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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드코스트 - Love Again (Inst.) (응급남녀 OST)
김종인과 팀장님의 눈이 마주친 후에, 주차장은 조용해졌다. 조금 놀란 눈으로 팀장님을 보고있는 김종인과,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김종인을 보고있는 팀장님. 두 사람의 표정이 상반되어보였다. 둘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데, 김종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경수 팀장님이시네요. 여긴 어쩐 일로?”
“김종인씨야말로 여긴 어쩐 일인지 모르겠네요.”
“저야 뭐 볼 일, 아니. 볼 사람이 있어서.”
“.....”
“마침 같이 내려왔네요. 김여주.”
“네?”
“도경수 팀장님도 뭐, 너를 데리러 왔다거나. 그런 상황이야 지금?”
“아뇨. 그..”
“여기에 사는데요. 같이.”
팀장님의 말에 화들짝 놀라 한 뼘은 커진 눈으로 팀장님을 쳐다봤다. 아니. 같이 사는 거야 맞겠죠. 이 오피스텔에 같이.. 중요한 단어를 빼먹으셨어요. 팀장님. 김종인씨 오해하실라... 아니나 다를까 김종인이 인상을 살짝 구기고 ‘같이 산다고요?’하고 되묻는다.
“아아. 그러니까.. 그... 팀장님이랑 저랑 이웃이에요! 옆집..ㅎㅎ”
“아아. 이웃. 한 건물에 같이 산다고 말씀하셔야죠, 도경수 팀장님. 말 잘 못하시네.”
“...아~ 이거 아는 사람 얼마 안 되는데! 김종인씨. 비밀로 해주세요.”
“너 하는 거 봐서.”
씨벌. 분위기 바꾸려고 그냥 한 소리인데 저렇게 고까운 대답을 하면 내가 씅이 나, 안나? 김종인을 몰래 노려보고 입을 삐쭉였다. 옆에 서계시던 팀장님이 손목시계를 확인하시고는 날 돌아보신다.
“조금 더 있다가 지각하겠네. 빨리 타요.”
“네? 아..”
“아뇨. 도경수 팀장님. 오늘 김여주는 제가 회사까지 데려다줄게요.”
“뭐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세요. 어차피 김여주씨랑 저는 같이 출근해야하는데.”
“뭐하러는요. 같이 있으려고 그러는 거지.”
...지금 이 상황 뭐지? 존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 같은데.. 여자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두 남자...는 무슨. 저번부터 둘 사이에 갑을을 정하기 위해 서열싸움 비슷한 걸 하고 있는 모양인데, 왜 날 두고 지랄이야. 갑자기. 서로를 향해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별안간 김종인이 내 손을 덥석 잡아챘다. 놀라서 김종인을 쳐다봤고, 김종인의 시선은 여전히 팀장님을 향해있었다.
“갑니다.”
“예? 아.. 아니, 그.. 김종인씨.”
“회사에서 뵙자고 빨리 인사해. 지각하겠네, 김여주.”
김종인에게 잡힌 손에 당황스러워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졌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움직임이 차츰 느려졌다. 이거 존나... 데자뷰? 오세훈이 날 데리러 왔을 때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지금. 그날 팀장님은 오세훈에게 날 데려가라고 망설임 없이 말씀하셨고, 나는 그때 말로는 표현 못할 상심과 상처를 떠안고 울 뻔했었지. 그 날의 잔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져있는 틈에, 갑자기 김종인이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은 채로. 나는 김종인의 손에 이끌려 그의 차 쪽으로 끌려갔고, 입으로 ‘아.. 아니.. 저기..’ 하고 바보같은 말만 하며 자꾸만 고갤 돌려 팀장님을 쳐다봤다. 나는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저 정말 김종인씨 차타고 가요?’하고. 이것마저도 그때와 비슷했다. 완벽한 데자뷰였다.
“.......”
