 인생의 여유로움을 향유한 것이었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조선시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산 이한진(京山 李漢鎭)의 속어부사(續漁父詞)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의 창보사( 父詞)등으로 이어졌고, 고산 윤선 도(孤山 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탄생하게 만든다.
소위 4대 사회를 경험한 그는 돌아와 그의 삶의 마지막을 어부가와 함께 보낸다. 수많은 삶 의 궤적에서 자신의 삶과 마음을 담아줄 것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닌 어부가 였던 것이다. 그 의 삶에서 어부가가 던지는 화두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인간은 늘 자연에 있다. 언제나 자연에서 삶의 영위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자연인지 모른다.
필자 역시 자연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농암은 어부가에서 그 자연성을 발견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마지막을 정리한 것이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조선시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권두현 민예총 안동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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