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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川齋舍重建記 少尹李公衣履之藏在縣西沙川洞子姓至今保守三百餘年嗚乎遠哉公諱軒慶之永川人也世居貫鄕 有諱大榮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實爲永李之中始祖而於公爲五代祖高祖諱得芬典工判書曾祖諱 文卿保勝護軍祖諱松侶吏部侍郞考諱日忠主簿秘書少監皆麗朝官職也世代已遠文獻無徵聲徽不 大傳而喬木世室累葉炳靈大抵爲積善之家也公之生在麗末盖當革命之際以遯跡自靖之計遍訪佳 山水至本縣汾川乃曰天藏好丘以待主人彼汾之曲是我攸廬遂稅駕焉禮之有永李實自公始意在入 林之密而入山之深也披荊榛開天荒結屋數架扁以洛隱幽居其居鄕也老少俱得歡心與之追隨樂道 以善成人之美天性然也以門蔭除軍器寺少尹年八十四卒葬于沙川乙向之原夫人宣城李氏先公歿 墓他麓巳向之原乃公手點處也兩塋東西相望而間一水長子坡文科義興縣監次子塢文科翰林直提 學當公之喪義興公年已七十直提學公亦踰不毁之年猶能廬墓致哀以終三年而丙舍之創權輿於此 至今樵童野叟指點爲李某基實蹟之久而不泯乃如此繼以奉禮公孝孫麟蹄縣監公欽世守而奠掃焉 至玄孫孝節公聾巖先生益張大之恢拓舍制兼置土田臧獲每當春秋奠掃之際齋室潔修庖廚整頓守 護之節於斯爲盛其後賀淵梅巖艮齋諸公克承先志不懈益虔以外裔則晦退兩先生尤大彰明較著而 嶺中諸儒洛下名卿多彌甥也嗚乎休哉顧其門運中否家聲零替墓道未遑顯刻崇禎年間始立小碣亦 屆丙舍措置根深源遠後孫有可以藉手也是時舍旣年久頹圯遂成老屋聚姓孫名下木數百疋助其事 力稍廣舊制增置新規齋堂庖廚廐庫合爲二十三間後孫上舍公百葉後改永植取其前後事實集成一 冊汾溪公元弼倡爲一律勉諸族以完護之意又上舍公東弼續以和之鄕中諸老亦多步韻幷與諸孫之 作合爲一帙櫝以藏之舍中前後故事作一文獻可開卷而考也不幸乙巳秋續出之災起於東廊假簷正 堂翼室頃刻而空先世遺墨前少尹洛隱公六大字及故事二冊蕩爲灰燼更無副本可憑嗚乎惜哉後孫 老少驚惶齋會卽操文告由於墓前以慰震驚遂相與開坐於破瓦殘礎之間涕泣而相告曰吾族雖擧皆 窮約而以多寡之數則可謂百足之虫也爲先之道惟在竭力而不在於貧富肯構之責惟在殫誠而不在 於饒乏門衰祚薄雖有此變重建之擧不容但已盍亦齊心一力謀所以更始乎聞者一口同辭曰諾遂定 出都監二人曰昌龍曰東馨有司三人曰鴻泰曰思默曰壽龍棟樑新材自有龍山丘木經用之費分定各 派名下其餘冗雜骨董之需惟在主事之手分闊狹卽席定議而退翌年掌事諸員收得各派名錢且責奴 婢可堪之類以近百緡貿得村民材瓦補新材之不足寫材於道谷借丁於校院隨削隨運士友競勸樂爲 之助以三月二十四日先立正堂八間四月二十四日升欐材兼新舊役借公私左右夾室東西長廊次第 而立不出五六日建二十三間屋子若干材木未準入者宜仁李陰城芝涯金上舍各以丘木許其容入面 內英陽南氏德山尹氏宣城金氏亦皆聞風而許斫焉豈有他哉皆公內外餘慶之所及而亦見今世之尙 有好人也以木則尺朽無棄材以財則一毫不妄費名下收穀不過五六十包所持者狹前後之役不知其 幾千百名役鉅力綿爲何如哉猶能撰斲無停供饋無乏兩朔之內訖工斷手士殫匠勤正謂此也鄕人譚 者素稱李氏爲先之誠果知其非誣也許多本孫太半貧困餓躬不閱未必皆窮不失義也未必有學問之 力也至於此事莫不奔走効勞一其心力期於準事而後乃已嗚乎其可尙哉運氣雖衰本天不壞李氏其 復興乎旣成而後落之會者皆歸功於都監都監之於此事勤亦摯矣遜謝不敢當而歸之先蔭積慶天佑 神助其言亦知義哉雲仍耆舊凋謝殆盡惟有汾沙李丈巋然若魯靈光今以八十二歲之年構成草本手 自繕寫屬不侫爲之記儘可驚也不侫忝在彌甥之列何敢以不文辭略叙古今事實前後成毁幹事諸人 之勞如右煩而不刪得其詳以備舍中故事之萬一云爾 崇禎紀元後三戊申淸和之望外裔孫通訓大 夫前行司憲府掌令李級謹記