팀장님은 날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가라는 뜻이구나. 역시 나는 팀장님한테 아무것도 아니구나.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조금이나마 김종인의 손에 덜 끌려가려던 몸짓이 힘이 풀리는 바람에 서두르듯 그의 뒤를 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아까방금 출근을 같이하자던 팀장님의 말에 심장이 이만큼이나 요동쳤던 내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팀장님께 몇 번이나 같은 경험을 하고도, 어떻게 나는 학습이란 걸 요만큼도 못하고 맨날 설레여하냐. 맨날 나 자신더러 바보같다고 수천번은 말하지만, 그걸로도 모자랄 만큼 바보ㄱ,
“...헐..?”
초점없는 눈으로 김종인에게 질질 끌려가던 내 두 발이 멈췄다. 내 자의가 아닌, 타의의 손에 의해. 그러니까, 김종인이 붙잡지 않은 내 맞은편 팔을 붙잡은 팀장님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다. 갑자기 내가 멈춰 서자 고갤 돌린 김종인이 팀장님을 보곤 인상을 찌푸린다.
“뭐하세요?”
“이리와. 김여주.”
“사람을 개새끼 부르듯 하네.”
“에...네?”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 같았다. 그래서 바보같이 되묻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김종인을 보던 그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올곧은 그의 시선이 내게 닫자 내려앉았던 심장이 다시금 쿵쾅대는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팔을 잡은 팀장님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내 차 타. 상사로써 명령이야.”
“명령을 이런 하찮은 일에 쓰다니, 전혀 권위 없어 보이는데.”
비아냥대는 김종인의 말투에 팀장님의 눈이 다시 김종인에게로 돌아갔다.
“저는 원래 누구든 제 일상 깨는 거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
“김여주랑 함께 출근하던 게 내 일상이었고, 김종인씨가 깨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앞으로 김여주는 제가 계속 데려다줄 거니까, 김여주가 없는 출근길을 일상으로 만들면 되겠네요.”
팀장님의 말에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는 김종인. 두 사람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 싸움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러다가 지각하는 거 아니야? 초조함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김종인이 손을 놓는다.
“나 원, 치사해서.”
“......”
“출근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 적대적으로 굴어요? 어차피 지금 말고도 내가 김여주를 만날 방법은 수만가지나 되는데.”
“가요. 지각할 것 같으니까.”
“네? 아..”
김종인이 뭐라고 하든, 팀장님은 들리지 않는 척 했다. 내 팔을 붙잡고 있던 팀장님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내 손목을 잡는다. 그의 단단한 손에 얽혀진 내 손목이 뜨거웠다. 팀장님의 손에 이끌려 팀장님의 차로 향하면서 고갤 돌려 김종인을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쳐 고개를 까딱여 미안함을 표하자 김종인이 손을 한번 흔들고는 자신의 차에 올라탄다. 역시 존나 쿨해 시발.. 팀장님의 차에 올라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번에 오세훈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을 때와 같은 상황인데, 팀장님의 태도는 그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오세훈에게 날 그냥 보냈을 때 팀장님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얘기 할 시간이 필요해보여서 그랬다고 하셨었지. 지금은 김종인과 내가 어떠한 사이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시간 낭비 말고 내가 데리고 출근하겠다. 뭐 그런 의미였을까? 애써 이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자꾸 나 좋을 대로 해석하는 내 머리가 애석했다. 기대하고 설레고 실망하고. 지치지도 않니, 너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옆에서 말없이 운전 중인 팀장님을 흘낏댔다. 그때의 팀장님은 날 그냥 내버려뒀지만, 지금의 팀장님은 날 붙잡았다. 팀장님이 그때는, 또 지금은 무슨 생각인 건지 어떤 변화가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팀장님의 행동들을 오해해도 되는 건지도.
-
의외의 택배가 도착했다.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사무실에 들어온 택배기사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레 들린 내 이름에 열심히 타이핑을 하던 내 손은 멈췄고, 나는 택배기사를 향해 돌아봤다. 내 반응에 택배기사가 내 쪽으로 걸어왔고, 다른 사람들의 사무책상에 가려져 안보이던 택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내 눈은 조금 더 커졌다. 내 두 팔로 들기에 조금 벅찬 크기의 하얀 상자. 그리고 좌측 위에 비스듬하게 붙어있는 아이보리색 리본장식.
