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이야기
김상영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수필심사를 맡아 줄 수 있느냐고요. 도서관 수필강좌 귀동냥이나 하는 처지인데 자격이 되겠나 싶었습니다. 신문사 주관 전국수필 대전의 위상을 실추시키지나 않을지 염려되었습니다. 대구를 들락거려보니 글 잘 쓰고 이론에 정통한 분 많았습니다. 심사란 그런 분들이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싶어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경험이 없긴 해도 ‘가오’가 있지, 맡겨진 몫을 잘 감당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370여 편 투고 작품의 분량이 두툼하였습니다. 열정과 정성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네 분 심사위원이 나눴으니 내가 봐야 할 몫이 90여 편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어 집중해야 합니다. 입선을 목표로 공들여 다듬고 매만진 작품들 아닙니까. 좋은 작품을 놓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진력하였습니다.
마음은 바쁘나 진도가 더딥니다. 한꺼번에 서너 줄씩 훑거나 듬성듬성 널뛰기하듯 봅니다. 때론 사선으로 내리긋듯 합니다. 다독하는 ‘대강 철저히’ 독서법이 나도 모르게 재현되었습니다. 심사 마감 시간은 확정하지 않았으나 하염없이 붙들고 앉아 다른 분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지요. 신문사 직원이나 다른 심사위원님들의 여담餘談이 집중을 흩트릴 때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 했습니다. 숫자를 헤아리는데 말을 걸어와 헷갈릴 적처럼 말입니다. 문법은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해지고 느낌만이 일렁였습니다. 안간힘을 다하여 A++~C까지 분류함으로써 임무를 마쳤습니다.
잊고지낸 어느 날 대봉도서관에서 함께 수강한 문우님으로부터 카톡이 떴습니다. 2022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된 분이기도 합니다.
“샘, 혹시 전국문화 체험 예심 맡았더랬어요? 샘 이름이 떠서요.”
“살다 보니 팔자에 없는 심사도 맡아 봤네요.”
“넵, 샘이라면 좋은 글 뽑았지 싶어요.”
퍼뜩 인터넷으로 대구일보를 살폈습니다. 대상 수필 제목이 친근합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봤던 작품입니다.
“‘강아지 똥 마을에서’를 제가 A++로 분류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
수필 대전 관계자를 위무하는 팸 투어 마지막 일정 시상식 관중석에 앉았습니다. 심사위원장 여세주 작가님이 통로 건너 옆자리에 좌정하십니다. 범어도서관 수강 시에 교재 삼은 ‘수필 창작론’을 집필하신 쟁쟁한 분입니다.
심사평 요지가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신문에 실린 교과서적인 표현보다 생생합니다. 요즘 많이 생산되는 게 문화 체험 수필이라고 운을 뗍니다. 수필의 하위 장르로 정착될 정도랍니다.
“오늘 눈이 왔으니까 안동 뭐 어디에 갔다, 이런 말 필요 없지요.”
“감실 부처 가려고 아침에 도시락 싸서 준비해달라니 마누라가 기분 나빠 하더라.”
요렇게 문화 현장까지 가는 노정路程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상을 바로 표현하면 되지요. 현장감과 생동감 넘치도록 쓰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매만지다 보면 생동감을 잃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감성을 지배해 버리니까요.
속이 뜨끔합니다. 심사평이 온통 내 정곡을 찔러서지요. 감실 부처를 주제로 한 작품도 내가 선별한 기억이 납니다. 처가 동네의 석탑을 지칭하는 듯해서 무의식중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거지요. 내가 썼더라도 연애 시절 석탑 골짜기를 몰래 거닐던 추억을 동원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없을 나만의 사연이니까요. ‘강아지 똥 마을에서’의 무대 조탑동 권정생 생가는 더합니다.
어느 봄날 처삼촌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이튿날 발인을 앞둔 밤을 다섯 동서 부부가 함께 지새운 적이 있습니다. 조탑리 일직교회 옆, 바로 권정생 생가 이웃 마당이었습니다. 이후에 ‘권정생 동화 나라’에 게시된 연보年譜를 보고서야 아하! 싶었습니다. 인연의 씨줄 날줄이 있다더니, 스쳐 지나고 만 것입니다.
종탑은 우리 집 뒤 광암교회 마당에도 있었습니다. 종지기였던 김 집사님은 가난하였으며 착하고 순하셨습니다. 종지기만큼 사명감이 요구되고 고단한 직무도 없을 겁니다. 매일 새벽과 수요일은 물론 일요일 아침과 저녁마다 시간 맞춰 쳐야 하고 재再종까지 울려야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이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 사둔 부산 허드레 늪지가 개발되는 통에 집사님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종지기로 작고 후에 인세 부자가 된 권정생 선생과 닮은 결말입니다.
삶이 버겁던 그때야 늘그막 문학도가 될 줄 어찌 예측이나 하였겠습니까. 흔전만전 제사 음식이라도 차려 들고 찾아뵐 걸 후회한 건 훗날의 마음일 뿐입니다. ‘몽실언니’를 책과 영화로 접하고, ‘빌뱅이 언덕’을 읽을 땐 가슴이 아르르 저몄습니다. 어쩌면 수상자보다 더 교감한 강아지 똥 마을일지 모릅니다. 사연이 이리도 구구절절할진대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문화 체험수필 본래의 목적이고 뭣이고 간에 쏟아놓고 말았을 테지요. 은상 작품 ‘월월이청청’도 눈에 익습니다. 객주 문학관 상주 작가 박월수 님의 수필 ‘달’과 닮은 느낌에 끌려 선정하게 되었지요.
사진 찍기를 즐겨하진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몇 사람과 추억을 남겼습니다. 희한한 일이지 글쎄, 처조카가 팸 투어 행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촌구석 농사꾼 고모부가 심사위원 표찰을 목에 걸고 등장하자 입을 딱 벌립니다. 놀란 입 다물라, 어깨동무한 손으로 툭툭 다독이며 매사에 성실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조명래 작가님과 동석한 건 의미 깊었습니다. 자작 수필을 통째 암송하던 기억력 하며, 수필집 일곱 권에 그림을 더하여 펴낸 실력가이십니다. 대상 수상한 분과 몇 컷을 남긴 건 PPT에 담고 싶어섭니다. 덕담으로 격려해 주신 강인순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장님과는 단체 사진으로 갈음하였습니다.
수필 강사님들은 대다수 겸손하십니다. 수강생과 더불어 배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들 합니다. 글쓰기엔 정답이 없긴 하지요. 응모자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나 또한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심사 공부를 참하게 했다고나 할까요. 심사에서 팸 투어까지 섭렵한 임인년 가을은 어느 해보다 멋집니다. (16.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