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이다.
우리나라 유일한 내륙도의 남쪽 한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고장이어서, 남들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어 오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8키로쯤 더 가면 상주 땅이니, 경북과 도계(道界)를 이루는 산간 부락이다.
지금이야 그곳도 발달된 교통의 덕을 입어 오가는 일에 별로 불편이 없지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기에는 교통이 많이 불편했다.
1. 입향조(入鄕祖)의 체취가 서린 고봉정사
고향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조들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사적지 ‘고봉정사(孤峰精舍)’이다.
마을 입구에 상징처럼 서 있는 이 곳에는 나의 입향 조(入鄕祖) 되시는 壽자 福자 할아버지
(1491-1535, 호는 병암(屛庵) 선생을 비롯해서, 경주 김씨의 충암(沖庵) 김정(金淨) 선생, 그리고
강릉 최씨의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선생 세분의 위패를 모시고 이 고장의 유림들과 그 자손
들이 모여 매년 음력 3월 중에 제사를 지낸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으로부터 이 세 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고 자랐다.
내 아버님께서는 입향조께서 1519년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어 관직 (이조 좌랑)을 떠나야 했고,
이로 인해 각처를 유람하시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 마을에 정착하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올곧은
선비의 집안이며 자손임을 유념하라고 당부하셨다.
입향조께서는 나중에 복직이 되셔서 구례현감 재임 중 별세, 이 지역에 안장(安葬)되셨고 그 후로
자자손손 이 지역을 지키며 오래도록 살아 온 가문의 일원(一員)이 된 셈이다.
그러니까 이 고봉정사는 나에게 뿌리 의식을 심어주고 또한, 선조들께 누(陋)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 산실(産室)이 되는 셈이다.
2. 나의 큰 바위 얼굴, 구병산(九屛山)
구병산은 해발 877미터의 산이다. 산세가 마치 아홉 폭의 병풍을 두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어린 시절 내 집 마루에 앉아서 이 산을 바라다 보면 시야에 잘 들어 왔다.
특히, 정상 부근과 그 주변이 한 눈에 들어 와서 나는 곧잘 이 산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거친 바위들이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의 모습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노여워하다 가는 다시 근엄하게 변하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러면서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산 정상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
이 구병산의 의연하고 변함없는 모습에 친근감을 느끼면서 마치 나의 분신이라도 대하는 양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로, 아직도 내 맘속에 자리하고 있다.
3. 내 영혼의 길잡이, 시골 예배당
고향하면 잊지못하는 또 하나의 존재, 그것은 바로 고향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작은 예배당
이었다. 1951년 12월에 이 예배당이 우리 동네에 세워졌고, 나는 1961(초등학교 5학년)년 여름방학
어느 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당시, 뒷집에 살던 친구 J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아 마치 인심이라도 쓰는 양 따라서 들어 갔던
그 날 이후로, 나는 지금 까지 교회와 인연을 맺고서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한 때 신앙적으로 방황도 하고, 요즘 용어로 소위 ‘가나안’ 교인 (믿기는 하면서도 교회는
안 나가는 신자)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이 예배당에서 비롯된 내 신앙적인 삶은 오늘까지 이어져
왔고, 그 출발이 바로 이 작은 시골 예배당, 지금의 관기교회(官基敎會)이다.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이는 사람들 마다 지니는 사연과 상황에 따라서 그 느낌과 감동도 각기 다를 것이다. 나에게 고향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존재이고, 앞으로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나의 나 됨’을 부단히 일깨워
주는 격려자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듯하다. (KBS 사우회보 게재)