“김여주씨 맞으시죠?”
“네? 네.. 맞는...”
제가 김여주는 맞습니다만, 이 택배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안이 벙벙해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주변에 있던 사무실 직원들이 이게 뭐냐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도 모르겠... 나는 이런 걸 주문한 적이 없는데.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와중에 택배기사가 택배가 밀려있어 빨리 사인을 해달라고 재촉해서 얼떨결에 택배수령사인을 했다. 택배기사가 가고 내 주변에 몰려든 사원들로 정신이 없었다. 이게 대체 뭘까.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요?”
소란스러운 사무실 분위기에 팀장님이 나오셨다. 팀장님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기적대며 본인들의 자리로 다시 흩어진다. 그 와중에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내 두 팔에 들려있는 커다란 상자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팀장님이 내 쪽으로 걸어오신다.
“이게 뭐예요?”
“저도 모르겠어요.. 택배기사가 와서 주고 갔는데..”
“어떤 무식한 인간이 회사에 이런 걸 보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팀장님의 말에 조용히 수긍하는데, 팀장님이 ‘빨리 확인해보던가 해요. 그거 끌어안고 일할 수는 없잖아.’하고 말하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본 내 눈은 아까보다 더 커졌다.
“옷?”
“어머. 원피스 아니야?”
각자 자리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게 웬... 원피스야? 두 손으로 조심스레 원피스의 어깨부분을 잡고 들어올렸다. 제법 길이감이 짧은 하얀색 플레어 원피스였다.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와중에 들고 있는 원피스 아래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원피스를 팔에 걸쳐두고 떨어진 두껍고 작은 종이를 주워들었다. ‘예쁘게 입어라. 제이.’ 미친... 김종인? 이거 김종인이 보낸 거야? 그를 닮게 휘갈겨진 검은 글씨체의 제이라는 두 글자에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주변에서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뒤로하고 한 팔과 손에는 원피스를 결치고 종이를 쥐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까만또라이라고 저장되어있는 사람에게.
-“여보세요.”
“이거 김종인씨가 보낸 거예요?”
-“오. 생각보다 빨리 갔네?”
“맞아요? 김종인씨가 보낸 거?”
-“어. 왜?”
“왜애? 그런 말이 나와요? 아니 이걸 나한테 왜 보내요?”
-“거기에 써놨잖아. 예쁘게 입으라고. 문화인의 밤 때 예쁘게 입으라고 보낸 건데.”
“아니 무슨... 그걸 왜 김종인씨가 신경 써요?”
-“우리 소속사 여배우가 문화인의 밤 때 입을 드레스 컨택하고 그건 돌려보내려고 뒀길래,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내가 준 거 입은 거 보고 싶기도 하고.”
“저 이미 입을 옷 있어요. 그리고 이런 거 부담스럽고.”
-“부담 안 느껴도 돼. 비싼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보낸 성의는 있으니까 입어는 주지?”
당당한 김종인의 말투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한테 이걸 보낸 저의도 모르겠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그의 이런 행동들에 잡생각들이 밀려든다.
“그리고 이걸 왜 회사에..! 다른 사람들이 다 봤잖아요.”
-“아. 그래? 이왕 그렇게 된 거 김종인이 보내준 거라고도 말해. 너 예뻐서 준 거라고.”
“돌았어. 끊어요.”
-“네 생각해서 산 거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해봐.”
김종인이 말하는 좋은 쪽이 어떤 쪽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 내 상황은 그닥 좋은 쪽은 아니라는 거지. 김종인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실로 들어가자 다들 어디다녀 온 거냐며, 누가 보낸 건지 알아낸 거냐며 여기저기서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개중에는 애인이 생겼냐는 말도 있었다.
“아니요. 택배가 잘못 온 것 같아요.”
“아까 분명히 김여주씨 맞냐고 물어봤잖아?”
“동명이인인가보죠, 뭐. 방금 택배회사에 다시 연락한 거예요.”