사천재사 중건기 소윤을 지낸 이공의 묘소는 예안현 서면 사천동(모란)에 있는데 자손이 지금까지 三百여년을 지켜왔으니 아! 오래됐도다. 공의 이름은 헌(軒)이고 경상도 영천인(永川人)으로 살라온 곳을 관향으로 했다. 이름이 대영(大榮)인 분은 신호위 대장군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졌는데 실지로 영천이씨의 중시조이고 공의 五대조이다. 고조의 이름은 득분(得芬)이고 전공판서를 지냈고 증조의 이름은 문경(文卿)이고 보승호군을 지냈고 조부의 이름은 송려(松侶)이고 이부시랑을 지냈고 아버지의 이름은 일충(日忠)이고 주부와 비서소감을 지냈는데 모두 고려의 관직이다. 세대는 이미 멀어졌고 밝혀 볼 문헌도 없고 울렸던 명성도 전하는 것이 많지 않으나 우뚝한 가문으로 훌륭한 분이 여럿이 나왔으니 대개 적선(積善-선을 쌓음)의 가문이라고 한다.
공의 출생은 고려 말엽이었으니 아마도 혁명할 당시라서 자취를 숨기고 스스로 안정할 계획으로 은거할만한 곳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본 고을의 부네(汾川)에 이르렀다. 이에 말하기를 『하늘이 감추어 둔 좋은 곳으로서 주인을 기다리는구나. 저 부네 골짜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다.』고 하고는 드디어 이사를 했다. 예안에 살고 있는 영천이씨는 공으로부터 시작됐다. 뜻은 빽빽한 숲속에 들어가거나 깊은 산에 들어가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있었다. 집 몇 칸을 지어서 『낙은유거(洛隱幽居)』라고 현판을 걸었다. 마을에서는 노인과 젊은이 모두에게서 환심(歡心)을 얻었고 함께 즐거운 길로 따르게 해서 훌륭한 어른으로 찬미했으니 천성이 그러하셨고, 가문의 음직(蔭職)으로 군기시 소윤을 제수하시고 八十四세에 돌아가시니 모란의 을향(乙向)에 안장했다. 부인 선성이씨(宣城李氏)는 공 보다 먼저 돌아갔고 묘소는 다른 산기슭의 사향(巳向)의 언덕인데 공이 직접 잡으신 곳이다. 두 분 묘소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서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장자 파(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 현감을 지냈고 차자 오(塢)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직제학을 지냈다. 공의 상(喪)을 당할 때에 의흥공(坡)은 이미 七十세였고 직제학공(塢) 또한 五十이 넘었으나 오히려 묘소의 여막에서 슬퍼하며 三년을 마쳤다. 그리고 재사를 임시로 창건한 것도 이 때였고, 지금도 나무꾼이나 늙은이들이 이(李) 아무개의 터전이라고 지적한지가 오래됐어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어서 봉례공 효손(孝孫)과 인제 현감공 흠(欽)이 대대로 수호하며 제사를 모셨다. 현손인 효절공 농암(聾巖)선생에 이르러서 재사의 규모를 더욱 크고 넓게 확장하고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마련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모실 때마다 재실을 깨끗이 수리하고 포주(庖廚-부엌과 주소)를 정돈하니 수호하는 범절이 이렇게 성대했다.