내 거짓말에 사무실 사람들은 김빠진 듯 터덜터덜 자신들의 자리로 흩어졌다. 나도 주섬주섬 원피스를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상자를 사무책상 아래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물끄러미 날 보고 있는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무실에 안 들어가시고 뭐하시지? ‘왜요?’하고 입모양으로 묻자 팀장님은 말없이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셨다. 그나저나 이 원피스를 어떻게 돌려줘야할지 모르겠다. 대체 김종인은 내게 뭘 바래서 이러는 걸까. 문득, 수정선배에게 전해 들었던 김종인에 대한 소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생각들은 하지 말자. 문화인의 밤 행사에 너무 들떠서 일에 소홀해지면 안 된다. 나 자신을 그렇게 타일렀다.
-
그날 오랜만에 팀장님과 함께하는 퇴근길에 마음이 잔뜩 들떴다. 오랜만에 앉아보는 그의 옆자리.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다 잘생긴 팀장님이었지만, 주변 풍경이 요란하지 않고 어둠에 푹 잠긴 밤이 팀장님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기에는 더 좋았다. 그래서 난 팀장님과 함께하는 출근길보다는 퇴근길을 더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팀장님과 함께하다니 좋다.
“거기 가면 막 술도 마시고 그래요?”
“샴페인같은 거 마시죠.”
“와. 그럼 비싼 거 마시겠다. 그쵸?”
내 말에 팀장님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날 한번 보고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요.. 왜... 비싼 거 먹으면 좋잖아요. 팀장님과의 오랜만에 퇴근길이라서, 또 이틀 앞으로 다가온 문화인의 밤 행사 때문에 잔뜩 들뜬 나는 한시도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리고 팀장님의 반응도 나를 들뜨게 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미건조한 ‘네.’라는 대답들이 전부였을 그인데, 내 질문들에도 곧잘 대답해주고, 고개도 자주 끄덕여줬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다가 잠시 숨을 돌릴 틈이 생겨 정적이 생겼는데, 그 정적을 깨고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네.”
“네? 뭐가요?”
“김여주씨 시끄러운 거요.”
“...?”
“사실.”
“.....”
“내가 김여주씨가 옆에서 떠들어대는 게 익숙해졌나봐요.”
“......”
“혼자 출퇴근하는데 심심하고 조용하고 그렇더라고. 웃기지. 몇 년을 혼자 출퇴근했는데, 김여주씨랑 몇 개월 좀 같이 있었다고 거기에 익숙해진 게.”
“...아..”
“그래서 혼자 출퇴근할 때 조용한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라디오라도 틀어놓고 그랬었는데, 어쨌든 시끄러우니까 익숙하네요.”
덤덤한 그의 말투와 덤덤한 그의 표정. 그리고 마음부터 머릿속, 표정까지 전부 어느 것 하나 전혀 덤덤하지 못한 나. 그의 말이 꼭 내가 옆에 있는 게 익숙해서 좋다는 말처럼 들렸다. 계속 이렇게 옆에 있어라. 그게 익숙하고 좋다. 그렇게 해석됐다, 나는. 내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팀장님이 날 보며 ‘왜 말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떠들어야하는 의무감이 들어 부담스럽나.’하고 물으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아. 그리고.”
“네?”
“아까 그 원피스 그거.”
“.....”
“김종인이 보낸 거죠?”
그걸 팀장님이 어떻게...? 예상치 못한 팀장님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버버댔다. 눈치 하나는 진짜 빠르시네.. 아니라고 말을 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말하자니 뭔가 부끄럽고. 한참을 대답을 찾아내느라 머리를 굴려대다가 결국 김종인이 보낸 게 맞다고 실토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보기엔 택배가 잘못 왔다는 게 거짓말 같았거든요. 그리고 요즘 정황상 김여주씨한테 그런 거 보낼 사람이 김종인밖에 없고. 김여주씨가 허둥대면서 나가던 것도 그런 것 같았고.”
“아...”
“무슨 쪽지같은 거 보고 나가던데, 뭐라고 적혀있었길래 그래요?”
“그냥.. 뭐... 예쁘게 입으래요, 저보고. 문화인의 밤 때 입고 오라고..”
“입지 마.”
“네?”