그 후 하연공(賀淵公-仲樑) 매암공(梅巖公-叔樑) 간재공(艮齋-德弘)의 여러 분이 선대의 뜻을 이어 받들어서 게으르지 않고 더욱 정성스러웠다. 외손으로는 회재(晦齋-李彦迪)와 퇴계(退溪-李滉) 두 분 선생이 더욱 대단하고 뚜렷하게 드러났고, 영남의 여러 선비 중에 명성이 드러나서 이어지는 외손이 많으니 아! 아름답도다. 회고하니 문중의 운세가 중간에 막히기도 하고 가문의 명성이 떨어지기도 하여 묘소의 비석을 마련할 겨를이 없다가 숭정(崇禎) 년간에 비로소 작은 비석을 세웠고, 또한 재사의 마련에 이르러서는 근원이 깊고 오래됐으며 후손들이 직접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재사는 이미 오래되고 허물어지기도 하여 노옥(老屋)이 되었었다. 자손의 이름 아래로 목화(木花-무명) 수백필이 모아져서 그 일에 힘을 보탰고 조금씩 넓히던 옛 규모를 새로운 규모로 증축하여 재실과 대청과 부엌과 주소와 마구와 창고를 합하여 二十三칸이 됐다. 후손인 상사공 백엽(百葉-후에 永植으로 개명)이 그 전후 사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과 분계공 원필(元弼)이 한 율(律)의 시를 지어서 종친들이 힘써서 완벽하게 수호하라는 뜻을 나타낸 것과 또 상사공 동필(東弼) 계속하여 화창(和唱)한 것과 향중의 노인들 역시 많이 차운(次韻)한 것과 여러 자손들이 지은 것을 아울러서 한 질(帙)의 책을 만들어 궤짝에 갈무리했었다. 재사에서 있었던 일의 전후를 하나의 문헌으로 만들었으니 책을 젖히면 살필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을사년(一七八五년) 가을에 동랑(東廊)에서 계속하여 화재가 나서 잠깐사이에 대청과 익실(翼室-딸린방)의 처마에 이르니 안타깝게도 선조의 유묵인 소윤을 지낸 낙은공(洛隱公)의 큰 글씨 여섯 자와 고사(故事) 두 권이 불에 타서 없어졌으므로 부본(副本)이 없어 다시 증빙할 수 없으니 아! 애석하도다.
후손 노소가 깜짝 놀라서 재사에 모여서는 바로 글을 지어 묘전에 고유(告由)하여 몹시 놀란 영혼을 위로했고, 마침내 깨어진 기와조각과 남은 주춧돌 사이에 둘러앉아서 울먹이며 서로 하는 말이 『우리 일가가 비록 거개가 가난하나 숫자의 많고 적음은 여러 갈래로 퍼졌다고 할 수 있고, 조상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노력을 다하는데 있는 것이지 부자나 가난한데 있는 것이 아니며 긍구(肯構-조상의 업적을 이어감)의 책임은 오직 정성을 다하는 있는 것이지 (재물이)넉넉하고 모자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문중이 박복(薄福)해서 비록 이런 변을 당하고 있으나 중건의 거사(擧事)는 그만 두는 것이 용납 안 되니 어찌 마음을 다져서 한결같은 노력으로 도모하여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한 목소리로 『좋소!』라고 하여 드디어 뽑아서 정한 도감 두 사람은 창룡(昌龍)과 동형(東馨)이고 유사 세 사람은 홍태(鴻泰)와 사묵(思默)과 수룡(壽龍)이다. 마룻대와 들보로 쓸 새 재목은 용산(龍山)의 언덕에 있는 나무를 쓰고, 사용할 경비는 각 파에 나누어서 정하고 나머지 잡다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마련하는 것은 오직 일을 주관하는 사람의 수완이 넓고 좁음에 있다( 주사자의 능력에 맡긴다)고 즉석에서 의논하여 정하고는 물러났다. 다음해(一七八六년-丙午)에 일을 맡은 여러 분이 각파의 명전(名錢-분담금)을 거두고 또 노비가 맡아서 감당할 수 있는 류(類)가 백 냥에 가까웠으며 마을 주민의 재목과 기와를 사서 새 재목이 모자라는데 보충했고, 재목은 도곡에서 다듬고 장정은 향교와 서원에서 빌려서 다듬고 운반하니 사우(士友)가 서로 권하고 기꺼이 협조했다. 