“..정수정씨한테 이미 옷 빌렸다면서요. 근데 그걸 왜 입어.”
“아.. 어차피 입을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하얀 게 예쁘긴 하더라고요.”
“정수정씨가 준 건 무슨 색 옷인데요.”
“...? 검은색이요.”
갑자기 이건 왜 물으시는 거지? 표정에 의아함을 가득 담고 팀장님을 보는데 팀장님은 말이 없으셨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내가 먼저 ‘왜요?’하고 물었고,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타이밍이 좀 그렇네요.”
“네..? 무슨...”
“정말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
“나는 하얀색보다는 검은색을 좋아해요.”
“......”
“그냥 그렇다고.”
“.....”
“.....”
“..풉...”
“왜 웃어요?”
“ㅋㅋㅋ아니요...ㅋㅋ”
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자 팀장님이 웃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신다. 팀장님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셨을까~? 하얀 옷 입지 말고 검은 옷 입으라는 그런 말 아니에요 지금? 설마 팀장님이 질투 같은 걸 하시는 건가 싶어 설레다가도 이내 생각을 고쳐 잡았다. 자꾸 설레어하지 말자. 하고. 그래도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팀장님을 쳐다봤다.
“네. 저도 하얀색보다 검은색을 더 좋아해요.”
“그럼 됐고.”
“뭐가 됐는데요~? 하얀 거 입으면 안됐고?”
“내가 언제.”
“에에. 지금 말하는 게 그런데?”
“시끄럽게 하면 도로에 버리고 갈 거예요.”
평소 같았으면 팀장님의 저 협박 아닌 협박에 죄송하다며 입을 닫았겠지만, 오늘은 뭐 때문인지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오히려 귀여워 보일 정도. 내가 기분이 좋아서 미친 건가? 뭐에 씌었나? 그치만 오늘 팀장님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 건 사실이었다. 팀장님과 함께 있는 지금이 좋았다. 그와 달리고 있는 어두운 도로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마치 별빛 위를 달리는 것처럼.
-
문화인의 밤 행사가 열리는 당일. 조금 더 이른 퇴근을 했다. 행사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을 지우고 새로 화장을 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음영과 펄 섀도우가 들어간 화장이었다. 그렇다고 과하지는 않았고. 그냥 딱 하나의 생각이었다. 팀장님에게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내가 팀장님의 앞에서 이렇게 꾸민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으이씨!”
원피스 지퍼를 올리기가 너무 힘들어 화가 난다. 시발... 나는 왜 이렇게 팔다리가 짧게 태어나서 등 뒤에 달린 원피스 지퍼도 혼자 끝까지 못 올리는지. 항상 그랬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도움으로 옷을 입었었는데, 지금은 혼자니까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다. 팀장님이랑 같이 가기로 한 약속시간이 임박했는데, 옷을 채 다 입지도 못했다. 아아. 어떡하지. 팀장님 분명히 재촉하실 텐데. 아니나 다를까,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문 너머의 팀장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김여주씨. 멀었어요?”
으이씨... 어떡하지.. 혼자 지퍼를 올려보겠다고 몸을 이리저리 비트느라 난리가 난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현관으로 다가가 현관문을 열었다.
“......”
기다림에 지친 듯 약간 일그러진 표정이셨다가, 나를 보고 표정이 조금 펴지는 팀장님. 그래. 내가 생각했던 반응이 이런 거였다. 평소와는 다른 내 꾸민 모습에 팀장님이 놀라하시는 거. 그리고 나는 도도하게 예쁜 척을 하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얼른 가자고 말하며, 높은 구두소리를 내며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런 걸 생각했는데...
“저.. 팀장님..”
“왜요?”
“......”
“왜 불러요.”
그런 걸 생각했단 말입니다... 근데... 시바...ㅎ
“저 지퍼 좀 올려주세요...”
“..뭐라고요?”
도도는 시발... 팔다리가 짧아서 슬픈 김여주여...
“원피스 지퍼에.. 손이 끝까지 안 닿아서...”
“..하...”
아까 내 모습을 처음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팀장님은 온데간데없고, 또 다시 날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는 팀장님으로 돌아왔다. 좆같은 팔다리 오늘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 열 번 꿀 거야!! 존나 많이!! 고무고무 시발!!!
“뒤 돌아봐요.”
“네?”
내 되물음에 팀장님은 대답대신 친히 내 어깨를 잡고 날 돌리셨다. 눈 깜빡할 사이에 팀장님께 등을 보이고 선 나는, 내 긴 머리칼이 등 뒤를 다 덮고 있다는 걸 떠올리고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너머로 넘겼다. 휑하니 드러났을 내 어깨와 등이 조금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머리칼을 손을 로 잡은 채로 팀장님이 지퍼를 올려주길 기다리는데 팀장님이 가만히 계시기만 한다. ..뭐지?
“......”
“..팀장님?”
“..아. 네.”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팀장님이 내 원피스 끝을 잡고 지퍼를 올려주셨다. 깔끔하게 한 번에 올라간 지퍼. 그리고 그 끝에 잠깐 내 등에 닿았던 팀장님의 손끝이 조금 떨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실은 팀장님이 아니라 내가 떨린 거겠지. 지퍼가 다 올라간 것 같은데 팀장님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아 뒤로 돌아보니, 어느새 팀장님은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엘리베이터에 혼자 냉큼 올라타게셨다. 너무해. 말이라도 해주시지! 헐레벌떡 팀장님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곧 문이 닫혔다.
“왜 혼자 말도 없이 타세요.”
“그냥요.”
“치. 근데 팀장님 오늘 멋져요.”
“.....”
“뭐. 사실 맨날 멋졌어요.”
내 칭찬에도 팀장님은 아무 말도 없으셨다. ‘고마워요.’ 라든가. 하다못해 ‘네.’ 라고 들은 척은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오늘따라 더 까칠하신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에 팀장님을 흘겨봤다가 순간 멈칫했다. 팀장님....
“귀..”
“.....”
“빨개요...”
..팀장님의 귀가 붉어져있다. 입 밖으로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팀장님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먼저 빠져나가셨다. 절대 잘못 본 게 아니다. 희미했지만 팀장님의 귀가 분명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설마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가? 감기라도 걸렸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걱정되게 왜 이런 날 아프시고 그럴까. 내가 더 잘 챙겨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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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와 문화인의 밤 행사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이 되어도 김여주의 집 문이 열리지 않는다. 역시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다. 터덜터덜 김여주의 집 문 앞쪽으로 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한 손을 빼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이 열렸고,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로 보이는 김여주는
“.....”
예뻤다. 평소와 다른 화장 때문인지 분위기 자체가 달라보였다. 가만히 김여주를 보다가 머뭇거리며 나를 부르는 김여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 방금 넋 놓고 있었던 건가? 미쳤네, 도경수. 부디 눈치 없는 김여주가 눈치 채지 못했기를 바랬다. 내 바램대로 김여주는 아무래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 표정 같은 건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뭔지 모를 자신의 사정으로 이미 불편해보였기 때문이다. 날 불러놓기만 하고 말이 없는 김여주. 대체 뭐길래 이래?
“저 지퍼 좀 올려주세요...”
“..뭐라고요?”
내 귀를 의심하고 다시 한 번 묻자, 김여주는 지퍼에 손이 끝까지 안 닿는다며 말끝을 흐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여자는 날 좋아한다더니, 내가 남자로 보이긴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겁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해오는 게 말이 안 된다. 제 맨 등을 내게 보이겠다는 말이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대체.
“뒤 돌아봐요”
“네?”
그렇다고 김여주를 옷도 다 못 입은 꼴로 행사에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말에 바보같이 되묻는 김여주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렸다. 작게 휘날린 김여주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진 등에 지퍼를 어떻게 올려야할지 난감해하고 있던 찰나에, 김여주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너머로 넘긴다. 말갛게 드러난 김여주의 맨 어깨와 등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김여주가 날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했다.
“......”
“..팀장님?”
“..아. 네.”
순간 너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너는 알까.
첫댓글 얼레리꼴레맄ㅋㅋㅋ서로좋아한대여
하아....이제 고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