三월 二十四일에 먼저 대청 八칸을 세우고 四월 二十四일에 상량을 했는데 재목은 새 것과 헌 것을 섞었고 역부는 공청(公廳)과 사가(私家)에서 빌렸다. 좌우에 작은 방과 동서의 긴 복도를 차례로 세운지 五, 六일이 안되어 二十三칸의 집을 건립했다. 약간의 재목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의인의 이음성(陰城군수를 지낸 李世述)과 지애(芝涯) 김상사(金협)가 각기 언덕의 나무를 허락하여 들여오고 면내의 영양 남씨와 덕산 윤씨와 선성 김씨가 또한 모두 소문을 듣고 베어내기를 허락했으니 어찌 (원인이) 다른 곳에 있겠는가? 모두 공 내외분의 남은 경사가 미친 바이며 또한 지금 세상에서 숭상할만한 호인(好人)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수는 한 자도 썩히거나 버리는 재목이 없었고, 돈은 한 푼도 낭비하지 않았으며 이름을 적고 거둔 곡식은 五, 六十포에 지나지 않은데 가진 것이 적어도 전후(前後)의 역사(役事-공사)에서 몇천 몇백명을 부렸는지 알 수 없어도 큰 역사에 적은 힘이나마 이어졌으니 어떻다고 하리오. 오히려 공사는 정지함이 없이 다듬고 지었고 음식은 모자람이 없이 공급됐으며 공사는 두 달 안에 마치고 마무리했으니 사가(士家-선비 가문)의 정성과 목수의 부지런함이 진정으로 이렇다고 하겠다.
향인이 평소에 칭찬하는 말이 『이씨의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 과연 꾸며낸 말이 아님을 알겠다. 많은 본손(本孫-자손)의 태반(太半-三분의二 또는 과반수)이 가난하나 굶주림을 돌아보지 않고 반드시 모두 뜻을 잃지 않았으며 반드시 학문에만 힘쓰고 있지도 않았고 이 일에 이르러서는 분주히 노력하지 않음이 없이 기대한 대로 준비하여 마쳤으니 이! 숭상할 만 하도다. 운수가 비록 쇠하였으나 근본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이씨는 부흥하리라.』라고 했다. 일을 이룬 후에 낙성(落成)에 모인 사람들이 도감에게 모든 공을 돌리니 도감은 이 일에서 부지런하고 또 진지(眞摯)했으나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감히 가당치도 않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하늘과 신령이 경사를 도왔다고 하니 그 말 역시 의리를 안다고 하겠다. 자손 중에서 옛 노인은 거의 다 돌아가고 오직 분사(汾沙) 이장(李丈-李復馨)이 홀로 남았는데 영광(靈光-총기)이 무디어진 것 같았으나 금년에 八十二세로서 초본(草本)을 구성하고 직접 베껴주면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부탁하는데 깜짝 놀랐다. 나는 외손의 대열에 있으니 어찌 감히 짓지 않는다고 사양하리오. 서문을 간략하게 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헐리고 이루어낸 전후 사실과 간사(幹事) 여러 분의 노고를 오른쪽과 같이 번잡하게 하면서 깎아내지 않은 것은 얻은 것을 상세히 기록하여 재사에 비치함으로써 사적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함이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무신년(一七八八년) 四월 十五일에 외예손 통훈대부전행사헌부장령 이급(李級)은 삼가 기록한다.
註 ①臧獲(장획) - 노비, 장(臧)은 사내종 획(獲)은 계집종 ②崇禎(숭정) -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一六二七-一六四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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